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송헌 김담 영정. [사진=영주시청, 봉화군청]
무송헌 김담 영정. [사진=영주시청, 봉화군청]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435년(세종 17년) 12월의 어느 추운 날, 집현전(集賢殿) 정자(正字: 정9품) 김담은 연신 손을 비비면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올 겨울은 유난히 쌀쌀했다. 손이 곱아서 책장을 넘기는 게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김담(金淡)은 전혀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부러워하는 집현전에 근무하기 시작한 게 불과 1년 전이었다. 과거에 합격하자마자 곧장 발탁되어 집현전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었다.

별을 헤아리는 남자

집현전은 조선시대 학문 연구를 위해서 궁중에 설치한 기관으로, 학자를 양성하고 문풍을 진작하는데 주력했다. 세조부터 성종에 이르는 조선 초기의 정치, 사회, 문화의 제도를 마련하고 이끌어간 대신들은 대부분 집현전 출신이었다.

특히 세종은 민족문화를 창달하는 기관으로서 집현전을 매우 중요시했다. 뛰어난 인재를 집현전에 많이 배속했으며, 일단 집현전에 소속되면 다른 관직으로 옮기지 않고 계속 머물면서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했다. 또한 오랫동안 연구에만 몰두하는 집현전 학사들의 편의를 위해서 다양한 배려를했다. 도서를 대량으로 구입하고 인쇄해서 집현전에 보관하는 한편, 수시로 휴가를 주어 고향이나 산사에 머물며 마음 껏 독서하고 연구하도록 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특전을 베풀어서 학사들이 연구에 매진하는 데 불편하거나 부족함이 없도록했다. 집현전 학자들도 그에 보답하듯이 연구를 거듭해서 뛰어난 결과물을 많이 배출했다.

집현전의 업무 중에서 서적 편찬사업은 조선 초기의 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당대에 귀감이 되는 한편 후세에 영감을 주기 위해서 우리나라와 중국의 각종 사서를 편찬하고 주해하여 출간했다. 집현전이 펴낸 대표 적인 저술로는 『치평요람(治平要覽)』,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정관정요주(貞觀政要註)』, 『역대병요(歷代兵要)』, 『고려사』, 『고려사절요』, 『태종실록』, 『세종실록』등이 있다.

집현전의 업적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우리말인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이와 관련된 편찬사업을 한 것이다. 『운회언역(韻會諺譯)』, 『용비어천가주해(龍飛御天歌註解)』,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동국정운(東國 正韻)』, 『사서언해(四書諺解)』 등은 우리나라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이처럼 세종이 재위하는 동안 황금시대를 여는 원동력이 되었던 집현전에서 근무하게 된 김담은 추위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어서 빨리 학문을 연마하여 선배들 못지않은 업적을 쌓아서 나라에 공헌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예서 뭐하느냐?”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김담은 살짝 놀랐다. 책 읽는 데 집중하느라 누가 가까이 다가온 것도 몰랐던 것이다.

“형님!”

목소리의 주인공은 친형 김증(金曾)이었다. 지난해 김담이 정시(庭試)에 병과로 급제했을 때 맏형 김증도 함께 합격하여 형제가 나란히 집현전 정자(正字: 정9품)로 임명되는 겹경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집현전 학사 중에서 형제가 나란히 선발된 것은 김담 형제가 유일했다.

“춥지 않느냐?”
“괜찮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김담의 얼굴은 벌겋게 얼어 있었다. 김증은 동생의 얼굴을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옵니까?”
“승정원에서 자네를 찾네. 어서 가보게.” 
“승정원에서요?”

승정원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곳으로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과도 같은 기관이었다. 태종 때부터 왕권 강화시책을 펼치면서 승정원의 정치적 영향력도 덩달아서 커졌다. 그런데 그 막강한 승정원에서 이제 관직에 오른 지 겨우 1년밖에 되지 않은 말단관리 김담을 보자고 하는 것이었다.

