'꽃과 남새'...남새와 과일의 전면 배치, 음양의 조화 자연스러워
'자화상'...고집스러운 성품과 강렬한 눈매, 충직한 인상
'장미 정물'...여인 초상화처럼 고아하고 세련된 감성과 풍부하고 온화한 서정미
'금강산 풍경'...온정리 경치 풍경화, 역동적 형세와 균형적 대비 돋보여
'고향길'...장진군에 머무를 당시 아련한 추억의 향기와 여운 짙게 풍겨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방목지 아침(90-50 1968년)
방목지 아침(90-50 1968년)

▲방목지 아침(90-50 1968년)

산중 목장에서 노니는 소와 양과 돼지들의 모습이 참으로 평화로워 마치 극락의 한 장면을 연출한 것처럼 보인다. 안개가 피어올랐다 걷혀서 장막이 벗겨지는 듯한 신비로운 산중의 아침은 휴식의 무드와 평안의 마음을 촉촉히 안겨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홍종원의 세심한 붓터치가 금빛 나뭇잎 물결을 이루고 있어 환상적인 기분을 자아낸다. 그 시절 지상 낙원처럼 펼쳐진 자연 풍광에 감명을 받아 행복감에 젖어 있는 화가의 모습이 선연하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순수예술의 영역 마저도 어떻게 해서든지 정치판으로 끌어들이려 안간힘을 쓰는 정치인들의 모습과는 상극적이다.

유엔 제재 국면 하에서도 화해 협력을 위한 인도적 문화적 교류는 장려하고 있는 세계적 추세에 역행하는 처사가 아닌가 여겨진다. 유엔 제재의 궁극적 목적은 결국 남북간 화해와 교류를 통한 무장 축소 지향과 평화 정착이다. 제재 그 자체가 목적도 아니고 북한의 붕괴를 노리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민간이 주도하는 남북간 미술 교류는 이러한 취지에 부합하고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애틋하게도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절 활발한 10여년간의 교류 협력기간이 있었고,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시절에도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이 열렸던 시기가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 재임시 교류기간까지를 포함하면 25년간 남북한간의 문화교류의 빗장이 풀려왔다. 이 기나긴 시절에 여러 대통령을 비롯하여 남한의 많은 미술애호가들이 북한 미술품들을 감상하고 애장해온 것은 남북한간의 정치군사적 긴장과 갈등 국면 속에서도 직간접적으로 문화적 벼랑을 이어준 출렁다리이자 삭풍한설을 막아온 바람막이 역할을 담당해왔다.

꽃과 남새(60-39 1971년)
꽃과 남새(60-39 1971년)

 

자화상(26-32 1957년)
자화상(26-32 1957년)

▲꽃과 남새(60-39 1971년)와 자화상(26-32 1957년)

보통의 정물화 구성에서는 남새(채소류)와 과일 등은 식품류로서 같이 묶여서 등장하기도 하는데 비해 꽃이 배경에서 남새와 함께 어울리면서 후광 효과를 발하는 구도는 보기 드물다. 서양의 정물화 컨셉에서는 꽃은 귀하고 남새 및 과일 등 식품류는 친서민적이어서 각자 놀거나 따로 분류되기 쉽다. 하지만 동양의 기명절지도풍의 정물화에서는 남새와 과일은 필수 먹거리로서 국화와 대나무 등의 화훼류와 자주 어울리며 짝을 이룬다.

이러한 꽃들이 아름답고 귀한 품격을 받쳐주는 구도 하에서 남새와 과일의 전면 배치는 마치 음양의 조화로운 산물처럼 자연스러워 보이면서도 보다 생명감 있고 구성이 더욱 탄탄하게 여겨진다. 이처럼 동양에서의 정물화 구성이 오히려 훨씬 더 실생활에 밀착되어 보이는 것은 항상 음양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했던 사상과 마음가짐에 기반을 둔 때문이 아닐까 여겨진다. 꽃과 함께 양배추와 당근 및 오이, 호박, 대파, 감자 등의 배열도 참으로 특색있다. 바탕색을 미리 칠하고 나서 그 위에 덧칠하고 또다시 긁어내는 정성어린 섬세함도 돋보인다.

한편 북한에서는 유화건 조선화건 전래적인 조선화 화풍을 추구하며 참신성의 기반을 닦아오던 터였기 때문에 이러한 꽃정물화와 남새 정물화의 공동 구성이 이질적이지 않고 익숙하면서도 더 나아가 친화적으로 비칠 수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북한 유화가들의 정물화에서도 꽃 정물화와 남새 정물화의 양자 조합은 쉽사리 보기 어렵다. 관례적으로 식기류와 술병 등이 남새류 혹은 과일 등과 보다 생활에 밀착되고 시각적으로 한 덩어리로 엮겨져 있기 때문에 대개는 그 둘사이의 궁합이 더 보편적이다.

