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보민 기자】 포스코가 철강 전문 사업회사로 새롭게 출범했다.포스코홀딩스의 출범으로 그룹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데 따른 것. 포스코는 철강 사업에 역량을 집중해 안정 강화와 친환경 생산체제 전환을 가속화할 계획이다.3일 포스코는 전날 서울 강남구 포스코센터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새 조직을 이끌 김학동 부회장과 정탁 사장을 초대 대표이사(각자대표)로 선임했다고 밝혔다.사외이사에는 박재환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와 이민호 전 경희대 환경학과 교수를, 사내이사 자리에는 이시우 생산기술본부장(부사장)과 김지용 안전환경본부장(부사장), 윤덕일 경영기획본부장(부사장)을 선임했다.비상무이사로는 포스코홀딩스의 전중선 경영전략팀장(사장)이 올랐다. 이사회 의장은 김학동 대표이사 부회장이 맡는다.현 상법에서는 상장사와 금융회사만 사외이사를 의무적으로 선임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선진 지배구조의 정착과 경영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사외이사를 선임하게 됐다고 회사는 설명했다.포스코는 안전경영을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세자를 모시고 영변으로 피신해 있던 정탁은 이여송의 군영을 출입하면서 평양성 탈환 작전을 수립하는 데 협조했다. 마침내 평양성을 탈환하자 종묘사직에 제사를 올리고 평양을 수복했음을 고했다. 이어 세자를 모시고 평안도 정주로 가서 선조를 알현하고 이 기쁜 소식을 아뢰었다.국란 속에서 빛난 원로의 역할평양성을 탈환한 이여송은 곧장 남하하여 개성을 향해 쳐들어갔다. 그러자 개성을 지키던 왜장 고바야가와는 싸우지도 않고 서울로 퇴각해버렸다. 그러자 왜군을 가볍게 여긴 이여송은 곧장 그 뒤를 쫓아서 서울로 향했다. 이여송 부대가 서울 북쪽 40리 지점 벽제관(碧蹄館) 남쪽 여석령(礪石嶺)에 이르렀을 때 매복하고 있던 왜군이 기습공격을 했다. 이 싸움에서 크게 패한 이여송은 황급히 개성으로 후퇴하고 말았다.평양성 패배로 사기가 크게 꺾여 있던 왜적은 여석령 전투(또는 벽제관싸움)에서 거든 승리로 기세가 되살아났다. 이때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기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565년, 마흔 살이 된 정탁은 성균관 전적을 거쳐 사간원 정언, 예조정랑, 헌납 등을 지냈다. 그 무렵, 조정은 임금의 외척인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이 서로 대립하여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할 말을 제대로 하는 관리중종 후반부터 조정의 정파는 세자(훗날 인종)의 외숙인 윤임을 중심으로 한 대윤과, 문정왕후가 낳은 경원대군(훗날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으로 나누어졌다. 두 세력의 대립은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 쪽으로 힘이 기울어졌다. 권력을 거머쥔 대윤은 가장 강력한 정권 위협세력인 소윤을 탄압했다. 소윤의 대표 격인 윤원형은 탄핵을 받아서 파직되고 말았다.그러나 인종이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승하하고 명종이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문정왕후의 동생이었던 윤원형은 예조참의로 조정에 복귀하여 대윤에게 대대적인 보복을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을사사화(乙巳士禍)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592년(임진년), 기습적으로 조선을 침공한 일본은 초기에는 승승장구하면서 기세를 올렸으나,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대의 강력한 저항과 제해권을 장악한 이순신(李舜臣)의 활약으로 기세가 꺾였다.조선을 지원하려고 명나라와 화의를 진행하다가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정유년)에 다시 조선으로 쳐들어왔다. 그런데 조선의 바다에는 여전히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버티고 있었다.이순신 장군을 구한 정탁이순신은 조선시대 최대의 국란이었던 임진왜란(壬辰倭亂)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장수 중 하나였다. 1592년 5월 7일의 옥포(玉浦)해전부터 1598년 11월 18일의 노량(露梁)해전까지 20여 차례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이순신이 거둔 승리들은 패색이 짙었던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엎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임진왜란 발발 1년 뒤에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올라 조선의 수군을 통솔하게 된 이순신은 공격과 방어, 집중과 분산을 효과적으로 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