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석북 신광수는 50세가 되어서 처음 관직에 오른다. 영릉(寧陵:효종의 능)을 돌보는 참봉으로 종 9품 벼슬이었다. 그야말로 뒤늦게 겨우 미관말직의 벼슬자리를 하나 받은 셈이었다. 하지만 한양 풍류가에서 석북은 시로 명성을 제법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석북이 지은 시로 가객 이응태에게 주는 시가 있는데 바로 그러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증가자이응태((贈歌者李應泰)당대의 명창 이세춘이십년동안 한양사람들을 경도시키네청루에 협소들은 능히 창을 전하고백수로 강호에서 신가락을 움직이네9월9일 국화꽃이 벽사를 찾고한 잎 배 옥피리로 섬강을 올라와영동에 와 놀며 내 시를 많이 얻어가또 장안 안에 이름을 가득 퍼뜨리겠구나(當世歌豪李世春 十年傾倒漢陽人 靑樓俠少能傳唱 白首江湖解動神 九日黃花看甓寺 孤舟玉笛上蟾津 東游定得吾詩足 此去聲名又滿秦)능지기라는 게 사실 별 할 일 없는 자리다. 여주에서 능지기를 하면서 석북은 늘 그랬듯이 소일거리로 시를 지었는데, 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