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국제도시 신라 경주를 품은 산

용장골 계곡. [사진=김재준 시인]
용장골 계곡. [사진=김재준 시인]

[뉴스퀘스트=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아침 해가 제일 먼저 비추는 서라벌, 눈부신 서광이 아름답지만 산과 물도 벌판도 평화로운 터전이었다. 전성기 때 서라벌은 집이 18만여 채, 초가가 없고 기와 처마가 닿아 있었다 한다. 인구 100만 명가량, 숯으로 밥을 지어 도심에 그을음이 없었다니 가히 신라(新羅)가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의 국제도시다웠을 것이다. 8세기경 콘스탄티노플, 장안, 바그다드와 겨루었다면 과장일까? 지금은 30만 명 채 안되니 천년제국의 흥망을 새기며 걷는다. 

국가의 수도(首都)는 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선 서울이라 하고 사로, 서라벌, 쇠벌, 셔블, 쇠울, 서울로 바뀌었다. 신성하고 거룩한 터라는 것.

서라벌은 맑은 물이 흐르는 푸른 벌판이었다. 처녀가 빨래를 하는데 남신과 고운 얼굴의 여신이 찾아왔다. 이들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우리가 살 곳은 바로 여기다”라고 외쳤다. 놀란 처녀가 신들이 워낙 커서 “산 봐라” 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비명에 놀란 두 신이 그만 산이 되었다. 여신은 남산 서쪽의 아담한 망산, 남신은 이곳 남산이 되었다 한다. 박혁거세가 남산 아래 나정에서 났고 화랑들이 호연지기를 키우던 곳이며, 산성을 쌓아 외침을 막은 요새였으며 포석정에서 망국의 비운을 맞은 땅이다. 남산은 신라의 시작과 끝이며, 신라 성지로 호국정토라 할 수 있다.

일행은 아침 8시 30분 경주시 내남면 용장골 입구에서 소금강 형세를 닮은 계곡을 향해 오르는데 마을 끝나는 지점에 이르자 길을 묻는다.

“금오산 어느 쪽으로 가야 되죠?”

“곧바로 가시면…….”

“우리도 금오산 갑니다.”

20분 남짓 오르자 계곡에 앉아 신선놀음하기 좋은 곳이다. 골이 깊어 반석에 물이 흘러 넘쳐흐른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설악산의 축소판처럼 돌과 바위, 물, 소나무들이 잘 어울려 운치가 있다. 일행은 모두 천 년 전 신라인, 30분쯤 올라가니 설잠교다. 소나무, 참나무, 대나무, 철쭉이 물빛에 해맑다.

“남산은 산이며 계곡마다 석탑, 불상, 절터 등이 널려져 있어서 산 전체가 노천광산입니다” 

“…….”

노천박물관이라고 한다는 것이 잘못 발음해 노천광산이 됐다. 

용장사지 삼층석탑, 왼쪽 고위산, 오른쪽 경부고속도로. [사진=김재준 시인]
용장사지 삼층석탑, 왼쪽 고위산, 오른쪽 경부고속도로. [사진=김재준 시인]

용장골과 금오산

설잠(雪岑)은 김시습의 법명(주1)이다. 5세 신동이라 세종이 크게 쓰겠노라 하였다. 생육신(주2)으로 본관은 강릉. 호는 매월당(梅月堂). 21세 때 왕의 자리를 뺏은 수양대군을 저주, 책을 불사른 뒤 머리를 깎고 경향각지(주3)를 유랑하였다. 간신들의 세상을 한탄하여 31세 때 이곳 금오산 용장사(茸長寺)에 머물렀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주4)를 남겼다. 서울 수락산 등지에서 살았으나 아내를 맞아들여 환속(주5)하였고 떠돌아다니다 부여 암자에서 59세로 병사하고 만다. 매월당의 편력(주6)이다. 

