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요의 탄생과 재담소리

젊은 시절의 신불출
젊은 시절의 신불출

노들강변은 노량진 일대의 한강 변

【뉴스퀘스트=김승국 전통문화칼럼니스트 】 길고 길었던 모진 겨울도 서서히 끝나가고 있다. 조금 지나면 강변의 버드나무에 물이 오르고 봄바람에 한들한들 나부끼는 버드나무 가지 모습이 정겹게 다가올 것이다. 

노들강변 봄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다가 / 무정세월(無情歲月) 한허리를 칭칭 동여매어나 볼까 /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으리로다 /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가노라.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신민요 <노들강변> 1절 가사이다. ‘노들강변’은 오늘날 서울의 노량진 일대의 한강 변을 의미한다고 한다. 신민요 <노들강변>은 경기민요 전문 소리꾼들도 즐겨 부르지만, 일반 대중들도 즐겨 부르는 민요이다. 이른 봄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물이 오르면 봄바람에 나부끼는 버드나무와 무정세월을 한탄하는 사람의 마음에도 아랑곳없이 무심하게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을 그림처럼 떠오르게 하는 민요이다. 슬픈 노랫말과 달리 선율과 장단은 경쾌한 느낌이어서 마치 달관한 듯한 무상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2절과 3절도 비슷한 내용이다. 

(2절) 노들강변 백사장 모래마다 밟은 자죽 / 만고풍상(萬古風霜) 비바람에 몇 번이나 지여갔나 / 에헤요 백사장도 못 믿으리로다 /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가노라.

(3절) 노들강변 푸른 물 네가 무슨 망령으로 / 재자가인(才子佳人) 아까운 몸 몇몇이나 데려갔나 / 에헤요 네가 진정 마음을 돌려서 / 이 세상 쌓인 한(恨)이나 두둥 싣고서 가거라

일제강점기 조선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준 <노들강변>

신민요 <노들강변>이 처음 불린 시기는 일제강점기이다. 이 노래는 1934년에 만담가로 인기 절정이었던 신불출(1905~1976)이 작사하고, 바이올린을 잘 다뤘던 문호월(1905년? ~ 1953년?)이 작곡하고, 권번 출신 가수 박부용(1901~?)이 노래하여 오케레코드사에서 취입되어 발표하였다. 이 곡이 발표되자마자 전국적으로 선풍적인 인기가 치솟았다. 아마도 이 노래가 크게 히트한 것은 이 노래의 가사가 일제 치하에서 좌절감에 암울한 시절을 보내던 조선 백성들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노들강변>의 음 구조는 솔·라·도·레·미의 경토리 음계로 이루어져 있고 각 악구의 종지형은 도―솔의 4도 하행으로 끝나다가 마지막 종지에서만 솔-도의 완전4도 종지형으로 끝을 맺는 등 경기민요의 음 조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는 대중가요로 발표되었지만, 경기소리 명창들이 즐겨 부르게 되면서 전통 민요권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 노래는 1930년대 한국 대중가요계에서 당시 신민요라는 신생 장르를 형성시키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최초의 히트곡이라는 점에서 신민요 역사상 아주 중요한 곡으로 평가되고 있다.

<노들강변>의 작사가는 만담가로 명성을 날린 신불출

신불출과 신일선(신일선은 영화 나운규의 에서 여자 주인공역을 맡았다.
신불출과 신일선(신일선은 영화 나운규의 에서 여자 주인공역을 맡았다.

<노들강변>의 작사가 신불출의 본명은 ‘신흥식’으로 1905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1976년에 타계하였다. 신불출은 일제강점기에 풍자와 해학으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얻었고, 광복 후에는 월북하여 활약하였으나 북한의 통제적인 문화정책을 비판하다 숙청되었다고 한다. 신불출이 1947년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한동안 월북 작가 작품이 금지곡 처분을 당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자 없는 경기민요 또는 경기소리로 정체를 숨기고 널리 부르게 되었다. 게다가 경기민요를 하는 소리꾼들이 단골 레퍼토리로 자주 부르다 보니 경기민요 또는 경기소리 이미지가 정착되었다. 