“네가 별을 보는 걸 좋아하는 김담이냐?”

승정원으로 찾아간 김담을 맞이한 도승지는 대뜸 그렇게 물었다. 도승지의 입에서 동료들끼리 재미삼아서 부르는 자신의 별명이 나오자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김담은 이내 “예” 하고 대답했다.

쉬는 시간에 집현전 동료들끼리 잡담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취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다른 사람은 시 짓기나 붓글씨 쓰기가 취미라고 했는데 김담은 ‘별을 보는 게 취미’라고했다. 김담의 말에 동료들은 박장 대소를 터트렸고 그때부터 김담의 별명은 ‘별 보는 남자’가 되었다.

“어째서 별을 보는 걸 좋아하게 되었느냐?”

도승지는 김담의 별명을 화제로 질문을 이어갔다. 김담은 이 대화가 조금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하늘 같은 도승지 앞에서 답변을 피할 수는 없었다.

“어릴 때 소피가 마려워서 한밤중에 깨어나 측간에 가던 중에 우연히 밤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 별들이 당장 쏟아져내릴 것 같아서 두려웠습 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든 뒤에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머리를 식히려고 잠시 밖으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밤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그 별들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마치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것처럼 친근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때부터 별이 좋아져서 틈이 날 때마다 별을 관찰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김담의 대답에 도승지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잘 알았다. 돌아가서 어명을 기다리고 있거라.”

며칠 뒤, 김담은 간의대(簡儀臺)에서 근무하라는 명을 받았다.

조선 세종 때 김담이 편찬한 역법서 '칠정산 내편'과 '칠정산 외편' [사진=영주시청, 봉화군청]
조선 세종 때 김담이 편찬한 역법서 '칠정산 내편'과 '칠정산 외편' [사진=영주시청, 봉화군청]

조선의 천문학을 세계에 알리다

1434년(세종 16년), 경복궁 내 경회루 북쪽에 세워진 간의대는 관천대(觀天臺)라고도 부르는 일종의 천문대이다. 내부에 천문관측기구인 간의를 설치하고 밤마다 관원들이 입직해서 천문을 관측하는 일을했다.

조선시대는 농경사회였다. 때문에 농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천문(天文), 기상(氣象), 역법(曆法) 등을 매우 중요시했다.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은 이에 대한 연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눈부신 결과물을 배출했다. 측우기(測雨器), 대간의와 소간의(大小簡儀, 천문관측기), 혼천의(渾天儀, 천구의), 앙부일구(仰釜日晷, 해시계), 자격루(自擊漏, 물시계) 등은 모두 세종 때 발명되고 제작된 뛰어난 발명품이었다. 그중 측우기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앞선 발명품이었다.

천문학은 농업과도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었지만, 하늘의 이치를 정치 질서와 연관시키는 당시의 풍토에서 매우 중요한 분야였다. 세종은 해와 달과 별을 관측하기 위해서 경복궁 안에 간의대를 설치하고 여러 가지 관측기구를 운영했다. 또한 삼각산, 금강산, 마니산, 백두산, 지리산, 한라산 등지에도 천문학자를 파견하여 북극의 높이와 일식과 월식 등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도록했다.

세종 때 천문학이 거둔 성과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독자적 달력인 『칠정산(七政算)』을 만든 것이다. 1442년(세종 24년)에 집현전과 서운관 학자들이 우리나라의 역대 역법(曆法)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원나라와 명나라의 역법을 참조해서 만든 『칠정산』은 내편과 외편으로 구성되었다. 내편은 중국의 베이징을 기준으로 했던 기존의 달력과는 달리 서울을 표준으로 작성한 달력이다. 해와 달과 별들이 운행하는 원리와 위치와 시각 등이 오늘날의 달력과 매우 비슷하게 설명되어 있으며, 서울의 밤과 낮의 길이가 무척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외편은 우리가 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력(회회력)을 이해하기 위해서 개정하고 증보하여 번역한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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