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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 ⑤] 경북-임진왜란의 숨은 공신 정탁 (3)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 ⑤] 경북-임진왜란의 숨은 공신 정탁 (3)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19.08.0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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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청주정씨 재실의 이모저모. [사진=예천군청, 안동시청]
예천 청주정씨 재실의 이모저모. [사진=예천군청, 안동시청]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세자를 모시고 영변으로 피신해 있던 정탁은 이여송의 군영을 출입하면서 평양성 탈환 작전을 수립하는 데 협조했다. 마침내 평양성을 탈환하자 종묘사직에 제사를 올리고 평양을 수복했음을 고했다. 이어 세자를 모시고 평안도 정주로 가서 선조를 알현하고 이 기쁜 소식을 아뢰었다.

국란 속에서 빛난 원로의 역할

평양성을 탈환한 이여송은 곧장 남하하여 개성을 향해 쳐들어갔다. 그러자 개성을 지키던 왜장 고바야가와는 싸우지도 않고 서울로 퇴각해버렸다. 그러자 왜군을 가볍게 여긴 이여송은 곧장 그 뒤를 쫓아서 서울로 향했다. 이여송 부대가 서울 북쪽 40리 지점 벽제관(碧蹄館) 남쪽 여석령(礪石嶺)에 이르렀을 때 매복하고 있던 왜군이 기습공격을 했다. 이 싸움에서 크게 패한 이여송은 황급히 개성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평양성 패배로 사기가 크게 꺾여 있던 왜적은 여석령 전투(또는 벽제관싸움)에서 거든 승리로 기세가 되살아났다. 이때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서 군사를 이끌고 올라오고 있던 전라감사 권율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 배수의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왜적은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했다.

2월 12일, 권율과 의승장 처영(處英)이 이끄는 1만 명의 군사는 3만 명의 왜적을 맞아서 치열하게 싸운 끝에 큰 승리를 거두었다. 권율이 승리로 이끈 행주대첩은 김시민의 진주대첩, 이순신의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삼대첩(三大捷)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행주산성에서의 대승을 계기로 다시 기세가 살아난 명나라는 왜적과 화의를 추진했다.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봉기와 명나라 군대의 대규모 출정, 이순신 장군이 장악한 제해권으로 인한 보급 곤란, 게다가 돌림병까지 번져서 사기가 크게 떨어진 왜적은 화의에 응했다.

4월 18일, 서울에서 철수하여 강원도와 충청도에 있던 병력과 함께 남하한 왜적은 서생포(西生浦: 지금의 울산)와 웅천(熊川: 지금의 진해) 사이에 성을 쌓고 화의를 진행했다.

그해 6월, 명나라와 화의를 진행하던 왜적은 진주성에 크게 패한 것을 복수하는 한편 화의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 진주성을 다시 공격했다. 당시 진주성을 지키던 조선군은 수천 명에 불과했고 왜적은 7만 명에 달했다.

열흘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의병장 김천일이 이끄는 조선군은 처절한 최후를 맞이했다. 비록 진주성을 탈환했지만 왜적도 막대한 피해를 입어서 더는 세력을 확대하지 못했다.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진주성에서의 싸움은 임진왜란 때 가장 치열했던 전투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예천 청주정씨 재실의 이모저모. [사진=예천군청, 안동시청]

1594년 봄, 명나라와 일본이 화의를 진행하는 동안 정탁은 세자를 모시고 수 개월 동안 전주, 공주, 홍주 등을 순시하면서 백성들이 형편을 살폈다. 왜적에 대한 방비가 부족한 곳에는 병사들을 훈련해서 대비하도록 했으며 굶주린 백성들이 있는 곳에서는 장을 열어서 구휼에 나섰다.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비바람이 몰아치는 궂은 날씨를 아랑곳하지 않고 진력을 다하는 정탁의 모습에 감동한 세자는 친히 휘지를 내려 치하했다.

임진왜란 때의 활약상을 인정받아서 우의정의 자리에 오른 정탁은 곽재우, 김덕령(金德齡), 유정(사명대사) 등 역시 임진왜란에서 큰 공을 세운 의병장들을 추천하여 포상을 받도록 했다. 이 가운데 김덕령은 어머니의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정탁의 추천으로 형조좌랑의 직함과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은 김덕령은 곽재우와 함께 권율의 막하에 소속되어 영남 서부지역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거제도에 주둔하는 왜적을 수륙 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했으며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적을 기습해서 격퇴하기도 했다.

진주에서 장기전에 대비하고 있던 김덕령은 명나라와 왜적이 화의를 추진하자 울화가 치밀어서 과음을 하고 군법을 엄하게 적용하여 병사들의 불만이 많았다. 그러던 중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비를 벌하다가 죽음에 이르게 한 죄로 투옥되었으나 영남 유생들의 상소와 정탁의 변호로 석방되었다. 이때 정탁은 “명장을 벌하면 군의 사기가 꺾이고 국가에 막대한 손실입니다”라는 말로 김덕령을 구해냈다.

