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가치 외면받고 인륜과 도의가 땅에 떨어지고 있는 현실
전통 유교문화와 선비정신 등 정신적 유산 계승 발전 기대

돈암서원의 중심 건물인 응도당 전경.
돈암서원의 중심 건물인 응도당 전경.

【뉴스퀘스트=김용섭 전북대 로스쿨 교수(변호사) 】 설날은 추석과 함께 우리의 전통명절이다. 설날의 세시풍속은 전통 유교문화의 일종이다. 오늘날 설날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는 대신 공휴일의 의미가 부각되고 있다. 설날에 차례상을 차리고 스승이나 마을 어른을 찾아 뵙고 세배를 올리는 풍습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조선시대 서원은 한국 유교의 전통과 정신문화을 간직한 공간이다. 지난해 725일 법률 제19569호로 성균관·향교·서원 전통문화의 계승·발전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약칭 성균관·향교·서원법)이 제정 공포되어, 126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수년전부터 매년 3-4차례 문화탐방을 해온 전북대 로스쿨의 동료 교수 4인은 청룡의 해를 맞이하여 116일과 17일 양일간 강경의 죽림서원과 논산의 돈암서원을 중심으로 문화탐방을 하였다. 이번 강경과 논산기행은 지난 가을 기호유학의 산실인 파주의 자운서원, 화석정, 심학산 등 문화탐방에 이은 것이다. 16일 오전 10시에 금화(琴和), 송백(松柏) 그리고 가산(佳山)이 전북대에서 모여 금화가 운전하는 차량으로, 우경(又經)은 군산에서 직접 차량을 몰고 약 1시간 가량 떨어진 강경의 옥녀봉에서 11시에 만났다. 엄동설한임에도 충남 지방 전통 문화의 보고(寶庫)인 서원(書院)을 중심으로 문화탐방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유서 깊은 강경의 죽림서원을 방문하기에 앞서 강경의 옥녀봉을 둘러보는 것은 근엄한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일종의 워밍업(warming-up)에 해당한다. 금강의 물흐름이 멀리에 까지 펼쳐지고 성황당 나무처럼 생긴 큰 나무와 봉수대가 있는 옥녀봉 밑에 조그만 상점이 눈길을 끌었다. 그곳은 구멍가게라는 상호를 표시하지 않더라도 구멍가게가 분명하다. ‘옥녀봉 구명가게라는 간판이 붙어 있어 놀랐다. 이는 불신의 시대에 솔직함의 징표일 수 있다. 그곳이 일제강점기 신사(神社)의 관리사무실로 쓰던 공간이라는 것을 알고 더욱 놀랐다. 일행은 옥녀봉에 올라가기 전에 구멍가게에 들려 잠시 둘러앉아 따뜻한 커피를 한잔하면서 그곳에서 50 여년간 같은 곳에서 상점을 열고 있는 은진 송씨 구순의 노파와 강경과 옥녀봉에 대하여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곳을 나와 옥녀봉 유래비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으로 문화탐방이 시작되었다. 옥녀봉의 풍광은 독일의 로렐라이 언덕에 견주어 손색이 없다. 금강의 물줄기의 흐름과 강가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겨울 바람을 마주하며, 논산 출신 박범신 작가의 우리시대 아버지를 주제로 한 <소금>의 배경이 된 그 주변을 사진도 찍으며 주마간산 격으로 둘러 보았다.