대나무길 올라 9시 50분경 용장사 터에는 망초 꽃이 무성하고 무덤이 주인이다. 시누대, 신우대, 신호대라 하는데, 이순신장군이 화살로 만든 대를 왜군이 오면 첫 시위를 놓아 신호로 썼다. 건너편 쳐다보니 고위산이 눈앞이다. 10시 삼륜대좌불, 연화대좌 미륵불이 있는 도솔천이다. 머리가 없는 것은 조선시대 파불(破佛)의 흔적인가, 일제강점기 상흔인가? 10분 더 올라가니 신라의 명당자리는 용장사지 삼층석탑이다. 

탑(塔)은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것으로 고대 인도 산스크리트어(San-skrit, 梵語) 스투파(stupa), 탑파(thupa)를 한자로 표기하며 굳어졌다. 북한에도 탑이 많이 있으나 현재 익산 미륵사 9층 석탑을 기원으로, 부여 정림(定林)사지 5층 석탑, 의성 탑리 5층 석탑, 감은사지 3층 석탑, 불국사 석가탑이 완결판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중국에는 벽돌로 만든 전탑, 일본은 목탑이 유행했다.

멀리 흘러가는 뭉게구름, 들판 너머 도로마다 차들이 달리고 모든 것들도 빠르게 지나간다. 올라가는 길에 소나무 새순은 거의 60센티 이상 자랐다. 나무마다 솔방울 다닥다닥 달았다. 제 몸도 못 가누는데 무겁게 달고 있으니, 무자식이 상팔자라 했던가? 나무는 환경이 나빠지거나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번식을 많이 해서 조금이라도 많은 개체를 남기려는 습성이 있다. 남산 종단도로 갈림길에서 10여 분 더 올라가 11시경 금오산(金鰲山 468미터) 정상은 안개 가득하고 여덟 명은 습관처럼 사진을 찍는다. 

“경주 고속도로입구에서 바라보면 산 모양이 자라(鰲)나 거북을 닮았기 때문에 금오산이라 부릅니다.” 

하필이면 거북일까? 거북은 단단한 껍데기와 영양분을 오래 지니고 있어 장수, 불사의 상징이다. 하늘처럼 등이 둥글고 땅처럼 평평한 배를 보고 우주의 축소판으로, 등에 그림이 새겨져 있어서 신령스럽게 여겨왔다. 이른바 하도낙서(河圖洛書)인데 도서관의 어원이다. 하도는 복희(주7)가 황하에서, 낙서는 하우(주8)가 낙수의 거북등에서 얻은 그림으로 역학의 기본이 된다. 

아침부터 일행이 된 안양에서 온 사람과 계곡 근처에서 우리는 도시락을 나눠먹었다. 박씨왕인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의 삼릉에 12시 40분경 도착했다. 국도를 걸어 경주교도소 지나고 아침에 차를 댄 용장골 입구까지 간다. 아스팔트 위로 뱀이 차에 치어 꿈틀거리는 뜨거운 오후, 20분 걸려 원점으로 되돌아 왔다. 

며칠 후 같이 간 일행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우리가 걷던 구간이 방송에 나왔다고 한다. 앞으로는 남산 못 가겠네. 텔레비전에 나왔으니 내일부터 인산인해를 이룰 것이다. 나는 그날 이후 오래도록 가지 않았다.

절골 감실부처, 칠불암길

남산불곡석불좌상, 감실부처. [사진=김재준 시인]
남산불곡석불좌상, 감실부처. [사진=김재준 시인]

길옆에 대여섯 대 주차할 수 있는 절골 입구에 8시 45분 도착했다. 남산 동쪽 기슭은 고즈넉해서 좋다. 흙길을 십여 분 걷노라면 휘어진 화살대나무(箭竹) 숲을 지나고 마음씨 좋은 할머니 부처를 만나게 된다. 바위를 파낸 감실불(龕室佛)로 천 년 넘게 돌 속에서 만고풍상(萬古風霜) 겪은 남산불곡석불좌상이다. 할매부처, 절골(佛谷)이라 부른다. 7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남산에서 가장 나이 많은 석불로 알려졌다. 여러 차례 올수록 애틋한 정이 들어선지 발걸음 떼기 어렵다. 

