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집 가을풍경'...아늑한 고향집 정경, 60년대 북한의 발전된 시골 마을 풍경 돋보여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정물(25호 1976년)
정물(25호 1976년)

▲정물(25호 1976년)

식탁 위에 고구마와 감자, 김치와 술 그리고 물병이 놓여 있다. 오늘 식탁에 제일의 주인공인 김치와 고구마가 중심 위치에 대각선으로 자리잡고 먼저 시선을 빼앗고 있다. 지인과 가족들이 모여 식탁 위에서 실제의 성찬이 벌어지기 전 풍요한 상차림에 대한 감흥을 사실주의 진수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한바탕 흐드러지게 춤을 추듯이 표현했다.

감자 보다는 짙은 노란 속살이 드러나 있는 고구마가 우선 자신의 식욕에 먼저 초청받은 듯 접시에 더이상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푸짐하게 쌓여 떨어질 것처럼 불안스럽게 담겨있고 껍질은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그리고 프라스틱 물병속의 물을 유리 물컵 속에 가득 따라 놓아 물과 함께 체하지 않게 천천히 시간을 두고 먹으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

포기 김치는 아직 칼로 썰기 전 먹음직스러운 모습 그대로 가지런하게 기다란 접시에 담겨 있다. 술 안주이면서 퍽퍽한 고구마와 감자를 물리지 않게 배부르게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잘 익은 군침 도는 김치는 벌써 초록색 소주병의 술을 한모금 비우게 했다.

고구마와 호형호제 하면서 어울려 있는 감자들은 고구마 옆에서 다음 차례로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 고구마와 감자는 쌀 대신 주식의 역할을 대행해 왔기에 이렇게 푸짐하게 모여 있는 자기들로 얼마든지 배를 채우라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고향집 가을풍경(66-39 1966년)
 고향집 가을풍경(66-39 1966년)

▲고향집 가을풍경(66-39 1966년)

윤형렬은 뜨거운 가슴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열렬히 전개하였지만. 그의 화폭에서는 낭만과 서정이 그득 차고도 흘러넘친다. 그는 가정형편 때문에 일본 유학 대열에 끼지 못하였던 독학파 유화가였지만, 서울여자 사범학교 미술교원을 지낸 그는 비교적 안정된 직업을 유지하며 자신의 화가 인생을 개척하여 성공을 거둔 월북 화가였다. 비슷한 또래의 일본 유학파 출신 화가들과 어울리기를 즐겨하며 눈썰미와 어깨너머로 부지런히 배우고 익힌 독학 실력으로 치면 대단한 노력파였고 실력파였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 그의 이력에 대한 소개를 인용한다. “전후 조선미술가동맹 지도원으로 있으면서 전쟁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복잡한 동맹대렬을 정비 강화하는 사업을 하였다. (중략) 창작 열망으로 불타고 있던 그의 소원이 이루어져 1956년부터 조선 미술기동맹 현역창작가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첫 현지파견미술가로 신포수산사업소에 나가게 되었다. 그의 창작생활에서 이 기간이 가장 중요한 시기였고 이때 창작한 작품들이 여러 전람회들에 출품되었다.”