우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강경읍에 있는그때 그집에서 줄을 서서 기다린 후에 경찰 제복을 입은 단체 손님 등이 열심히 식사하고 있는 한쪽 편 만석의 일석을 차지하며 따뜻하고 맛있는 스지국밥과 막걸리로 오찬을 마무리하고, 죽림서원과 그 주변에 있는 임리정과 팔괘정, 황산근린공원으로 이동하였다. 충남 강경과 논산지역은 기호유학자인 율곡 이이, 구봉 송익필 그리고 우계 성혼의 학문적 계통을 이어 받은 조선예학과 법도의 산실이다. 이번 충남 강경과 논산 문화탐방의 중심인물은 최초의 산림(山林)인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이다. 조선후기 산림은 성리학과 예학에 깊은 식견 있는 재야선비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학자를 지칭한다. 김장생과 김집의 제자인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을 한 축으로 하고, 이와 대척점에 있는 미촌 윤선거와 그의 아들 명재 윤증이 다른 한 축을 형성한다. 이번 강경과 논산의 기행에서는 죽림서원과 돈암서원을 중심으로 전통문화유산에 담겨 있는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어보려고 한다.

죽림서원에서...
죽림서원에서...

◇ 죽림서원과 임리정, 팔괘정에서 사제관계를 생각하며

충남 강경은 '스승의 날'의 발원지이다. 강경은 행정구역상 논산시에 속한다. 조선시대에 강경은 여산 지방으로 불리어졌다. 율곡 이이를 능가하는 비운의 학자로 김장생의 또 다른 스승이 바로 구봉 송익필이다. 송익필은 여산 송씨이다. 이러한 연유는 사계 김장생이 낙향하여 후학을 기르기 위하여 금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황산정을 초막형태로 지었고, 훗날 그 이름을 임리정으로 하면서 인조 4년인 1626년에 설립하여 제자를 양성하는 강학공간으로 활용하였다. 김장생은 같은 해에 황산서원(죽림서원)을 설립하고 그 지역에 연고가 없는 그의 스승인 율곡 이이과 우계 성혼을 배향하였다. 그 후에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사계 김장생, 우암 송시열을 포함하여 모두 6현을 모시는 서원으로 발전하였다. 죽림서원은 도학 서원으로 통합적 성격의 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죽림서원은 물류의 흐름이 원활하였던 금강의 강경포구에 위치하고 있다. 죽림서원에 유도문(由道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문이 닫혀 있어서 서원안에는 들어가지 못하였으나 김장생이 의례와 주자대전의 제도를 고증하여 직접 설계한 헌장당(憲章堂)이 안내책자에 강당이 아닌 동재로 기록되어 있다. 헌장당에서의 헌장은 도덕과 법의 중간형태인 예()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8125일 공포한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이나, 서울시자치헌장조례나 충북대학교 대학헌장 등에 헌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있는 점에 비추어 죽림서원의 헌장당은 유교적 헌정주의를 표방하는 이름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죽림서원의 헌장당을 기숙사 형태인 동재로 보고 있는 것은 문제가 있다. 황산서원에 관한 자료 등을 토대로 살펴볼 때 강학공간으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강당이 없은 죽림서원은 강학공간을 외부에 있는 임리정과 팔괘정으로 마련하였다고 오해하는 견해도 있다. 서원의 공적인 강학공간과 임리정과 팔괘정이라는 사적인 공간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죽림서원은 남인 윤휴의 독자적 중용해석을 둘러싸고 여러 학자가 모인 자리에서 송시열과 윤선거가 치열하게 논쟁한 곳으로 유명하다.

죽림서원을 가운데 두고 우측 언덕 50미터 지점에는 임리정이 위치하고 있다. 임리정의 설립 전 황산정 시절에 김장생의 스승인 송익필이 방문하여 쓴 시가 임리정 안에 걸려 있고 송시열이 쓴 임리정이라는 편액도 그 안에 있는데 문이 닫혀 있어 볼 수가 없었다. 임리정은 전전긍긍 여림심연 여리박빙(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이라는 시경의 문구에서 유래한다. 임리정은 황산의 언덕 위에서 금강의 흐름을 조망할 수 있는 좋은 위치이다. 아마도 그 지형은 파주 심학산의 임진강 변에서 스승인 구봉 송익필한테 학문을 연마한 제자 김장생이 스승을 생각하며 그와 같은 강학공간을 마련한 것으로 짐작된다.

