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잎을 다 떨군 활엽수가 사는 겨울 숲에서 눈에 확 띄는 나무들이 있다.

상수리나무나 신갈나무처럼 마른 잎을 땅에 내려놓지 않고 그대로 달고 서 있는 참나무류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 계절에 나목과 상록수 사이에서 단연 돋보이는 그들 모습은 숲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곤 한다.

그 풍경이 환하지만은 않다는 게 좀 아쉽다. 버석하게 말라서 뒤틀린 잎은 어쩐지 처연해 보이고 겨울이 깊어갈수록 차츰 떨어져 부쩍 수척해 보이기 때문이다. 

가로수로 즐겨 심는 대왕참나무도 마찬가지다.

빨리 자란다는 이점을 극도로 부각해서 미국은 자국의 대왕참나무를 세계 각지에 많이 팔았다.

국내에도 도입되어 최근 조성된 서로 다른 신도시에는 거의 같은 연령대의 대왕참나무가 우후죽순 식재되었다.

경북도청이 들어서며 새롭게 조성된 도시에는 심은 지 몇 해 안 된 대왕참나무가 요즘 말라비틀어진 잎을 달고 줄지어 서 있다.

그 가로수 길을 걸을 때면 나는 우리 숲의 감태나무가 자꾸 생각난다. 

겨울 숲의 나목과 상록수 사이에서 감태나무는 묵은 잎을 온전히 달고 있어서 유독 돋보인다. 봄이 와서 새순이 돋아날 때까지 그 잎은 떨어지지 않는다. 다소 옅은 갈색에 핑크를 몇 방울 톡 섞은 듯 인디핑크와 에쉬핑크 그 어디쯤 되는 빛깔이 인상적이다. [왼쪽=Andrew Bunting, 오른쪽=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마른 잎을 달고 겨울을 나는 활엽수 중에 감태나무는 저 혼자 매우 특별하다.

잎이 마를지라도 그 모든 잎을 한 장 한 장 반듯하게 유지해서 결코 휘거나 비뚤어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까.

봄이 와서 새순이 돋아날 때까지 묵은 잎을 떨구지 않고 온전히 지키는 감태나무는 그래서 겨울에 특히 더 근사하게 보인다.

무엇보다도 마른 잎의 색감이 압도적이다.

다소 옅은 갈색에 핑크를 몇 방울 톡 섞은 듯 인디핑크와 에쉬핑크 그 어디쯤 되는 빛깔은 내게서 와, 하는 감탄의 소리를 기어코 뽑아내고야 만다. 

감태나무가 잘 자라는 곳은 바닷가에 인접한 숲이다.

겨울에도 지지 않고 매달려있는 감태나무의 갈색조 잎을 보고 바닷사람들은 그들이 물에서 건져 올린 갈조류 감태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무는 '감태'를 자신의 이름으로 얻었다.

잎에서 감태향이 난다고 감태나무라고 설명하는 자료도 있지만 그들 몸에서는 바다 쪽이 아니라 나무가 모여 사는 숲의 향기가 강하게 난다.

감태나무의 씨앗에는 그 향을 결정하는 오일 성분이 많기 때문에 동백나무처럼 기름을 짜서 쓸 수도 있다.

그 쓰임새에 덧붙여 잎의 뒷면이 유독 하얗다고 해서 북한에서는 감태나무를 백동백나무라고 부른다. 

갈조류 감태와 녹나무과 감태나무. 겨우내 매달려있는 감태나무의 갈색조 잎이 갈조류 감태를 닮아서 나무는 ‘감태’를 자신의 이름으로 얻었다. [왼쪽=국립수산과학원, 오른쪽=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감태나무의 꽃과 열매와 단풍. [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감태나무의 꽃과 열매와 단풍. [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우아한 수형과 단정한 수피와 오묘한 꽃과 앙증맞은 열매와 오렌지빛 선명한 단풍으로 겨울이 아닌 계절에도 감태나무는 내내 멋지고 어여쁘다. 

온 계절 아름다운 이 나무가 우리 숲에서 살게 된 사연을 알고 나면 눈이 휘둥그레질 것이다.

감태나무는 암수딴그루로 한반도를 비롯하여 일본과 중국과 대만 등지에 자라는데 어찌 된 일인지 한반도와 일본에는 암그루만 산다.

무릇 암그루가 수그루와 함께 살아야 열매를 맺어 번식에 성공하지 않던가?

한반도와 일본의 감태나무는 놀랍게도 암그루 혼자서 그 일을 할 수 있다.

꽃가루받이를 통한 수정 없이 홑몸으로 종자를 맺는 현상이 식물의 세계에서는 종종 일어난다.

모계와 부계의 유전자가 서로 만나서 섞이는 것이 아니라 암그루의 복제로 이루어지는 이 초인적인 일을 과학에서는 'mix(혼합)'가 'apo(사라졌다)'라는 뜻에서 '아포믹시스(apomixis, 무수정결실)'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후대 생산이 가능한 자손을 만든다는 것이다.

