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불교 유산의 보물단지

고려 시대 사찰은 문화예술, 정치, 학문, 사회적 network의 중심지였다

【뉴스퀘스트=김승국 전통문화칼럼니스트 】 고려조를 개국한 태조 왕건은 분열된 민심을 하나로 묶고 기존의 다양한 세력 집단을 공동의 문화로 결속시키는 방안으로서 불교를 이용하였다. 불교의 기본 정신인 귀족이든 평민이든 부처님 밑에 다 같은 중생이라는 의식이 일반화되어 공동체 결속이 쉬웠다. 또한, 지역적 특성과 전통문화를 인정하는 다원 문화가 꽃피었던 자유스러웠던 사회였다. 

고려조에는 남녀 평등사상이 잘돼 있어서 양가의 합의가 있으면 남자든 여자든 이혼과 재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녀균분상속제가 실시되었으며, 천민 집단을 제외하고는 귀족뿐만 아니라 평민들에게도 성(姓)을 주었고, 본관 제도도 고려조에서 시작되었다. 어찌 보면 고려 시대는 지금의 시대보다 더 민주화되고 선진화된 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고려는 건국 후에 수도를 개경(개성)으로 정하고 개경에 궁궐과 사찰을 건립하였으며 사찰을 교통의 요지인 도심의 중앙에 두었다. 지금은 사찰 대부분이 경관이 수려한 산중에 자리 잡고 있지만 고려 시대에는 사찰이 도심의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종교의 중심지이자 문화예술의 중심지의 역할을 하였다. 또한, 관혼상제 등 통과의례 및 의식 공간의 역할과 병원, 휴식 공간, 여관으로서의 복지 및 편의시설을 제공하는 역할까지 하였다. 그리고 사찰을 중심으로 시장이 조성되었으며 사찰이 전국적인 문화예술, 정치, 학문, 사회적 network의 중심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계종 연등회
조계종 연등회

연등회와 팔관회는 문화로 공동체 의식을 더욱 공고하게 하는 역할을 해 

또한, 신라에서 시작되어 고려 시대에 국가적 행사로 자리 잡은 불교 행사인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之法, 八關筳會)는 국민적인 축제로서 고려 국민으로서 공동체 의식을 더욱 공고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팔관회는 고려왕을 중심으로 국가관, 세계관을 형성시킨 국민적 축제로서 불교의 우주관, 세계관 속에 토속신앙을 수용하여 접속시켰으며 왕이 행진 음악과 함께 군인 3,276명을 수행하게 하여 사찰(법왕사)로 행차하였으며 국민은 행차를 구경하면서 고려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국민적 결속력을 강화하였다. 

연등회는 농사가 시작되는 음력 2.13 ~ 2.15(양 3월 초)에 보문사에서 행하였으며 외국인 사절단이 올 정도로 규모가 큰 국가 불교 문화행사였다. 장대 위에 연등(燃燈)을 달고 풍년 기원제를 열었고 임시 시장이 섰으며 다양한 연희(演戲) 오락과 함께 기악(伎樂), 교방악(敎坊樂)이 연주되었다. 연등회는 조선의 개국과 함께 폐지되면서 수륙재(水陸齋)로 바뀌게 되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 역시 개국 과정에서 희생된 고려 왕실 일가와 충신들의 원혼을 달래주고 분열된 민심을 하나로 묶고 기존의 다양한 세력 집단을 공동의 문화로 결속시키는 방안으로서 수륙에 떠도는 고혼을 천도 공양하고 국가 안일을 위한 재의식인 수륙재(水陸齋)를 국가적 행사로 활용하였다.

또한,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부처님께 올리는 천도재 성격인 영산재(靈山齋) 또한 대단하였다. 영산재는 제단이 만들어지는 곳을 상징화하기 위해 야외에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를 내다 거는 것으로 시작한다. 부처님을 절 밖에서 모셔 오는 행렬 의식을 하는데, 이때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해금, 북, 장구, 거문고 등의 각종 악기가 연주되고, 바라춤·나비춤·법고춤 등을 춘다. 이러한 불교 문화예술의 예능은 오늘날까지 면면히 전승 발전되어 오고 있다.

봉원사  영산재 바라무
봉원사  영산재 바라무

불교의 삼회향놀이, 민중들의 억눌렸던 마음을 풀어줘

영산재를 올린 뒤에 지금은 전승이 단절되었지만, 그 공덕을 일반 대중에게 회향(廻向)하는 뒤풀이의 성격을 지닌 삼회향놀이(三廻向놀이) 또한 대단했었다. 이러한 삼회향놀이는 일명 ‘난장’이라고도 하였는데 그 주체는 민중들이었다. 삼회향놀이는 민중들의 다양한 연희(演戲)를 통하여 민중들의 마음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장(場)으로서 민중들의 억눌렸던 마음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삼회향놀이의 현대적 복원은 필요하다. 

고려불교의 강점은 수행불교(修行佛敎)를 강조한 계속된 자정운동(自淨運動)이었다. ‘誡初心學人文(계초심학인문)’ 저자 보국국사 지눌(知訥)은 계속된 정수(淨修)를 주장하였고 “부처도 계속 수행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고려 시대의 건강한 수행 불교가 고려 말에 변질하게 된 것은 불법을 구현, 중생을 제도해야 할 종단이 불교의 순수성이 훼손된 점이다. 

불교가 정치와 유착하고, 종파 간의 갈등이 심화하고, 귀족 불교화되며 형식화로 빠진 점이다. 종교가 종교 본연의 자세를 잃고 세속적으로 변질하면 그 힘을 잃게 된다는 역사가 주는 준엄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교훈은 지금의 불교계에도 해당하는 교훈으로서 불교계가 준엄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역사란 단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미래로 가야 할 방향을 배울 수 있는 교훈을 제공한다. 고려조 불교의 모습과 정신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많다. 오늘날 전국에 산재한 사찰들이 수행불교(修行佛敎)를 강조하고 지속적인 자정운동(自淨運動)을 펼치는 신앙과 의례의 중심지로서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복원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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