죽림서원의 건너편 바위 밑에 1663년에 우암 송시열이 세운 팔괘정이 있다. 팔괘정이라는 명칭은 주역의 팔괘에 연원하고 있다. 이는 우주와 인간의 변화의 원리를 교육하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팔괘정은 송시열이 금강의 수려한 경관을 즐기며, 특히 그의 스승 김장생과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에 임리정과 같은 모양으로 그곳에서 150미터 떨어진 지점에 설립한 강학공간이다. 팔괘정 뒤에 송시열이 가로로 쓴 청초안(靑草岸)과 세로로 쓴 몽괘벽(夢挂壁)이 교훈처럼 암벽에 새겨 있다.

이 공간에서 우암 송시열은 그의 제자인 수암 권상하, 외재 이단하, 노봉 민정중, 명재 윤증 등 훌륭한 인물을 길러내고 교육하였다. 송시열의 제자인 외재 이단하는 문형(文衡)으로 칭하는 대제학을 지내고 정승도 거쳤으나 불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 학자이다. 권상하는 스승인 송시열이 정읍에서 사약을 받을 때 끝까지 스승의 곁에서 유지를 받았다. 시대를 뛰어 넘어 남인 출신인 이중환이 택리지를 팔괘정에서 저술하였고, 선교사가 신식교육도 그곳에서 하였다고 하니 역사적으로 의미심장한 곳이기도 하다. 한때 대구, 평양과 함께 조선의 3대시장으로 번화했던 강경이 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쇠락한 도시라는 느낌이 들었다.

 

송종의(사진 가운데) 천고법치문화재단 이사장 사무실에서...
송종의(사진 가운데) 천고법치문화재단 이사장 사무실에서...

밤나무 검사 송종의 천고법치문화재단 이사장을 뵙고

일행은 여행길에 한때 검사로 명성을 날리다가 당시 장관급 공직인 법제처장을 마치고 귀거래사를 읇으며 낙향하여 논산에 천고재(天古齋)라는 집을 짓고 영농조합법인을 만든 송종의 전 법제처장을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대한민국 검사의 사표(師表)이자 법조계의 큰 어른로 평가받는 그와의 짧은 만남에서 카랑카랑한 평안도 사투리에 소탈한 현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변호사를 개업하지 않고 농업회사법인 써니빌 주식회사를 설립해 농산물 가공공장을 경영하면서 벌은 수익금 등을 출연하여 2014년 천고법치문화재단을 설립하였다. 현재 동 재단의 이사장으로 매년 국법질서의 수호와 법치주의의 기여한 이들을 선정하여 천고법치문화상을 수상하고 있다. 그의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송시열의 후손으로 알려지고 있다. 논산의 여행길에 잠시 찾아 뵙고 새해 덕담도 들을 겸 미리 연락을 드렸더니 흔쾌히 시간을 내주셨다. 송 장관께서 직접 집필한 ‘<공직회고록>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밤나무 검사가 딸에게 쓴 인생연가에 직접 서명을 하여 선물로 주었고, 공장에서 만든 원료로 제조한 딸기잼에 더하여 가족의 일화가 담겨 있는 문상익 일대기- 운명과 의지 사이에서라는 책도 선물받아 여행을 마치고 청렴무사(淸廉無私)의 공직관이 담겨 있는 일련의 서책을 완독할 수 있었다. 천목거사(天目居士) 원종(圓宗)으로 칭하는 그의 글을 읽으며 독실한 불자(佛子)로서 한학의 수준이 높은 경지에 있으며 필력이 웅혼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송 이사장의 덕담을 듣고 서둘러 사계고택(은농재)을 향했다. 오후 5시가 넘어 늦은 시간이라 대문은 닫혀 있는데 옆문이 열렸 있어 그 곳으로 들어가서 김장생과 그의 후손이 생전에 거주하였던 넓은 공간에 머물다 왔다. 저녁에 숙소인 돈암서원 바로 옆의 한옥마을에 도착한다고 연락을 하니 안내하시는 분이 직접 마중나와 친절하게 맞이하여 주었다. 그곳에 여장을 풀고 난 후에 연산에 있는 고향식당에서 저녁을 들었다. 이번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으로 송백의 영애가 등단하여 함께 이를 축하하는 저녁자리가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 잠시 들른 후 우경은 집안에 바쁜 일정으로 먼저 군산으로 귀가를 하였고, 3인이 숙소에서 맥주를 밤 늦게 까지 들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숙소는 미리 가산이 논산명예시민증을 발급받아 잘 꾸며진 전통가옥의 독채 건물을 저렴하게 예약한 것이다. 마침 저녁 포식에 술도 한잔 마신 터라 따뜻한 온돌방에 누웠더니 쾌적하고 편안했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다 읽어도 누울 와()자가 최고라는 이병주의 소설 산하(山河)’에 나오는 표현처럼 따뜻한 바닥에 온 몸을 지지며 객지에서의 편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돈암서원에서...
돈암서원에서...