이후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자 권율의 명령을 받고 출정한 김덕령은 이미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로 돌아왔다. 그런데 뜻밖에 도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모함을 받아서 체포되고 말았다. 김덕령의 결백을 믿은 정탁이 다시 나서서 그의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20일 동안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체구는 작지만 날래고 민첩했던 김덕령은 1661년(현종 2년)에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1668년에는 병조참의로 추증되었다.

앞서 이순신의 경우와 김덕령의 경우에서 보듯이 정탁은 억울한 이를 구하는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앞장섰다. 비록 그가 대역죄를 저지른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고 나서서 변호했다. 그처럼 정탁은 사람에 대한 신의가 깊은 인물이었다.

정탁은 전란의 와중에 명나라에서 온 칙사와 장수들을 상대하는 일도 맡아서 했다. 그들을 접대하고 환송하는 일, 그들과 주고받은 문서, 명나라 장수들과의 회의내용 등을 기록한 『 용만문견록(龍灣聞見綠)』을 남기기도 했다. 이 책은 당시의 군사, 외교, 정치, 사회의 여러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기록물이다.

정탁은 명나라 원병을 이끈 이여송의 군영에도 자주 출입했는데, 하루 는 이영송의 참모 두복야가 실수를 저질러서 불려왔다. 이여송이 일벌백계로 그를 처형하려고 하자 그 광경을 목격한 정탁은 두복야를 죽여 없앴다고 여기고 자신에게 달라고 이여송에게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목숨을 구하게 된 두복야는 은혜를 갚기 위해서 예천 지방의 명당 10곳을 적은 풍수지리서 『감여요람(堪輿要覽)』을 정탁에게 주었다. 이 소식이 퍼지자 전국의 유명한 풍수전문가들이 두복야가 지목한 명당을 찾기 위해 예천 지방을 샅샅이 조사하고 다녔다.

그러나 겨우 1곳만 밝혀내고 나머지 9곳은 아직도 비밀에 감춰져 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예천 청주정씨 재실의 이모저모. [사진=예천군청, 안동시청]
예천 청주정씨 재실의 이모저모. [사진=예천군청, 안동시청]

퇴계와 남명의 학문을 두루 익히다

열일곱 살 때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서 학문을 익혔던 정탁은 진주교수로 있던 서른여섯 살 무렵에는 남명 조식의 문하에도 출입했다. 남명은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면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대학자로, 당대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 비판하는 자세를 적극적으로 견지했다.

퇴계와 남명은 공통점이 많았다. 우선 두 사람은 같은 해에 경상도에서 태어났다. 1501년에 남명은 합천(경상우도)에서 퇴계는 안동(경상좌도)에서 태어난 것이다. 이들은 평생 동안 학문 탐구에만 매진하여 조선을 대표하는 거유(巨儒: 학문과 덕행이 이름난 유학자)로 성장했다. 제자 양성에도 힘을 기울인 퇴계와 남명은 뛰어난 제자를 수없이 배출하여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퇴계는 개인의 수양과 절제를 강조하면서 도덕성을 중요시했으며, 남명은 학문의 수양과 함께 실천을 강조했다. 퇴계의 제자 중에는 류성룡과 구봉령 등 뛰어난 학자가 많은 반면, 임진왜란 때 의병장 중에는 남명의 제자가 가장 많았다. 이 두 학파의 사상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퇴계와 남명을 함께 스승으로 모신 사람은 많은데, 그중에서 정승(정1품 관직)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정탁이 유일했다. 퇴계의 제자 중에는 류성룡과 이산해(李山海)가 정승을 지냈으나 남명과는 인연이 없었다. 남명의 제자 중에서는 정인홍이 정승을 지냈으나 퇴계와는 인연이 없었다.

정탁과 같은 집안인 청주 정씨 출신의 정구는 퇴계와 남명을 함께 스승으로 모신 인물이다. 정구는 퇴계학과 남명학을 아우른 대학자로 이름을 떨쳤고, 정탁은 퇴계와 남명의 학풍을 바탕으로 훌륭한 업적을 쌓은 정치가였다.

1573년(선조 6년) 11월 30일, 경연(經筵) 자리에서 퇴계와 남명에 대해 논의하다가 선조가 “이들의 제자 가운데 조정에서 일하는 자가 있느냐?”라고 묻자 부제학 류희춘이 “정탁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당대의 두 명현이었던 퇴계와 남명을 두루 사사한 정탁은 안으로는 남명의 굳건한 심성을 지니는 한편 밖으로는 퇴계의 온화한 기상을 품은 외유내강의 인물이었다.

정탁은 관직에 오른 뒤에도 두 스승에게 정기적으로 서신을 보내서 안부를 여쭈었다. 정탁이 마흔다섯 살이 되던 해,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서울에 있던 동문들은 김성일의 집에 모여서 슬픔을 달랬다. 정탁은 스승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바쳤다.

