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297년(충렬왕 23년) 첨의부 첨의참리가 된 안향은 세자이보를 맡았다. 세자이보는 왕위 계승 1순위인 세자를 가르치는 스승의 자리였다. 아버지 충렬왕과 원나라 공주 출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세자는 세 살 때 세 자로 책봉된 이후 줄곧 원나라에서 성장했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으로 반식민지 상태였다. 고려 조정에서도 아버지 충렬왕보다 어머니 제국대장공주의 권력이 더 강했다.세자의 스승이 되다세자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제국대장공주와 원 나라에 눌려 있던 충렬왕은 정사를 멀리 하고 자주 사냥을 나가거나 연회를 즐겼다. 1290년 만주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킨 합단적(哈丹賊)이 원나라에 패하자 고려로 침범해오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충렬왕은 자신은 늙었다면서 적과 맞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하지만 원나라에 있던 세자는 외할아버지(원나라 세조)에게 요청해서 1만 명의 구원부대를 이끌고 합단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275년(충렬왕 원년), 안향은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부임했다. 벼슬길에 나선 이후 처음으로 지방관에 임명된 안향은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서 미신을 타파하고 풍속을 쇄신하는 치적을 쌓았다.원나라의 탄생과 일본 원정몽골과의 오랜 전란에 지친 백성들은 구원의 수단으로 토속신앙인 무교를 깊이 신봉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유교를 공부한 안향은 무교를 미신으로 여기고 배척하여 민생을 안정시켰다.『고려사(高麗史)』는 안향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충렬왕 원년에 상주판관이 되었다. 그때 요괴를 받드는 여자 무당 세 명이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공중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자 다들 앞을 다투어 엎드리고 수령도 이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무당들이 상주에 이르렀을 때 안향이 잡아서 곤장을 치고 칼을 씌우자 무당들은 ‘신의 저주가 내릴 것이다’라고 했다.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했지만 안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