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스토리] 최성미 기자 = 7년간의 전쟁 임진왜란. 처참한 살육전에 수많은 백성이 희생당한다. 그런데,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이 사라진 10만 명의 사람들이 있다. 왜군에 붙잡혀 적국으로 끌려간 백성들. 조선은 그들을 ‘피로인’ 이라 불렀다.

■ 사라진 조선의 백성들 - 왜군의 민간인 납치사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7년간 이어진 전쟁, 민간인 포로가 늘자 조정은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뜻의 ‘피로인’이라는 정식 명칭을 붙인다. 당시 피로인의 수는 최소 10만 명에서 많게는 40만 명까지 추정된다.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그만큼 많은 백성들이 기록조차 남기지 못한 채 비참한 인생을 살았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왜군의 치밀한 계획이었다는 것. 바로 왜군 부대에 ‘포로부’가 존재한다는 사실. 왜군은 도대체 왜, ‘조선인’을 일본으로 끌고 간 것일까.

■ ‘돈벌이’로 전락한 피로인 = 16세기 노예무역
 
16세기 해외 무역에 눈을 뜬 일본. 당시 전 세계로 퍼진 노예무역에 일본도 동참한다. 그러나, 1587년 내려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자국민 매매 금지령. 결국 일본은 ‘조선인’으로 공급을 대체하며 무역을 이어나간다.

조총 가격의 1/40도 안 되는 헐값에 팔려나간 조선인들. 조선 노예가 무역 시장에서 인기를 얻게 되자, 상인들이 마구잡이로 조선인을 잡아들인다. 조선의 백성들은 국제 정세에 휘말려 노예의 삶을 살게 된 것. 노예 매매가 성행하던 16세기 대항해 시대, 슬픈 역사의 현장을 ‘만물각’으로 만나본다.

“상인들은 조선인을 포획하려고 직접 조선으로 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프란체스코 카를레티 = 나의 세계 일주기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게 붙잡힌 양반출신의 선비 강항. 압송 중 눈앞에서 어린 자식들과 가족들을 잃는다. 가족들의 죽음과 수많은 조선 피로인의 참혹한 현실에 절망한 강항. 그런 그가 왜, 굴욕적인 피로인 생활을 이어갔을까. 선비 강항의 붓끝에서 생생하게 펼쳐진 피로인의 참담한 삶. 강항의 기록을 통해 진짜 일본을 들여다본다.

■ 조선과 일본, 어디에서도 행복할 수 없는 피로인의 삶

1607년, 조선은 공식적인 첫 회답 겸 쇄환사 파견 이후 1614년, 1624년에 걸쳐 모두 세 차례 걸쳐 쇄환사를 파견한다.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밟게 된 것이다. 그런데, 30여 년간 돌아온 피로인은 고작 6000여 명에 불과했다. 당시 조선에 만연한 피로인에 대한 차별과 냉대로 귀국을 포기한 피로인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피로인이라는 이유로 갖은 멸시와 핍박을 받았던 사람들. 이들은 조선에서 어떤 일을 겪었던 것일까.

“다리 위에서 열 사람을 만나면 그중 열에 아홉은 다 조선 사람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늦은 밤까지 노래를 부르고, 때로는 한숨지어 울부짖기도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 정희득, 월봉 해상록 中

최초의 일본 백자 제작자, 피로인 도공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아버지’ 이삼평은 죽음 후 ‘신’으로 모셔진다. 죽은 사람을 신으로 모시는 일본의 인신(人神)사상. 일부 피로인들은 평생을 그리워하던 고향을 뒤로하고, 영혼마저 일본에 봉인된다.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망향의 한, 조선과 일본, 어디에서도 행복할 수 없던 피로인의 기구한 운명을 이야기 한다.

역사 속 단 몇 줄이 전부인 10만의 조선 백성들, 피로인.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 역사에 가려진 ‘피로인’의 삶에 대해 조명해 본다. 방송은 14일 밤 10시 30분, 1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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