이런한 연고로 그의 1950년대 화폭에서는 주로 바닷가 풍경들이 많이 그려졌다. 그의 1957년작 <바닷가에서>에서는 아이를 업은 부인과 아들 딸이 바둑이와 함께 아스라히 노을지는 바닷가에서 노를 저어오는 남편(아버지)을 바라보며 따스하고 행복감에 젖은 장면이 감동적인 영상미로 아련하게 펼쳐져 있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은 그의 화풍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그는 자연의 복잡한 정형을 렌즈처럼 기계적으로 복사하는 것을 배격하고 철저히 체험한 감정을 화폭에 옮기는 방향에서 현실의 면모를 그리였다. 그리하여 그의 모든 그림들에는 구체적인 대상의 형태를 정확히 보여주려는데 치우친 것이 아니라 느낌적으로 안겨오도록 대상의 묘사를 생략하였으며 주로 정서적 감정의 힘있는 표현 수단인 색채에 보다 큰 관심을 돌렸다. <바닷가의 아침>에서도 역시 풍부한 바다의 정서를 함축된 언어를 통하여 감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은 아늑한 고향집 정경을 묘사하면서도 60년대 북한의 발전된 시골의 마을 풍경을 은근히 돋보이고 있다. 시멘트로 견고하게 지어지고 페인트를 정갈하게 칠한 현대화된 기와집에서 자전거가 가로놓여 있고, 닭과 병아리들이 앞마당에서 모이를 쪼아먹고 있으며, 당시로서는 부러울 정도의 풍요로운 삶의 모습이 낙천적으로 그려져 있다. 아낙은 마루에 앉아 부지런히 싸리나무를 다듬어 싸리빗자루를 만들고 있고, 아이는 무심히 서 있는 집안의 큰 개에게 놀아달라고 조르고 있는 듯 보인다.

윤형렬 화가 
윤형렬 화가 

◇윤형렬(1922. 4. 7. ~ 1997. 2. 20.)은 누구인가?

윤형렬은 함경북도 출생이고 아버지는 도쿄에서 공부하여 학식 있고 마을에서 영향력 있는 분이었다. 어려서 <아이생활>, <신세계>와 같은 책을 보면서 그림에 대한 접촉을 하였다. 보통학교 시절 미술에 조예가 있던 선생이 특별히 관심을 돌려 그의 그림공부를 지도해 주었다. 그후 석송학으로부터 그림공부를 하였고 17살 되던 해 그림에 뜻을 두고 서울에 가서 신문배달 등으로 연명하면서 현충섭, 서정범 등 미술가들과 사귀었다. 그는 학생미술전람회에 작품을 내어 3등에 입상하기도 하였다. 그후 동일녀학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출품한 그림들 중 <보리가을>, <빨래하는 여인> 등이 일제경찰에 압수되었다.

이 시기 그는 일본에 가 미술공부를 하고 서울에 와서 창작활동을 벌리던 적지 않은 미술가들과 접촉하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것은 미술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지 못하고 창작의 길에 들어선 그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어 주었다. 해방후 서울에서 좌익적인 미술단체의 조직에 참가하였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직업은 서울여자사범학교 미술교원이었다. 1948년에는 서울백화점에서 조명현과 함께 2인 미술전람회를 가졌고 1949년에는 서울대원화랑에서 27점으로 개인미술전람회를 가졌다. 이 두 미술전람회는 좌익적인 미술가동맹의 주최로 진행되었다. 이 당시 좌익적인 활동으로 남한 정부의 수배를 피해 다니던 중 가족들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는 사태를 맞기도 한다.

그는 지칠줄 모르는 왕성한 정열을 가지고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을 비롯한 명승지들과 전국의 많은 공장, 기업소들을 찾아 현실취재, 현실체험을 하면서 자기의 미적 이상을 현실에 접근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의 그림에는 현실의 아름다움들이 화가의 미학적 안목에 의해 정리되어 꾸밈없이 진실하고 소박하게 형상화되었다.

(윤형렬 약력)

● 1922년 함경북도 경성군 대앙리 출생

● 독학으로 1944년 조선미술전람회(서울)에서 입선

● 1945년 좌익적미술가동맹조직에 참가, 중앙집행위원

● 1946년 서울여자사범학교 미술교원

● 1948년 서울백화점에서 조명현과 2인미술전람회 진행

● 1949년 서울대원화랑 개인미술전람회 진행

● 1950년 6.25전쟁 때 인민의용군에 입대하여 월북

● 1951년 조선미술가동맹 미술가

● 1953년부터 조선미술가동맹 지도원

● 1956년이후 조선미술가동맹 현역미술가로 활동

● 1961년 조선미술가동맹 황해남도 현역미술가

● 1986년 문학예술총동맹 제6차대회 대표로 참가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