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효곡리 효곡재사 배롱나무

대한민국에는 약 1만5000그루의 보호수가 있습니다.

마을에 오래 살아 마을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한 나무입니다. 느티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등 여러 수종의 나무입니다. 이 나무에는 각자 스토리가 있습니다.

나무와 관련된 역사와 인물, 전설과 문화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문화콘텐츠입니다.

나무라는 자연유산을 문화유산으로 승화시킨 예입니다.

뉴스퀘스트는 경상북도와 협의하여 경상북도의 보호수 중 대표적인 300그루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연재합니다. 5월 3일부터 매주 5회 연재를 시작합니다.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상주시 효곡리 효곡재사 배롱나무는 옛 선비의 아름다운 삶을 떠올리게 하는 크고 아름다운 나무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상주시 효곡리 효곡재사 배롱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된 2014년 기록에 나무의 나이가 341년으로 되어있다.

이는 효곡재사 건립 연대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대략 300년에서 350년 정도의 나이로 짐작된다.

이 배롱나무는 2020년 가슴높이 둘레가 1.5m 정도이고, 높이는 6m 정도다.

소나무나 느티나무, 은행나무처럼 오래 살고 크게 자라는 나무들에 비하면 크다고 할 수 없는 규모지만, 배롱나무로는 매우 큰 나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롱나무는 부산 양정동 화지공원에 있는 배롱나무로, 수령이 800년 정도 되고 높이가 8m 정도 된다.

수령이 훨씬 적은 효곡재사 배롱나무와 큰 차이가 없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배롱나무는 일반적으로 백일홍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진 나무다.

꽃이 오래 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국화과에 백일홍이라는 이름의 식물이 있어서 구별하기 위해 목백일홍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한다.

충청도 지방에서는 나무껍질을 긁으면 잎이 흔들린다고 해서 ‘간지럼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자어로는 자미화(紫薇花)라고 한다.

배롱나무는 무엇보다도 7~9월에, 주로 붉은색으로 피어나는 꽃이 압권이다.

화려한 꽃이 풍성하게 피어나 나무를 온통 붉은색으로 수놓는다.

꽃이 피어있는 기간도 길어서 관상용으로 많이 심는다.

송량의 후손들이 효곡재사에 심었던 것처럼, 예전에 선비들이나 유학자들이 서원, 향교에 많이 심었고, 절에서도 많이 심었다.

오래 피어있는 붉은 꽃 때문에 절개와 지조를 상징해서라는 이야기도 있고, 해마다 껍질을 벗으며 깨끗하고 매끈한 모습으로 거듭나는 나무의 특징과 관련이 있다는 말도 있다.

효곡재사(孝谷齋舍)는 우곡(愚谷) 송량(宋亮:1534~1618)의 높은 덕을 기리기 위해 증손자 송영(宋穎)이 숙종 때 효곡서원(孝谷書院)으로 창건했다.

이후 규모가 협소해 정조 때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서원의 강당 건물과 사당을 합해 효곡재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7세기 후기의 건물로서 나무를 다루는 수법이 건립 연대와 부합하는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된다.

1991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6호로 지정되었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송량은 성운(成運)과 이황(李滉) 문하에서 수학했다.

상주목사로 부임한 류성룡(柳成龍)과 글로 벗하며 성리학을 토론하기도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준, 정경세, 김각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웠다.

정구(鄭逑)에 의해 학행으로 천거돼 헌릉참봉(獻陵參奉)이 됐고,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 한성참군(漢城參軍) 등을 역임했다.

전란 중에 류성룡의 천거로 수령에 제수됐고, 관군을 이끌고 다시 왜적과 싸웠다.

전쟁이 끝난 후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했고 오현사(五賢祠, 또는 五賢院)를 세워 후진 양성에 힘썼다.

선조가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두 번이나 임명해 불러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증손자가 만든 효곡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저서로는 '우곡문집(愚谷文集)' 4권 2책이 있다.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송량의 성실함과 책임감, 충효 정신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하늘이 내린 듯한 효자였다. 아침저녁으로 부모의 묘소를 살폈는데, 비바람이 불지라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고을 사람들이 그가 살던 마을을 ‘효곡(孝谷)’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추천을 받아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여러 능에 올리는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되자, 다만 능 참봉의 관직을 지낸 사람들에게 분향(焚香)한 사실을 초하루에 글로 써서 보고하도록 했다. 어느 날 임금이 내시를 보내 일일이 살펴보도록 하니, 오직 헌릉에서만 제사를 그만두지 않았다. 임금이 기특하게 여겨, 특별히 품계를 올려주도록 명령했다. 의병을 일으키는 데 공을 세워, 벼슬이 주부(主簿)에 이르렀다. 효곡서원에 그의 위패를 모셨다.”

효곡리 효곡재사 배롱나무는 크고 수세가 좋을 뿐 아니라, 부모에게 지극했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목숨을 걸고 싸웠으며,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했던 옛 선비의 아름다운 삶을 떠올리게 하는 소중한 나무다.

<상주 효곡리 효곡재사 배롱나무>

·보호수 지정 번호 14-08-01
·보호수 지정 일자 2014. 6. 5.
·나무 종류 배롱나무
·나이 341년
·나무 높이 6m
·둘레 1.5m
·소재지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 516
·위도 36.322947, 경도 128.032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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