◇돈암서원에서 부자관계를 생각하며

다음 날인 17일 오전 8시반에 일어나 아침을 숙소에서 그 전날 옥녀봉 구멍가게에서 구입한 컵라면과 믹스커피로 때우고, 도보로 근처에 있는 돈암서원으로 향했다. 논산 시청에 연락하여 문화해설사를 부탁하여 1시간 넘게 돈암서원의 구석 구석을 함께 돌면서 돈암서원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

돈암서원의 앞에 위치하고 있는 산앙루(山仰樓)라는 누각이 웅장하였다. 서원 입구의 현판이 입덕문(入德門)으로 되어 있는데 그 밑의 주춧돌을 3군데 원방각으로 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천지인의 의미로 둥근 모양의 돌, 네모난 모양의 돌 그 사이에 팔각모양의 돌이 있는 것을 보았다. 원방각이면서 각이 팔각으로 되어 있는 것이 강경의 팔괘정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돈암서원의 돈은 주역괘인 천산돈(天山遯)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은둔하다는 의미의 둔()이라는 뜻으로 읽히고, 주희 선생을 둔옹(遯翁)이라고도 하였다고도 하는 것과 서원의 이름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처럼 돈암서원은 주역의 원리와 성리학적 전통에 입각하여 평지에 넓은 공간에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죽림서원과는 달리 돈암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서도 훼철되지 않았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9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인근의 임리에서 현재의 위치로 1880년대에 옮겨 온 것으로 서원의 배치에 다소 변화가 생겼다. 응도당이 위치하여야 하는 곳에 김장생의 강학공간이던 양성당이 위치하게 되었고, 김장생의 부친인 황강 김계휘가 대둔산 고운사 터에서 강학하던 정회당을 그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이곳은 광산김씨 3대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돈암서원은 문묘에 배향된 김장생, 김집 부자와 그의 제자인 양송(兩宋)을 배향하고 있는 서원이다. 인조23년의 인조실록에 나와 있는 젊은 시절의 김집, 송시열, 송준길의 인물평을 보기로 한다. “상이 글을 내려 전 승지 김집과 전 지평 송시열을 불렀다. 김집의 자는 사강(士剛)인데 김장생의 아들이다. 김장생은 이이에게 배웠고, 김집의 학문은 가정에서 닦은 것이다. 사람됨이 온화하고 깨끗하였으며, 예로써 자신을 검속하였다. 소시적에 과거 공부를 하다가 만년에는 그만두고 학문에 마음을 쏟았는데, 늙도록 게을리 하지 않아서 고장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였다. 누차 사헌부의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다가, 기묘년에 집의로 부름을 받고 서울에 들어와서 승지로 발탁되었으나 곧바로 사직하고 돌아갔다. 송시열의 자는 영보(英甫)이고 송준길의 자는 명보(明甫)인데, 모두 충청도 회덕 사람이다. 두 사람 다 김장생에게 사사하였는데, 김장생이 언젠가 송시열을 두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독실하여서 반드시 크게 진취할 것이다."고 하였다. 처음에 대군(大君)의 사부가 되었으나 병자 호란 이후로 벼슬길에 뜻을 끊어서, 누차 벼슬을 주었으나 거절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송준길은 사람됨이 단아하고 학문에 뜻을 두어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금년 여름 지평에 제배하였으나 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고 소를 올려서 소현 세자의 상례에 대한 잘못을 논하고 또 원손을 잘 보양하여 국가의 근본을 튼튼히 할 것을 청하였다.”