배낭을 메고 솔숲을 한참 오르니 군데군데 무덤, 영산이라 투장(偸葬)(주9)도 얼마나 많았을까? 안개 낀 솔숲은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10시경 포석정 갈림길. 여기까지 잔솔이 어우러져 좋지만 지금부터는 얼마나 넓혀놨는지 좋은 길이 아니다. 비틀어지고 휘어져 물빛을 머금은 작은 소나무마다 한 폭의 그림이다. 우리나라 소나무는 함경도지방의 우산 꼴인 동북형, 평안도에서 전라도까지 가지 많은 중남부형, 강원·경상북부의 전봇대처럼 곧게 자라는 금강형, 그리고 이곳을 포함한 경상내륙의 뒤틀린 안강형 소나무 등으로 구분한다. 

금오정 갈림길 지나 11시에 금오산에 닿는다. 30분쯤 큰길을 내려서면 삼화령, 곧 이영재를 만난다. 정오 무렵 자리를 살피는데 밀감 껍데기 버려져 있다고 한다. 

“껍질과 껍지일의 차이는 뭡니까?”

“…….”

“껍질은 짧게 깎은 것 껍지일은 사과처럼 길게 깎은 것.”

“껍질과 껍데기는?”

“껍질은 연한 것, 껍데기는 딱딱한 것.”

“밀감 껍데기라 하면 안 됩니다.”

“…….”

“산을 영어로 하면 뭐죠?”

“마운틴.”

“그럼 메아리는?”

“…….”

“마운틴~틴~틴.” 

해목령 근처, 뒤틀린 소나무. [사진=김재준 시인]
해목령 근처, 뒤틀린 소나무. [사진=김재준 시인]

나보다 남산을 더 좋아하는 김 선생과 오늘도 비겼다. 

12시 50분 칠불암 350미터 지점, 고위봉은 1킬로미터 거리다, 발을 헛디디면 깎아내린 절벽 아래 떨어질 것 같은 바위에 불상을 새겼는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이다. 옆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사진을 찍어준다. “저 멀리 불상이 바라보는 곳을 쳐다봐요. 천하절경입니다.” 2시 방향으로 토함산이 시원하다. 아무리 폼 잡고 온갖 자태로 셔터를 눌러봐야 저마다 부처의 손바닥인 것을…….

오후 1시경 칠불암. 절집에는 무수한 신발들이 뒤엉켜 제각각이다. 어디서 온 신발이기에 이토록 많이 주인들을 기다리고 있나. 일곱의 불상 중에 가운데는 어딘지 부자연스럽고 어색해 예술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사방으로 평정한 나라를 부처의 힘으로 다스리기 위해 동쪽에는 약사불, 서쪽은 아미타불, 남방에 석가불, 북방은 미륵불을 새겼다. 석가모니는 이렇게 가르치진 않았을 텐데 꿈보다 해몽을 중요하게 여긴 것 같다. 왕이 곧 부처요(王卽佛), 보살은 귀족, 평민은 중생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았으니, 도의선사(주10)가 선종(禪宗)(주11)을 전하지 않았으면 심즉불(心卽佛)은 저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떨어졌을 것이다. 

오후 2시경 동남산 마을 입구까지 내려왔다. 추어탕 집에 앉아 물 한 잔 들이킨다. 걸음이 빠른 이들은 통일전, 탑골, 절골까지 1시간 거리. 다시 절골을 걸어 차를 몰고 식당으로 되돌아오는 데 3분이면 넉넉하다. 

틈수골 천룡사 터

산 아래 천룡사 터. [사진=김재준 시인]
산 아래 천룡사 터. [사진=김재준 시인]

10시 못 되어 삼릉에 도착했다. 10분마다 시내버스가 오는데 운이 좋았던지 바로 탈 수 있었다. 틈수골까지 버스요금은 한 사람 1,500원, 경주교도소, 용장골 입구를 지나 용장3리 정류장이 틈수골 입구다. 삼릉에서 10분 걸렸다. 

