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물가 여인'...물긷는 여인의 청순하고 단아한 모습 노동의 신성함 강조
'가족 나들이 풍경 감상기'...미적 환상 안겨주며 청량감 만끽
'평양애국기생 계월향'...역사적 사건을 가장 함축적이고 극적으로 묘사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여인과 소(20호 2009년)
여인과 소(20호 2009년)

▲ 여인과 소(20호 2009년)

건강하고 활달한 여인이 어린 소를 끌어안고 미소를 꽃피우고 있다. 뒤에 있는 어미 소보다 더 진한 애정을 표현하며 병마를 이겨낸 송아지를 대견스러워하는 것 같다. 하얀 상의와 두건을 쓰고 있는 품이 수의사처럼 보인다. 여인은 품 속에 어린 송아지의 머리와 목을 다정하게 밀착하며 사랑스러움을 못이기는 몸짓으로 똬리를 틀고 있다. 어린 소도 붙잡혀 있는 모양새가 자연스럽게 이끌리듯 그리 괴롭거나 힘들어 보이지는 않는다.

어미소의 자비롭고 이해심 많은 표정과 송아지의 또랑또랑하고 예쁜 눈망울을 흡수한 여인의 밝고 활달한 표정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과 소박한 신념이 엿보인다. 이 그림을 보면 리쾌대의 1961년 국가미술전람회 2등 수상작품인 송아지 그림에서 송아지에게 우유를 먹이는 소녀의 부지런함과 고운 심성이 평화로운 목장 속에 용해되어 있는 장면이 연상되기도 한다.

결국 사회주의는 자가 실현 방법에서 모순과 한계를 드러내며 몰락했지만, 사회주의가 부르짖은 ‘더불어 잘살자’는 공존공영의 이념적 지향과 나눔의 가치는 현재 자본주의 국가에서 복지사회라는 다른 이름으로 변용되고 차용되어 여전히 그것의 구현이 광범위하게 진행 중이다.

샘물가 여인(20호 2009년)
샘물가 여인(20호 2009년)

▲ 샘물가 여인(20호 2009년)

옛 여인들은 부엌에서 밥을 짓고 음식을 조리하는데 주로 물을 다루어야 해서, 가까운 우물가나 샘터에서 손수 물을 긷는 노동은 부녀자의 몫이었다. 남자들도 물지게를 짊어지고 양쪽에 나무 물통으로 물을 실어오곤 했는데, 그림에서처럼 더 무겁고 부피가 큰 땔감을 해오는 역할을 담당하므로써 가사 노동을 분담했다.

주인공인 물을 긷는 여인의 모습이 청순하고 단아하면서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하려는 듯 가뿐한 일상처럼 즐거워 보인다. 위의 샘물가 여인은 수채화의 세계적인 대가 박진수가 유화로 그린 독특한 작품이다. 새색시처럼 머리에 꽃을 단 여인은 물항아리를 내려놓고 왼손엔 머리 받침대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공용 박으로 물을 퍼서 항아리에 물을 담으려는 찰나이다.

맑은 홍조를 띤 얼굴색은 치마의 분홍빛에 물들은 모습이고, 살포시 들어간 보조개는 상반신의 주름잡힌 하얀 저고리와 잘 어울리는 얼굴의 세심한 포인트이다. 길게 땋아서 늘어뜨린 머리 끝의 주홍빛 댕기에는 ‘복’자가 그려져 있어 신혼인 신부의 치장과 차림새를 강조하고 있다.

가족 나들이 풍경 감상기(15호 2005년)
가족 나들이 풍경 감상기(15호 2005년)

▲ 가족 나들이 풍경 감상기(15호 2005년)

이 풍경화는 멋진 풍경을 일컬어 ‘한 폭의 수채화 같다.’고 탄성을 자아내는 경치를 빼어 닮은 바로 그 광경이다. 또한 그림 속 주인공들 모습에서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넓은 호숫가 유원지를 나들이했던 장면이 연상된다. 어린 딸은 호숫가에 핀 분홍꽃들이 너무나 예뻤던지 그 꽃들에게 가능한 바짝 다가가 말을 걸며 손을 내밀고 있다.