돈암서원의 주배향자는 사계 김장생이다. 김장생은 사계집을 비롯하여 가례집람, 상례비요, 근사록석의 등 여러 저서를 남겼다.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은 서울의 서소문 정동 구 법원터에서 태어났다. 김장생은 13세에 송익필로부터 근사록과 예학을, 율곡 이이로부터 성리학을 수학하고, 33세에 성혼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향리인 충남 연산(連山)을 세거지로 하여 평생을 학문에 정진하였던 조선 예학의 종장(宗匠)이다. 그의 기호유학의 예학사상은 직()사상에 기초하여, 한국적 실정에 맞는 가례를 중시하였고 형식주의 보다는 실질에 기반하고 있으며 왕가도 사가와 동일한 인륜적 기초에 있다는 데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강 정구, 여현 장현광, 미수 허목 등의 영남예학과 다르다. 김장생은 조정에서 여러차례 관직을 제수하여 몇 차례 벼슬길에 나가기도 하였으나 향리에서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의 학문은 아들 김집을 비롯하여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등의 제자들에게 계승되었다. 송준길은 영남의 유학자이며 대제학을 지낸 우복 정경세의 사위이다.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 부자를 통해 조선 예학이 비로소 학문적 수준을 갖추게 되었다고 평가된다. 김장생은 예는 통서(統緖)를 바르게 하는 것이라 하고, 그의 아들 김집은 예란 인욕(人欲)을 억제하여 천리(天理)를 보존케 하는 법칙이라 하였다. 이들 부자는 주자가례와 고례의 이상적인 예정신을 회복하는 동시에 천리와 인정이 조화되고 우리 실정에 맞는 시의성과 실용성을 갖춘 예제의 구축을 통하여 사회기강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특히 김장생 부자는 우리 실정에 맞는 종법의 현실적 구현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기호 유학에서의 노론과 소론의 갈등은 우율(牛栗)의 학술적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이는 이황보다는 서경덕이나 기대승과 궤를 같이하고, 이이의 학맥은 김장생을 통해 그의 아들 김집을 거쳐 송시열 등에게 전수되었다. 그 반면에 윤증은 그의 부친 윤선거가 김장생과 김집의 문도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하였고 남인에 대하여 비교적 우호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성리학에 깊이 경도되어 있는 송시열과는 학문적으로 다른 경향을 보여주었다. 송시열과 윤증 사이의 회니논쟁을 통해 노론과 소론의 분당이 이루어졌다. 윤증은 “3년상이면 어떻고 1년상이면 어떠냐, 형식에 집착하거나 몰두할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송시열의 입장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이에 반해 송시열은 스승의 직()사상의 영향과 논어에서 말한 아침에 정도(正道)가 행해지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의미의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라는 공자의 유학정신에 철저하였다.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에서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영향력을 막강하였고, 왕명학은 주류 학문이 아니었다. 명재의 제자 중에는 우리나라 왕명학의 체계를 수립한 하곡 정제두가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율곡 이이의 수제자인 김장생은 인조반정 후에 서인 중에 적극적으로 공직에 출사를 하지 않은 청서파(淸西派)로 분류되어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국가 원로로서 성균관에 사업(司業)이라는 특별직에 제수되어 후학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또한 율곡 이이의 만언봉사에 준하는 분량으로 13조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특히 인조가 집권 초기에 부친을 국왕으로 추존하려고 하자 이를 반박하는 원종추종논쟁이 있어 자신의 입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미련없이 충남 연산으로 낙향하였다. 그의 제자 송시열도 1차 예송논쟁에서는 그의 뜻이 받아들여졌으나 2차 예송논쟁에서 허목, 윤선도 등 남인에게 밀려났다. 조선예학은 서인예학과 남인예학으로 나누어지는데 이러한 예학이 정치투쟁의 수단이 된 것은 노론과 남인의 치열한 해석논쟁에서 비롯되었다. 예송논쟁의 본질적인 차이점은 왕가의 윤리에 차별을 둘 것인가와 관련된다. 남인계통의 예학론자는 인륜문제에 있어 왕가와 사가를 달리 취급해야 한다는 논리라면, 서인계통의 예학론자는 직사상에 기초하여 인륜의 문제는 왕가라고 해서 사가와 달리 보아 예외를 둘 수 없다는 것이다.