<노들강변>의 작사가인 신불출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인기 있는 만담가였다.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서양인들에게 찰리 채플린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신불출이 있다.’라고 그를 평가할 정도이다. 신불출이 그러한 평가를 받는 데에는 1930년대 암울했던 시대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만담이라는 형식 속에서 사회를 비판하며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을 표출했던 그의 재치 넘치는 입담만큼이나 강렬했던 그의 삶의 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만담가, 연극인이라는 호칭 외에 독립운동가라 소개가 뒤따른다. 북한 선전 자료에 따르면, "(신불출은) 천성적으로 영민하고 말재주가 뛰어나 자기가 보고들은 이야기를 신통하게 재현해 내 사람들을 웃기곤 하였다. 일제가 살판치는 당대 사회에 대한 울분과 항거의 감정을 가지게 된 그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으로 이름을 신불출로 고치고 혼자서 사회를 풍자 조소하는 만담창작공연활동을 벌려나갔다."라고 되어 있다. 

신불출은 일제강점기의 만담가이자 독립운동가

그는 1925년 연극계에 등장한 이래 193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하며, 세태를 풍자하고 정치인들을 비판하는 해학적인 만담과 연극을 공연하여 인기를 끌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사회 비판 만담으로 여러 차례 고초를 겪었으며, 강제로 창씨개명을 하게 되자 "될 대로 되어라."라는 의미의 추임새로 해석될 수 있는 "에하라 노하라"(江原野原)로 발음되도록 일본식 이름을 지어 신청했다가 퇴짜를 당했다는 일화가 있다.

신불출은 조선 말기 명창 재담가 박춘재(1881~1948)의 공연을 보고는 만담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대 일본에 유학하여서 연극을 배웠다. "왜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이므로 우리는 ‘왜’를 없애버려야 한다."라는 만담이 담긴 SP판 음반을 내놓아 ‘왜’가 일본의 ‘왜(倭)를 뜻하는 것이라는 판단을 한 일본 경찰에 불려 가 고초를 겪었다는 일화도 있다. 

  지금의 우리나라 코미디나 개그의 원조는 무엇일까? 가까이에는 만담(漫談)이 있다. 만담이란 재치 있는 말솜씨로 언어유희를 구사하거나 세상을 풍자하는 등 청중을 웃기고 즐겁게 하는 이야기를 뜻한다. 어떤 이는 우리나라 만담이 일본에서 전해져 온 것이라고 비판하지만 그것은 잘 알지 못하고 하는 소리이다. 

장소팔과 고춘자
장소팔과 고춘자

조선조 재담소리에 뿌리를 둔 신불출의 만담 

  우리나라 만담가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이는 1930년대 활발하게 활동한 신불출이다. 신불출은 만담(漫談)이라는 용어를 일본의 만담에서 용어를 빌리기는 했지만, 실제 그가 구사한 만담은 일본의 만담과는 관계없는 한국적인 내용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면 우리나라 만담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었을까? 그것은 조선조 말 "조선 제일류 가객", "조선 명창", "대명창", "구파극의 중심", "우리나라 만담의 시조", "가무별감 중에 일등" 등의 찬사를 받았던 박춘재(1881~1948)의 ‘재담소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박춘재의 ‘재담소리’는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를 재치와 익살, 그리고 해학이 담긴 ‘아니리’로 풀어가면서 소리와 춤, 그리고 연기로 관객과 호흡하는 전통연희 극예술로서 백영춘(작고), 최영숙이 그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줄타기의 재담, 발탈의 재담, 탈춤의 재담, 서도소리의 ‘배뱅이굿’ 등이 광의로는 모두 ‘재담소리’라 할 수 있다. 

  ‘재담소리’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상고시대부터이겠지만, 기록상으로 고려시대 궁중 ‘나례희’의 재담극에서 시작되어 조선조를 거쳐 오늘날까지 면면히 전승되어 온 소중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신불출의 뒤를 이은 장소팔, 고춘자

  조선조 말 판소리가 정형화되기 이전에 ‘재담소리’가 대중적 인기를 얻어 성행했다는 문헌 기록으로 보아, 연행구성이 유사한 판소리가 ‘재담소리’에서 갈라져 발전되었다는 주장은 꽤 설득력 있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박춘재의 ‘재담소리’가 가·무·악((歌·舞·樂)이 융합된 전통적인 소재와 주제를 다루고 있다면 신불출 등의 ‘만담’은 대사 중심의 현대적인 소재와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 신불출 이후 손일평, 김서정, 황재경, 김윤심을 거쳐 1970년대까지 활발한 활동을 했던 장소팔(1922~2002), 고춘자(1922~1995) 등이 그 뒤를 잇다가, 지금은 장소팔의 아들 장광팔(본명 : 장광혁 1952~)과 독고랑 등이 그 뒤를 계승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코미디나 개그의 뿌리는 그 역사가 매우 깊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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