자연에서는 30만여 속씨식물 중 400여 종이 이러한 방식으로 생존하고 번식한다.

0.1%의 확률이다. 

감태나무가 한반도에서 이처럼 희박한 번식 방법을 선택한 이유를 식물학자들은 살아남기 위해서였을 거라고 짐작한다.

홍적세라는 아주 먼 과거에 다른 대륙에서 암수딴그루로 살던 감태나무가 한반도와 일본이라는 섬 지역에 암그루 혼자 도착한 후 멸종을 피하려고 고안한 것이 무수정결실이라는 것.

이 같은 사실을 알기 위해 과거에 식물학자들은 감태나무의 암그루를 밀봉해서 꽃가루받이의 개입을 아예 차단하는 실험을 한 적이 있다.

감태나무와 같은 혈통이고 암수딴그루로 사는 다른 3종의 나무와 함께였는데 그중 유일하게 감태나무만 열매를 맺었다.

최근 급격히 성장한 DNA 분석 기술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각종 현상을 더욱 치밀하게 해석한다.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PCR 검사라는 DNA 해독법이 우리 몸에 침입한 바이러스의 종류를 밝히고 그들이 돌연변이를 일으켰는지를 알아내는 것처럼.

최근에 일본의 한 연구팀은 DNA 분석을 통해 센다이에서 구마모토까지 최소 1100km에 걸쳐 사는 감태나무가 유전적으로 거의 균일한 복제 개체라는 것과 돌연변이를 통해 언젠가는 그 균일성이 깨질 수도 있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양친으로부터 받은 유전자를 변화하는 환경에 맞설 수 있는 최적의 조건으로 조합하여 후대에 전하는 전술이 가장 안전하고 평탄한 길이건만, 배우자를 만날 수 있는 환경을 자연이 허락하지 않을 때 식물은 위협을 무릅쓰고 새로운 길로 나아간다.

그 결과 감태나무는 한반도와 일본이라는 땅에서 완벽하게 암그루만 사는 세상을 만들게 된 거다.

인간이 바이러스와 맞서기 위해 백신을 개발하듯이 그러니까 식물은 어떤 급격한 환경의 변화를 인지하고 생존과 존속을 위하여 과감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할 줄 아는 생명체다.

식물이 열어준 그 활로를 인간의 삶에 차용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분야가 과학이 아닌가 싶다.

2020년 노벨평화상은 유엔 산하 세계식량계획(WFP)이 받았다.

국제적 연대와 다자간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대에 기근과 빈곤 퇴치를 위해 헌신한 공로가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과학자들은 식량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감태나무가 선택한‘아포믹시스(무수정결실)’를 보다 촘촘하게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후위기나 국제적 정세의 변동에도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미 홀로 후대를 생산하는 작물을 개발하여 모계의 우량한 형질을 그대로 유지하되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이는 비단 식량자원뿐만 아니라 정원식물과 화훼식물을 개발하는 분야와 유망 목재를 생산하거나 황폐한 산림을 복구하기 위한 식물을 개발하는 분야에도 폭넓게 적용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나는 대왕참나무가 식재된 길을 걷다 생각하는 것이다.

먼 나라에서 수입해서 심는 그들보다 훨씬 아름답고 특별한 능력까지 겸비한 우리 자생식물 감태나무를 가로수나 조경수로 많이 심으면 어떨까 싶다.

해외로 수출도 해서 미국과 유럽의 거리에서도 우리 나무 감태나무를 만날 수 있다면, 외국인들이 감태나무의 자태에 매료되어 새로운 한류를 형성할 수 있다면…… 

대왕참나무가 가로수로 식재된 경북도청 신도시의 거리. [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해외 수목원과 정원의 가드너들은 우리 감태나무를 유망한 조경수로 점치고 있다. [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국가적 관심과 국민의 참여로 나는 그 일이 가능하다고 본다.

가장 서둘러 시작할 것은 지자체에서 정해 놓은 가로수 목록부터 모조리 손보는 거다.

그 목록에 근거하여 우리 자생 수종을 보급할 수 있는 공적인 체계를 견고하게 갖추어야 한다.

구체적인 장치 없이 나무의 어떤 가능성만 이야기하다 보면 누가 누가 돈이 된다는 소문이 번지고 불법 거래가 자행되고 결국은 죄 없는 식물만 다치는 서식지 훼손으로 이어질 테니까. 

식물에 대한 관심이 늘고 그들을 우리 삶에 들이는 문화가 번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유행 때문에 누군가는 식물을 소비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경제적 이득을 위한 수단으로 치부하진 않을까 싶어 요즘 나는 걱정이 부쩍 늘었다.

식물은 아주 먼 과거부터 갖은 경험을 통해 이 행성에서 생존하기 위한 해법을 모색하고 현명하게 대처하며 삶의 지혜를 차곡차곡 모아온 우리의 선배.

그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아직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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