돈암서원의 중심건물 응도당에서...
돈암서원의 중심건물 응도당에서...

돈암서원의 중심 건물은 응도당(凝道堂)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 응도당이 서원의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주강당인 양성당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양성당은 원래 돈암서원 안에 있던 건물이 아니다. 김장생이 아한정 터에 세웠던 서재겸 강학공간이다. 돈암서원을 현재의 위치로 이관하면서 응도당을 곧바로 옮겨 올 수 없어 양성당을 위치하게 된 것이다. 응도당의 현판 뒤에 걸려 있는 돈암서원(遯巖書院)이라는 글씨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응도당은 한국의 서원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강학공간으로 유명하다. 응도당의 격자 문이 그 크기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알 수 있었다. 한편 돈암서원의 배향과 제사공간인 숭례사 내삼문 담장에 문자가 새겨져 있다. 동쪽 편 담장에 지부해함(地負海涵)이라는 전서체의 4자성어가 적혀 있다. 땅은 온갖 것을 다 짊어지고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군자의 포용력을 말한다. 마치 이사의 간축객서에서 말하는 태산불양토양 하해불택세류(泰山不讓土壤 河海不擇細流)”의 경지를 말한다. 다음은 서일화풍(瑞日和風)이라는 글귀가 내삼문 서편 담장에 적혀있다. 그 뜻은 상서로운 날과 온화한 바람처럼 평안한 일상을 갈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삼문을 사이에 두고 박문약례(博文約禮)의 글자가 나뉘어 새겨져 있다. 박문은 널리 학문을 익히는 것이고, 약례는 핵심적인 예를 실천한다는 의미이다. 돈암서원은 특히 예학자를 길러낸 학술적 공간으로,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이 성리학의 이기논쟁 속에서 박문은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고 볼 수 있다. 김장생 부자와 그의 제자인 양송은 박문의 중요성과 함께 당시 사회적으로 정립되지 않고 미흡한 분야인 약례에 주안점을 두고 조선 예학의 바람을 일으켰다.