홍종원은 월북 직후 젊은 시절부터 북한 화단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많은 조명을 받았으나 점차적으로 화단의 중심부에서 멀어져서 말년에는 청진에서 한가한 생활로 접어들게 된다. 고집스러운 성품과 강렬한 눈매와 충직한 인상을 지닌 본인이 원했건 어떤 이유에서건 화단의 중심 실세적인 이미지가 약화되었다. 이와같이 그의 독자적인 노선이랄까 고립적인 화풍에서 이러한 신선한 고품격의 정물화가 탄생한 저간의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합당한 추론이 가능해진다.

장미 정물(46-33 1996년 3월)
장미 정물(46-33 1996년 3월)

▲장미 정물(46-33 1996년 3월)

한자어로 풀어보면 담장에 기대어 자라는 꽃이 장미이다. 장미는 스스로 줄기를 반듯이 세워 자랄 수 없기에 자신의 넝쿨을 걸칠 울타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땅바닥에 홀로 내버려두면 아름다움을 뽐내기는 고사하고 꽃으로 생존하기조차 어려우며 사물에 치이거나 짐승들에 밟혀 죽기 십상이다. 담장과 울타리가 곁에 있어 줄 때만이 장미는 그 존재의 가치를 드러내는 의존형의 꽃이다.

반면에 장미는 의지할 곳이 확실히 있으면 한겨울에도 그 꽃잎이 홀로 지는 법이 없이 줄기에 붙어서 그대로 말라 죽거나 얼어 죽는 길을 택하여 스스로 박제화되어 시들어버린다. 한겨울 맹추위에 장미의 이런 모습을 볼 때면 가히 장미의 지조와 기상이 놀라운 느낌이 들며 자신의 꽃잎을 떨구지 않는 그런 기품이 꽤나 매섭고 독한 꽃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장미는 매혹적인 향기를 발산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지만 가시가 많고 자신의 꽃술을 덮어버려 짐승들이 접근을 하지 못하게 하거나 벌과 나비 등의 곤충을 통해 수정을 하지 못하게 한다. 이런 모습에서는 화류계 여인들이 비록 유혹적인 미모에 뭇남성들을 매혹시키지만 결혼을 하지 못하여 독신으로 살거나 아이를 잉태하지 못하는 고독한 모습과 비견되기도 한다.

홍종원의 정물화를 보면 그의 강인한 인상과는 달리 꽤나 다감하고 여성적인 섬세함이 엿보인다. 그의 장미 꽃정물화를 보면서 마치 여인 초상화를 그리듯 고아하고 세련된 감성을 노출시키며 풍부하고 온화한 서정미를 풍겨내고 있다. 장미꽃들은 은은하고 고상한 분홍빛 색채미를 자랑하며 고동색 꽃병을 담장처럼 의지하고 있다. 녹회색의 배경색도 귀족적인 풍미로 우아한 아우라를 받쳐주고 있다. 하지만 붓터치감은 여전히 다소 거칠고 입체감을 살려주며 힘이 있어 보인다.

금강산 풍경(8호 1976년)
금강산 풍경(8호 1976년)

▲금강산 풍경(8호 1976년)

이 작품은 금강산 온정리 경치를 근접하여 그린 듯한 풍경화로 보인다. 작은 화면이지만 사선의 산세를 좌우측에 배치하여 역동적인 형세와 균형적 대비를 이루며 작지 않은 화폭으로 비춰지며, 안쪽에는 주봉산이 병품처럼 감싸안아 맞이하는 듯한 포즈를 취한다. 우람한 바위 산자락이 원경의 산쪽으로 수렴되는 구도로 인해 공간적 깊이와 웅장한 숲세를 드러내고 있다. 빗살 형태로 겹쳐진 계곡을 휘돌아 나오는 계곡물이 부채살처럼 펼쳐지면서 조각구름이 걸린 상단의 하늘과 짝을 이루어 시원스럽고 청명하며 상쾌한 가을 이미지를 사뿐하게 전해주고 있다.

홍종원은 청년시절인 28살 때 엄청난 조명과 각광을 받은 기록이 있어 조선역대미술가편람을 인용하여 전한다. “그의 1955년작 <조국을 위하여>는 6.25전쟁 주제 작품 가운데 가장 우수한 대표작의 하나이다. (중략) 작품은 또한 비범한 조형적 구성과 활달한 필치, 사실주의적 묘사의 진실성을 담보하는 세부형상의 생동성으로 하여 특출한 사상예술적 성과를 이룩하였다.

이것으로 하여 이 작품은 우리나라 미술은 물론 이 시기 세계미술 발전에서도 뚜렷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이 작품은 창조되자마자 우리 인민과 인민군인들 속에서 폭풍같은 반향을 일으켰으며 벽장화(벽을 꾸미는 그림)로도 수많이 복제되어 거리와 마을, 공장과 농촌, 학교들에 걸려 커다란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 인민들을 영웅적 위훈에로 고무하였다. (중략)

이 작품은 색채 구성이 명확하고 소묘가 든든하며 필체가 힘찬 것은 조형미를 안받침한다. 이 작품은 오늘도 가요 <결전의 길로>와 함께 우리 문학예술 작품에서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우수한 성과작으로 인정되고 있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이 하나의 작품에 대해 1페이지 반 정도의 지면을 할애하며 다양한 평론과 극찬에 가까운 칭찬을 쏟아낸 사례는 매우 드물다.