“주자의 물결을 거슬러 공자에게서 학문의 연원을 찾으니 학문의 도가 깊고 덕이 우뚝하여 세운 뜻과 공적이 탁월했네. 우리나라 천년 역사에 유학의 도가 이분에게 있었네. 아득히 살아 계실 때를 생각해보니 벼슬의 진퇴는 의리를 따랐으나 그 뜻과 시기가 어긋났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벼슬하지 않고 속세를 떠나 사는 아름다움이 있었네. 소자들은 공손히 책을 들고 나아가 아침저녁으로 친히 가르침을 받으니 그 은혜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리오.”

남명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정탁은 만시(輓詩)를 지어서 애도했다.

우러러 흠모하는 조 선생이시어(景仰曺夫子)
산림에 은거하시니 스스로 도가 높으시도다(林居道自尊)
조정에서 세 번이나 초빙해도 끝내 사양하시고(終辭三聘幣)
안빈낙도의 삶은 변치 않으셨네(不改一簞飧)
엄광의 절조를 붙잡아 일으키시고(扶起嚴陵節)
가의의 말처럼 편안하게 다스릴 대책 있었네(治安賈傳言)
만길 높은 뜻 두류산처럼 우뚝 서서(頭流萬仞立)
천년토록 사표로 남아 있으리라(千載典形存)

정탁은 퇴계의 제자 중에서 류성룡과 오랫동안 친분을 나누었다. 류성룡은 정탁보다 열여섯 살 아래여서 관직도 늦게 시작했지만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서 승진을 거듭했다. 정탁과 류성룡은 평시에는 태평성대를 위해 합심했으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국난 극복에 힘썼다. 임진왜란 때 류성룡은 선조를 모시고, 정탁은 세자를 모시면서 많은 활약을 했다.

1598년(선조 31년), 북인들이 류성룡을 탄핵했다. 명나라와 왜적의 화친 제안에 동의했다는 이유로 주전론을 주장하던 북인들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결국 류성룡은 영의정에서 물러나 고향 안동으로 낙향했다. 류성룡을 배웅하면서 정탁은 시를 남겼다.

큰 집이 기울어지던 날(大廈將傾日)
오로지 나무 한 그루만이 있었네(專心一木支)
홀로 뛰어난 것은 모든 이가 알고(獨賢衆人諳)
외로운 충성심은 임금도 안다네(孤忠聖主知)
오랜 친구 사이는 애가 끊기고(腸因舊好斷)
이별하려니 눈물만 늘어나네(淚爲新別滋)
어딜 간들 얼음과 서리가 없을소냐(何處氷霜路)
머나먼 길 천천히 떠나소서(迢迢獨去遲)

정탁은 국난의 와중에 고군분투했던 류성룡의 뛰어난 공로를 기리는 한편, 탄핵을 막아주지 못하는 자신의 슬픈 심정을 시로 표현했다. 아직 할 일이 많은 류성룡은 떠나고 늙은 자신은 남아 있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행간에 담아놓았다.

예천 청주정씨 재실의 이모저모. [사진=예천군청, 안동시청]
예천 청주정씨 재실의 이모저모. [사진=예천군청, 안동시청]

명재상의 마지막 길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일흔두 살의 정탁은 전쟁터로 나아가 군사들을 독려하려고 했으나 선조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극구 만류했다. 1598년 8월 18일, 조선 침공을 명령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하자 왜적이 철수함으로써 7년 동안 이어졌던 전란은 막을 내렸다. 11월 24일, 정탁은 영돈녕부사 이산해, 해원 부원군 윤두수(尹斗壽) 등과 함께 선조 앞에 나아가 전란이 종식되었음을 고했다.

1599년, 정탁이 노환 때문에 고향 예천에 내려와 있을 무렵 선조는 전란의 와중에 직분을 다하지 않고 달아났던 대신들을 벌하려고 했다. 그러자 정탁은 “이들을 벌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난리로 혼란한 와중에 잘못 알려진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난리를 극복하고 모두가 새 출발을 하는 마당인데 이들만 죄를 따진다면 경사스러운 분위기에 해를 끼치는 일입니다”라고 상소를 올렸다. 정탁의 의견이 옳다고 느낀 선조는 죄인들은 모두 풀어주도록 명했다.

1600년에 좌의정으로 임명된 정탁은 판중추부사를 거쳐 1603년 영중추부사에 이르렀으나 노환을 이유로 여러 번 사직을 청한 끝에 겨우 허락을 받았다. 1604년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605년 9월 19일, 정탁은 여든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선조는 매우 슬퍼하며 3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다. 성격이 원만하고 너그러웠던 정탁은 50년 동안 조정에 있는 동안 잘못한 일이 적었으며 적을 만들지 않았다. 경사(經史)는 물론이고 천문, 지리, 상수(象數: 『 주역(周易)』의 괘에 나타난 형상과 변화), 병법 등에 두루 해박했다. “선비가 병법을 모르면 큰일을 맡기에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팔진법(八陣法)과 육화진법(六花陣法)도 익혔다.

1613년 위성공신(衛聖功臣) 1등에 책록되고 영의정으로 추중되었다.

1635년 8월, 인조가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예천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약포집(藥圃集)』,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등이 있다.

* 참고자료
 『약포 정탁』, 「한국민족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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