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김담은 1445년 이조정랑을 거쳐 제언종사관으로 임명되어 이순지와 함께 언제 공사(堰堤工事)에서 계산을 맡았다. 1447년 승문원부교리로 있으면서 『전부구등지법(田賦九等之法)』을 편찬했으며, 1448년 천변지이(天變地異)를 관측해서 기록하고 역서를 편찬하며 절기와 날씨를 측정하고, 시간을 관장하던 관청인 서운관(書雲觀) 책임자가 되었다.부친상을 맞자 여섯 차례나 상소하다그 무렵 김담은 문과 중시(重試: 과거 급제자를 대상으로 치르는 시험)에 응시했는데,을과 1등 3명 가운데 2등을 차지했다. 이때 1등은 성삼문(成三問)이었고 3등은 이개(李塏)였다.을과 2등 7명은 신숙주(申叔舟), 최항(崔 恒), 박팽년(朴彭年), 유성원(柳誠源) 등이었다. 당대의 수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김담의 학문은 뛰어났던 것이다.1449년(세종 31년) 1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김담은 3년 동안 시묘를 살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해 5월, 세종은 국사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434년(세종 16년), 세종은 이순지(李純之)를 천문역법 사업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순지의 본관은 양성(陽城)이며 자는 성보(誠甫)로, 1427년(세종 9년) 문과에 급제했다. 문관 출신이었지만 서울의 위도를 정확하게 계산해 낼 정도로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이순지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세종이 야심차게 추진하는 과학 프로젝트를 총괄 지휘하게 된 것이었다.이순지와 함께 『칠정산 내외편』을 완성1435년(세종 17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이순지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삼년상을 치르기 위해서 관직을 떠나게 되었다. 세종으로부터 후임을 천거하라는 명을 받은 승정원은 집현전 정자로 있던 김담을 ‘나이가 젊고 총민(聰敏)하고 영오(潁悟)하므로 맡길 만한 사람’이라면서 추천했다.그러나 세종은 관직을 시작한 지 겨우 1년밖에 되지 않은 새파란 나이의 김담만으로는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삼년상을 치르고 있던 이순지를 정4품으로 승진시키면서 1년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435년(세종 17년) 12월의 어느 추운 날, 집현전(集賢殿) 정자(正字: 정9품) 김담은 연신 손을 비비면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올 겨울은 유난히 쌀쌀했다. 손이 곱아서 책장을 넘기는 게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김담(金淡)은 전혀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부러워하는 집현전에 근무하기 시작한 게 불과 1년 전이었다. 과거에 합격하자마자 곧장 발탁되어 집현전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었다.별을 헤아리는 남자집현전은 조선시대 학문 연구를 위해서 궁중에 설치한 기관으로, 학자를 양성하고 문풍을 진작하는데 주력했다. 세조부터 성종에 이르는 조선 초기의 정치, 사회, 문화의 제도를 마련하고 이끌어간 대신들은 대부분 집현전 출신이었다.특히 세종은 민족문화를 창달하는 기관으로서 집현전을 매우 중요시했다. 뛰어난 인재를 집현전에 많이 배속했으며, 일단 집현전에 소속되면 다른 관직으로 옮기지 않고 계속 머물면서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