◇명재고택, 궐리사 그리고 한국유교진흥원을 둘러본 후 문화탐방을 마치며

3인의 일행은 노론계열의 돈암서원을 둘러 본 후에 이와 대척점에 있는 소론계열의 청빈한 윤증의 삶의 모습이 담겨 있는 명재고택에 들렸다. 그 곳에 살았던 백의정승 명재 윤증의 권력과 초연한 모습을 떠올렸다. 명재고택에 대문이 없는 대신에 장독대가 많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송시열의 친구이며 인척이 윤선거이고, 윤선거의 아들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였다. 그러나 송시열과 윤증의 사제지간의 갈등의 원인의 시발점은 윤선거가 남인 계열의 학자인 윤휴의 편을 드는 것과 관련된다. 송시열과 윤증의 갈등관계는 윤선거의 묘갈명 문제로 인한 것으로 알려져지만, 그것 만이 아니라 송시열이 스승인 김장생의 손자 김익훈의 처리 문제, 박세채에게 보낸 신유의서(辛酉擬書)의 문제로 양자의 관계는 서로 등을 돌리고 노론과 소론의 분당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박세채의 중재로 송시열과 윤증 사이에 화해를 위한 과천회동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윤증이 내건 3대 조건을 송시열이 들어 주기 어렵다고 박세채가 전하자 윤증은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논산으로 내려갔다. 만약에 3인의 대학자 간에 화해가 성사되어 3인이 출사하여 정승직을 나누어 맡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송시열은 제자인 권상하에게 궐리사를 노성에 짓도록 유지를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노론 계열에서 명재고택 옆에 노성향교를 지어 명재고택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견제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건축물의 배치가 명재고택을 양쪽에서 협공하는 형세인 것 만은 틀림 없다. 공자의 사당인 궐리사는 경기 화성과 논산 노성의 2군데만 있다. 노성의 궐리사에 공자를 주배향자로 하면서 송나라 6현인 정호, 정이, 장재, 주돈이, 소옹, 주희를 배향한 것은 권상하에게 그의 스승인 송시열이 유지를 남긴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는 송시열이 윤증과의 결별 후에 공자에서 주희의 성리학을 거쳐 율곡 이이, 사계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도학의 정통이 송시열에게 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이번 강경과 논산 문화탐방에서 시간제약상 들리지 못한 곳은 종택당과 노강서원 등이다. 노강서원은 성혼의 제자이며 그의 사위인 윤황을 비롯하여, 윤문거, 윤선거 형제와 윤증에 이르기까지 4인의 학자를 배향하고 있다. 노강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도 훼철되지 않은 파평윤씨 3대가 공존하고 있는 공간이다. 현재는 서원을 공사중이라 내부를 둘러볼 수 없어 아쉬웠다. 최근에 대규모의 유교시설인 한국유교문화진흥원이 파평윤씨 문중에서 체계적으로 과거시험 양성하던 종택당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유교문화진흥원의 자료실 촉오문(觸悟門)에 들려 직원들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그곳의 시설을 견학하였다. 그 위치가 논산 유교문화의 중심축인 돈암서원 인근이 아니라 명재고택과 파평윤씨의 종택당 부근이라는 점에서 지역사회에서 다소 논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파평 윤씨 문중에서 토지를 기부하여 유교문화진흥원의 위치가 그쪽으로 가게 된 것으로 전해 지고 있다.

마무리할 시점에 가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성균관·향교·서원법이 제정되어 금년 126일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므로, 충남 강경과 논산이 새로운 한국유교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기를 기원한다. 오늘날 전통적 가치가 외면받고 인륜과 도의가 땅에 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새로운 법률의 시행으로 강경의 죽림서원과 논산의 돈암서원 등 전통 유교문화의 진흥과 보존을 넘어 선비정신 등 한국의 정신적 가치를 계승·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김용섭 전북대 로스쿨 교수(변호사)
김용섭 전북대 로스쿨 교수(변호사)

◆ 김용섭 박사 프로필

- 경희대 법과대학 법학과 졸업
- 서울대 대학원 법학과 졸업 (법학석사)
- 제26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16기 수료
- 독일 만하임대 대학원 졸업 (법학박사)
- 법제처 행정심판담당관
- 한국법제연구원 감사
- 법무법인 아람 구성원 변호사
- (현) 전북대 법학전문대학교 교수, 변호사
- (현) 국회 입법지원위원, 대한변호사협회 법제위원회 위원
- (현) 한국행정법학회 회장, 한국조정학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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