고위산 이정표는 정상까지 2.4킬로미터를 가리킨다. 10분 거리 와룡동천에서 말쑥하게 차려입은 중년 여성을 만난다. 울산에서 오는 길이라며 천룡사를 물으며 고위산에 결혼식 간다는 것이다. 

하도 의아스러워

“산꼭대기에서 결혼식을 해요…….” 

“우리도 같은 방향입니다.”

“…….”

천룡사 터. [사진=김재준 시인]
천룡사 터. [사진=김재준 시인]

함께 길동무 되어 산길을 올랐다. 10시 40분경 천룡사 터에는 식당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찰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밭이고 주춧돌, 깨진 기왓장들이 널브러졌다. 복원한 석탑의 티끌만 눈에 들어온다. 울산 댁과 헤어지고 작은 절집 마당에 혼례를 올리려는 듯 삼삼오오 모여 있다. 요즘 보여주기 쇼 같은 결혼문화에 비하면 산중의 혼례는 얼마나 신선한가? 하객이라야 스무 명 안 되지만 나도 진심으로 축하했다. 오늘 좋은 날, 복숭아나무도 빨간 입을 열어놓는다.

다시 갈림길에서 이정표(틈수골 입구1.5·새갓골 주차장2.3·천룡사지0.1킬로미터)를 본다. 길옆의 당귀 몇 잎 보며 10분 오르니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듯한 천룡사 절이다. 바로 위쪽 백운암 갈림길에는 차들이 와서 떠들고 있다. 아마 결혼식 하객일 것이다. 4월 중순이면 다 떨어졌을 벚꽃이 산속이라 그런지 암자에 만발하다. 11시쯤 바람에 실려 오는 향기를 뒤로하고 고위산을 향해 올라간다. 바위에 앉아 바라보기 좋은 세상은 봄빛에 초록 아닌 것이 없다. 

해발 494미터 고위산 11시 30분이다. 헷갈리기 쉬운 정상에서 우리는 칠불암 쪽으로 발길을 돌려 백운재로 내려간다. 12시경 칠불암 갈림길, 바윗돌 위에서 30분 동안 점심 먹고 금오산을 향한다. 통일전 갈림길까지 50분, 금오산 정상은 탐방객들이 많아 놀이터를 방불케 한다. 사람들에 치여 오래있지 못하고 금송정 지나 고속도로 보이는 바위 꼭대기에서 잠시 휴식이다. 백제 서산마애불과 견주는 신라의 미소를 보러간 것은 오후 2시 반, 이곳 배동 삼존불에는 가리개를 쳐 놓았다. 부잣집 제삿날 초라하다고 문 앞에서 업신여기자 스님은 사자를 타고 가버렸다. 욕심쟁이 주인이 밤새 엎드려 빌었대서 사람들은 절 잘 하는 동네, 배동(拜洞)이라 비꼬아 불렀다. 

(주)

1) 승려가 속명(승려 전의 이름)과 별개로 받는 이름(法名). 승명(僧名)·불명(佛名).

2) 김시습(金時習)·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 등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탈취하자 살아서 절의를 지킨 사람(生六臣). 반대로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를 사육신(死六臣)으로 불림.

3) 서울과 시골을 아우르는 말(京鄕各地)

4)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등 5편. 일본에서 간행 1927년 최남선에 의해 소개(金鰲新話).

5) 출가했던 승려가 속세(집)로 다시 돌아감(還俗).

6) 이곳저곳 돌아다니거나 여러 경험을 함(遍歷).

7) 전설상의 중국 제왕 또는 신(伏羲).

8) 중국 하(夏)나라 우(禹)임금(夏禹).

9) 몰래 무덤을 쓰는 것.

10) 도의(道義), 신라 승려. 속성은 왕(王), 법명은 원적(元寂). 선덕왕 때 당나라에 가서 불법을 물려받고 도의로 개명, 귀국하여 선종을 전하였다.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개조.

11) 참선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 불교의 종파(頓悟). 교종(敎宗)은 교리와 경전을 중시하는 종파(漸修).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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