어머니는 행여나 딸이 호숫가에서 다리를 헛딛지나 않을까 우려하여 딸에게 바짝 붙어 그 꽃들을 같이 응시하며 설명에 열중인 듯하다. 아버지는 호수를 돌아 다음 행선지로 향해 가려는 채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돌아볼 풍경들이 많이 남아 있는 듯 한 손으로는 눈부신 햇살을 가리고 저 건너 경치들을 지긋이 둘러보고 있다. 고요했던 진녹색의 호수가에는 물결의 파장이 빛의 파장과 더불어 번져나가고 있고 연잎들은 일렁이는 파장에 덩달아 춤을 추며 사람들을 반겨 맞이하고 있다.

고운 추억을 꽃피우고 맑은 환상이 감도는 모네의 풍경화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몽환 속으로 빨려들고 메아리처럼 퍼져가는 분위기와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온화한 정서가 시적 운율처럼 흐르고 꽃향기가 화면 전면에 그득하여 미적 환상을 안겨주며 청량감을 만끽하게 한다. 수채화로 인상주의를 구현하는 작가의 작품에는 신(神)의 입김처럼 빛이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다.

아련한 미적 여운을 풍기는 맛은 수채화가 유화 보다 약해 보이지만, 맑고 투명하게 빛나는 영롱한 느낌은 수채화가 더 강세를 띤다. 작가의 관록과 실력의 숨결과 울림이 광자(光子) 진동되어 파동치며 전해져 오고 있는 듯하다. 현대미술의 유형으로 확고히 뿌리내린 속칭 개념미술 등의 메마른 비정서적 표현이나 무성의한 설치물 혹은 인쇄물이나 다름없는 공장에서 찍어낸 도식화된 합성 도안 미술 등이 더불어 같은 미술이라는 범주 속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온당할까?

사뭇 진지하게 오랜 시간의 땀이 녹아 있고 영혼과 정성으로 빚어낸 회화미술의 공간과 무대는 이 현대의 별종 미술과는 구분되어야 진짜 미술가들의 실력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고 상업화된 미술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방도가 아닐까 한다. 이제 그런 ‘그들만의 리그’ 속의 얼치기 미술과 복제품이나 다름없는 디자인 도안들은 별도로 따로 놀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평양애국기생 계월향(107-57 2005년)
평양애국기생 계월향(107-57 2005년)

▲ 평양애국기생 계월향(107-57 2005년)

이 그림은 계월향의 역사적 사건을 가장 함축적이고 극적으로 묘사한 인민미술가 박진수의 명작이다. ‘대동강의 달’, 혹은 ‘평양의 딸’로 칭송되어온 계월향은 자신의 은장도로 주연 자리에서 술취한 일본군 장군 고니시의 부장(당시 평양성 책임 부사령관)을 죽이려고 달려들다 실패한다. 그 부장이 계월향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녀를 해치려 하자 계월향을 애첩으로 맞았던 김응서 장군은 이미 그녀와 내통하고 숨어 들어와 있다가 기회를 엿보며 나타나 고니시 부장의 숨통을 끊어버린다.

고니시 부장을 살해함과 동시에 평양성에 야음을 틈타 잠입해 있던 조선군들은 일본군의 화약창고에 불을 지르며 일본군 진영을 일대 혼란에 빠뜨리고 아수라장을 만든다. 그 이후 일본군이 추격해오는데 대해 계월향은 김응서 장군과 함께 빠져나갈 수 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은장도로 자결하며 김응서 장군에게 반드시 장군의 목숨을 구하여 성을 넘어가서 평양성을 기필코 탈환하도록 간절히 호소하며 장렬한 최후를 마친다.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의 일본군부를 보좌하며 통역과 길잡이를 담당했던 일본 승려가 계월향 때문에 평양성에서 패퇴하며 다음과 같이 남긴 경구가 있다. ‘기생마저도 목숨바쳐 애국열사가 되는 조선땅을 다시는 범하지 말라.’ 이 말은 당태종이 고구려에서 구사일생 탈출해 도망간 후에 자손들에게 남긴 유훈과 비슷하다. ‘내 이후로는 다시는 어떤 당나라 황제도 고구려 땅을 침범하지 말라.’