고향길(44.5-31.5 1985년)
고향길(44.5-31.5 1985년)

▲고향길(44.5-31.5 1985년)

이 그림은 홍종원이 장진군에 머무를 당시의 아련한 추억의 향기와 여운이 짙게 풍기는 운치 있는 풍경화이다. 이 화폭에서 풍기는 전반적인 구도는 아기자기하고 역동적이며 색채 형상성이 선명하고 감각적 포인트가 인상적이며 예리하다. 이 그림은 하늘과 땅과 물의 대비가 입체적이어서 자연산천의 산수 풍경화 못지 않게 작은 화면에서도 볼거리가 쏠쏠하다.

넓은 하늘의 탁트인 전망이 시원스러우면서도 휘감아도는 양떼구름의 움직임이 굽이쳐 흐르는 개천 줄기와 ‘S’자로 휘돌아 가는 인도와 함께 조화로운 호흡을 맞추며 그림에 자연미와 생동감을 고취하고 있다. 오른쪽의 비옥한 황토 벌판과 대비되는 강 좌측의 척박한 갈색의 미개간지가 묘한 대비를 이루며 무언의 암시를 내보이고 있다.

홍종원 화가 
홍종원 화가 

◇홍종원(1928.12.26 – 2004.7.22)은 누구인가?

월북미술가 중 스승복이 가장 많은 화가들을 꼽으라고 하면 정창모와 홍종원을 들 수 있다. 정창모는 월북 후 평양미대 재학시절에는 김장한, 림군홍 및 정종여가 연이어 그를 이끌었고 사회에 나가서는 리석호가 자식처럼 보살피며 대미술가로 키워냈다. 그런가 하면 홍종원은 남한에 있을 당시인 1947년에는 배운성이 운영하는 <운성회화연구소>에 연구생으로 들어갔다가 그곳이 운영이 중지된 후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로 가서 배움을 청했다.

홍종원은 인천에서 정미업을 하는 가정에서 자랐는데 1932년 파산하여 북행길에 오른 부모를 따라 청진에 정착하여 청진방직공장과 청진체철소에서 노동자로 일하였다. 그런데 부모님이 다시 서울로 가기를 희망하여 남한으로 내려와 그가 꿈꾸던 미술 견습생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1946년에 인천간판점과 삼성인쇄소에서 화공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첫발을 내딛고 그 이후 배운성과 이쾌대에게 수업을 받으며 급성장하게 되었다. 그는 1948년 홍익대학 미술과가 생긴 후에 그곳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배운성의 도움으로 유채학부에 입학하였다.

홍대 입학 후 홍익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동양화가 이응로와 월북한 조각가 유진명이 도움을 주며 그의 앞길에 등불이 되어 주었다. 그는 집에서 학비를 대주지 못하여 오전에는 조각학부의 수업시간에 모델을 서주고 오후에는 전공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노동으로 단련된 근육질 몸매에 골격이 뚜렷하고 강렬한 인상 덕분에 조각 모델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조각 모델로 활동하는 기간 다른 학생들의 필치와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하는 덕분에 눈썰미로 공부하는 많은 학습시간을 가진 것도 그가 미술가로 성장하는데 크나큰 자산이 되었다.

홍종원은 1982년 함경남도 장진군으로 자리를 옮겨 한동안 풍경화 창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기간 그는 많은 풍경 소품들을 창작했다고 조선역대미술가편람은 전한다. 주요 작품으로 <호반의 아침>(1990년), <고대 산사적지>(1991년), <호숫가에서>(1992년) 등 형상성 있는 그림들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 이후 말년에 다시 제2의 고향인 함경북도 청진시로 돌아가서 한적한 여생을 살았다. 이때 청진에 머물던 유화가 윤신재 등과 교류하며 지냈고, 그의 그림들이 윤신재 그림과 함께 중국으로 흘러나와 판매가 되었다.

불타는 정열과 투지로 그림을 배워 사상예술적으로 우수한 작품들을 창작한 명화가이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국가미술전람회, 부문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으며 25점의 작품들이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전시되어 있다.

1928년 12월 26일 경기도 인천에서 출생.

1937년 – 1942년 청진수남사립소학교 졸업.

1942년 – 1945년 청진방직공장 철공소에서 소년로동(전문미술가의 지도와 자습).

1946년 – 1947년 인천간판점, <삼성인쇄소> 등에서 화공.

1947년 – 1948년 <운성회화연구소> (배운성운영), <성북회화연구소> (리쾌대 운영) 연구생.

1948년 – 1950년 7월 홍익대학 미술과 유채학부 재학중 6.25전쟁으로 중퇴

1953년 월북.

1953년 - 1959년까지 건설국 미술제작소 화가.

1959년 – 1962년 위생선전관 화가.

1962년 – 1964년 공업 및 농업전람관 화가.

1964년 – 1982년 금성청년출판사 미술가.

1982년 이후 함경남도 장진군에서 창작활동

1993년 9월 조선미술박물관에서 개인전 진행.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