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인 이채(李采, 1745~1820)가 야복(野服) 차림을 한 모습을 그린 반신 초상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작자 미상, 19세기 초, 비단에 채색, 99.2cm×58cm, 보물 제1483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의 문인 이채(李采, 1745~1820)가 야복(野服) 차림을 한 모습을 그린 반신 초상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작자 미상, 19세기 초, 비단에 채색, 99.2cm×58cm, 보물 제1483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초상화 속의 이채는 조선 시대 고위층 사대부들이 집에서 입던 편복 차림을 하고 있는데, 정자관(程子冠)을 쓰고, 심의를 입은 채 정면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두 손은 소매 속에 감추고, 복부 근처에서 모으고 있다. 정자관은 북송의 대유학자인 정자(程子)가 착용했던 관이라 하여 정자관이라고 부르는 2단으로 된 관인데, <이채 초상>을 그린 이는 정자관의 말총 올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또한 검은 깃을 댄 흰색의 심의에는 옷의 주름이 음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옷감의 재질까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초상화의 얼굴 표현을 통해 화가의 뛰어난 인물 묘사 능력을 볼 수 있는데, 이채의 얼굴을 그릴 때, 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물이 마르기 전에 안료를 칠해 농담의 차이를 두는 운염(暈染)법을 사용했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마주 대하는 느낌을 줄 정도로 생생하게 표현하였는데, 검은색 안료와 흰색 안료를 이용하여 가는 붓으로 이채의 풍성한 눈썹 숱을 표현했고, 갈색 물감으로 반원을 그려 눈꺼풀을 그리고, 잦은 붓질로 미세한 눈매의 주름을 표현하였다.

또한 눈동자 안쪽은 붉은색, 동공은 검은색, 홍채는 갈색으로 칠하여 눈빛의 총기를 살렸고, 오뚝하고 날카로운 콧날·깊은 눈매·입체적인 콧방울은 잔 붓질로 반복하여 그려서 입체감을 살려냈다.

구레나룻부터 턱 밑까지 난 수염도 터럭 한 올 한 올을 생생하게 그려 풍성한 수염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안면의 돌출 부분과 오목한 부분은 무수한 잔 붓질로 처리해서 피부 결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한편 이렇게 섬세하게 얼굴을 그린 것과 달리, 심의의 주름은 굵은 선과 음영 위주로 과감하게 처리하였다.

<이채 초상>은 세련된 기법으로 주인공의 모습을 당당하게 그린 까닭에, 조선 시대 사대부 초상을 대표하는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이 초상화에는 당대 최고의 문필가나 명필들이 이 그림을 본 뒤 느낀 감상이 남겨져있다.

초상화 상단 좌우에 적혀 있는 제발 중에서 화면 오른쪽 상단에 전서로 쓴 제발은 이채 본인이 지은 것을 이한진(李漢鎭, 1732~1815)이 쓴 자찬문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자관을 쓰고 주문공의 심의를 입고 꼿꼿하게 앉아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눈썹은 짙고 수염은 하얗고 귀는 높고 눈은 밝은 그대가 진정 이계량인가?

그 벼슬살이를 살펴보면 세 곳의 현과 다섯 곳의 주를 다스렸고,

그 공부한 것을 물어보면 사서와 육경이니 당대를 속이고 허명을 훔친 사람이 아닌가?

아! 그대 선조의 고향으로 돌아가 그대 선조(도암 이재)의 책을 읽는다면

그 즐거움을 알아 정주의 무리가 되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화천옹(이채)이 스스로 짓고 71세 된 노인 경산(이한진)이 쓴다.

― 조선미, 『한국의 초상화-형과 영의 예술』, 돌베개, 2009, 343~344쪽에서 인용.

왼쪽 상단에는 두 개의 찬문이 있는데, 위에 있는 것은 원교(圓嶠) 노인이 찬하고, 유한준(兪漢雋, 1760~1834)이 썼고, 그 아래에 있는 것은 조선 시대의 문장가인 유한준(兪漢寯, 1760-1834)이 짓고, 유한지(兪漢芝, 1760~1834)가 예서로 쓴 것이다. 두 찬문 모두 초상화의 주인공인 이채의 훌륭한 인품과 학식을 높이 평가하고, 이채의 인품과 학식이 이채의 조부인 도암 이재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 칭송하고 있다. 또한 찬문에는 이 초상화에 이채의 순수하고 깨끗한 성품이 잘 드러나 있다고 적혀 있다. 여기에서 찬문을 지은 원교 노인은 활동 시기로 볼 때, 조선 시대의 유명한 서예가인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아니라, 원교라는 호를 사용했던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이채의 조부인 도암 이재(陶菴 李縡, 1680~1740)를 그린 초상이라고 알려진 반신 초상화가 있다. 이채의 할아버지인 이재는 복건을 쓰고 심의를 입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이재 초상이라고 알려진 이 초상화도 이채의 또 다른 초상이라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두 초상화에 그려진 인물들이 이목구비, 검버섯, 점 등 세세한 부분까지 닮아 있고, <이재 초상>을 그리는 데 사용된 기법이나 안료가 도암 이재가 생존했던 시기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조선미, 『한국의 초상화-형과 영의 예술』, 돌베개, 2009, 346~347쪽 참조)

이채 초상 [작자 미상, 18세기, 비단에 채색, 97.8cm×56.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채 초상 [작자 미상, 18세기, 비단에 채색, 97.8cm×56.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채는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본관은 우봉(牛峰)이고, 자는 계량(季良(亮), 호는 화천(華泉)이다. 성리학자 이재(李縡 1680~1746)가 그의 조부이다. 이채는 1774년 사마시에 합격한 후, 벼슬에 나가 여러 관직을 거쳐 황주목사와 한성부 좌윤을 역임했다. 1790년 지레 현감으로 있을 때, 둑을 쌓아 농사에 도움을 주었는데, 주민들이 그가 쌓은 둑을 ‘이공제(李公堤)’라고 불렀다고 한다.

【참고문헌】 사람을 사랑한 시대의 예술, 조선후기의 초상화(이태호, 마로니에북스, 201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

한국의 초상화-형과 영의 예술(조선미, 돌베개, 2009)

한국의식주생활사전-의생활 편(국립민속박물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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