만해 한용운 선생이 계월향에게 헌정하는 ‘님의 침묵(계월향에게)’이라는 시 한수를 소개한다.

< 계월향(桂月香)이여 그대는 아리땁고 무서운 최후의 미소를 거두지 아니한 채로 대지의 침실에 잠들었습니다.

나는 그대의 다정(多情)을 슬퍼하고 그대의 무정(無情)을 사랑합니다.

대동강에 낚시질하는 사람은 그대의 노래를 듣고 모란봉에 밤놀이하는 사람은 그대의 얼굴을 봅니다.

아해들은 그대의 산 이름을 외우고 시인은 그대의 죽은 그림자를 노래합니다.

사람은 반드시 다하지 못한 한(恨)을 끼치고 가게 되는 것이다.

그대의 남은 한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 한은 무엇인가?

그대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대의 붉은 한은 현란한 저녁놀이 되어서 하늘길을 가로막고 황량한 떨어지는 날은 돌이키고저 합니다.

그대의 푸른 근심은 드리고 드린 버들실이 되어서 꽃다은 무리를 뒤에 두고 운명의 길을 떠나는 저문 봄을 잡아매려 합니다.

나는 황금의 소반에 아침볕을 바치고 매화가지에 새봄을 걸어서 그대의 잠자는 곁에 가만히 놓아 드리겠습니다.

자 그러면 속하면 하룻밤 더디면 한겨울 사랑하는 계월향이여! >

박진수 화가
박진수 화가

◇ 박진수(1934. 7. 1. ~ 작고)는 누구인가?

박진수는 화가로서의 자존심이 굉장히 강한 화가였고 자국 미술에 대한 민족적 자부심이 충천한 화가였다. 그는 북한이 매우 어렵던 시절에도 외국의 화상들이 북한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 가격을 싸게 흥정해오면 또다른 흥정으로서의 맞대응이 아니라 어떻게 그런 가격에 북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그림을 팔 수 있느냐며 작품 팔기를 거부하였다고 전한다. 물론 이는 대부분의 기백 있는 북한의 화가들이 견지하는 태도이기도 하지만, 이 대목에서 그의 기세는 유난하다.

박진수는 수채화 분야에서 가장 특색 있는 화가로 알려져 있다. 수채화는 조선화 보다 더 맑고 투명하며 더 밝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점에서 또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박진수는 수채화 분야에서 더욱 특기를 가지고 있었고 기술적으로 훌륭했다. 소묘력이 있고 잔재간이 있는 그였고 또한 조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에 유화가들처럼, 장편소설을 지긋하게 쓰는 작가처럼 진중하게 앉아 파고들어 그리는 것을 싫어했다. 그의 수채화들에서 보게 되는 형상의 미묘한 세계는 다른 미술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무시할 수 없는 재간이 이룩된 것이다. 그는 현대 수채화 분야의 권위있는 화가라고 할 수 있다.”

(약력)

●1934년 7월 1일 함경북도 화성군 화성읍에서 출생

●1950년 청진송평인민학교, 제5중학교 졸업

●1954년 까지 김책제철소 로동

●1954년~59년 평양미술대학졸업(정현웅, 지달승, 윤자선 지도수업)

●1960년~94년 평양미술대학 교원. 강좌장. 학부장

●1960년~64년 대학 박사원 졸업

●1980년 공훈예술가 칭호

●1984년 예술학부교수

●1987년 예술학학사학위

●1991년 인민예술가 칭호

●1985년~1994년 조선미술가동맹중앙위원회 출판분과위원

●1990년~1993년 조선미술가동맹중앙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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