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사대부 문인 화가인 윤두서(尹斗緖, 1668~1715)가 그린 심득경(沈得經, 1673~1710)의 전신 초상화이다.그림 속의 심득경은 얼굴을 오른쪽으로 향하고 등받이가 없는 사각형의 의자에 앉아 있는데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평상시에 즐겨 쓰던 동파관(東坡冠)을 쓰고, 옅은 회색의 도포를 입었으며, 녹색의 세조대로 허리를 묶었다. 그가 쓰고 있는 관은 중국 송나라의 시인인 소동파가 썼던 관이라고 해서 동파관이라고 불렸는데, 내관과 외관이 겹쳐 있는 이중 형태이다. 그림의 주인공인 심득경은 두 손을 소매에 넣은 공수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가죽으로 만든 녹색의 태사혜(太史鞋)를 신고 있다. 신발 뒤축에 ‘태사문(太史文)’이라는 당초문 형태의 문양이 장식되어 있는 태사혜는 조선 시대 사대부가 평상복을 입을 때 신었던 신발이다.17세기 후반부터 등장한 유복(儒服) 차림의 문인 초상화들과 이 초상화를 비교해 보면 풍부해진 옷 주름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고종이 왕의 일상복인 황색의 곤룡포를 착용하고, 익선관을 쓰고, 주칠에 금색 장식이 달린 용상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어진이다.어진 속 고종은 화문석이 깔린 바닥에 놓인 의자에 앉아 붉은 색 족좌대 위에 두발을 올려놓았다. 황색 곤룡포 속엔 붉은색 받침옷을 입었고, 받침옷의 깃이 위로 올라왔다. 각대는 가슴까지 위로 올려 맸고, 왼쪽 옷자락을 접어서 각대에 끼워 붉은색 안감을 드러냈다. 얼굴과 몸은 모두 정면을 바라보고 있고, 두 손은 양쪽 무릎 위에 편안하게 올려놓았다.왼쪽 허벅지 위로 붉은색 술과 상아로 만든 호패가 보이는데, “임자생 갑자등국(壬子生 甲子登國)”이라고 적혀있다. 이는 ‘임자년(1852년)에 태어나 갑자년(1864)에 왕위에 오르다’는 뜻이다.이 어진은 표제가 없지만, “광무황제 사십구세어용(光武皇帝 四十九世御容)”이라는 표제가 있는 원광대 소장본 고종 어진과 전체적인 형식이 유사하여, 두 어진은 같은 초본을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조선 시대에는 나이가 많은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기로소(耆老所)라는 관청을 만들고, 70세 이상으로 정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전·현직 문관들에게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비록 특별한 직무를 맡은 것은 아니지만, 조선 시대 관리들은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더할 나위 없는 영예로 여겼다. 기로소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에 한 차례씩 기로소에 입소한 원로들을 예우하고 위로하기 위해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 잔치를 시대와 참석 범위에 따라 ‘기로연’ 또는 ‘기영회’라고 불렀다. 기영회가 열리면 임금이 직접 술과 악(樂)을 내려주었다.이 그림은 조선 선조 때의 기영회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그림의 격이 높고,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은 작품이다. 족자로 꾸며져 있는데, ‘기영회도’라고 제목이 쓰여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전서체로 쓴 ‘기영(耆英)’ 두 글자만이 남아 있고 ‘회도(繪圖)’ 두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제목 아래 화면은 크게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초상화 속의 이채는 조선 시대 고위층 사대부들이 집에서 입던 편복 차림을 하고 있는데, 정자관(程子冠)을 쓰고, 심의를 입은 채 정면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두 손은 소매 속에 감추고, 복부 근처에서 모으고 있다. 정자관은 북송의 대유학자인 정자(程子)가 착용했던 관이라 하여 정자관이라고 부르는 2단으로 된 관인데, 을 그린 이는 정자관의 말총 올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또한 검은 깃을 댄 흰색의 심의에는 옷의 주름이 음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옷감의 재질까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초상화의 얼굴 표현을 통해 화가의 뛰어난 인물 묘사 능력을 볼 수 있는데, 이채의 얼굴을 그릴 때, 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물이 마르기 전에 안료를 칠해 농담의 차이를 두는 운염(暈染)법을 사용했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마주 대하는 느낌을 줄 정도로 생생하게 표현하였는데, 검은색 안료와 흰색 안료를 이용하여 가는 붓으로 이채의 풍성한 눈썹 숱을 표현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길쌈은 부녀자들이 주로 가정에서 하던 일로, 삼(麻)·모시·목화·누에 등에서 실을 뽑아 삼베와 모시, 무명, 명주 등의 천을 짜는 전 과정을 말한다. 길쌈은 크게 실잣기와 천짜기 두 가지 공정으로 나뉘는데, 원재료의 종류에 따라 실을 잣는 방법도 달랐다. 조선 시대에 가장 대표적으로 사용됐던 천으로는 비단·삼베·모시·무명이 있는데, 이 가운데 고려 말에 중국에서 전래된 무명이 생산 과정이 간단하면서도 보온성이나 내구성이 뛰어나 가장 많이 생산되는 일반적인 옷감이 되었다.이 그림은 길쌈의 두 가지 공정을 위아래 2단으로 배치한 뒤, 전체 구도를 ‘S’자 모양으로 역동적이게 구성하였다. 또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은 크게 그리고 먼 곳에 있는 사람은 작게 그리는 원근법을 사용하여 심도 깊은 화면을 보여준다.위쪽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여성은 실에 풀을 먹이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이 일은 베매기라고 하며 이렇게 풀을 먹인 실이 날줄이 된다. 본격적으로 옷감을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어진이다.태조는 조선을 개국한 시조로서의 상징성이 있었으므로 조선 왕실에서는 특별히 국초부터 태조 어진을 제작하여 여러 곳에 나누어 봉안해왔다. 공식적으로 서울의 문소전을 비롯하여 경주·개성·평양·전주·영흥의 여섯 곳에 건물을 지어 태조 어진을 봉안했고, 이후에도 많은 태조 어진이 제작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전해지고 있는 태조 어진은 전주의 경기전에 봉안된 한 점뿐이다. 과거에는 어진이 낡고 오래되면 다시 그려 보관했는데, 이 어진 역시 고종 9년(1872)에 새로 이모한 어진이다.익선관을 쓰고 푸른색 곤룡포를 입은 태조는 두 손을 소매 속에 넣고 용상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곤룡포 속에 입은 포의 깃이 목 위로 바짝 올라와 있어 경건하고 엄숙한 느낌을 준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어진 이모 당시 흰색 비단에 써서 붙인 ‘태조대왕어용 소자사복지구년 임신 이모(太祖大王御容 小子嗣服之九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는 이원(梨園), 즉 장악원(掌樂院)에서 열린 기로회 장면을 그린 기록화다. 버드나무 늘어진 아름다운 봄날, 스물 한 명의 노인이 한자리에 모여 잔치를 열었다. 이들이 잔치를 연 곳은 조선 시대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과 무용을 관장하던 장악원, 다른 말로 이원이라 부른 관청 내 누정이다. 이 잔치에 참석한 인물들은 전 장악원 도정 홍수렴을 포함하여 모두 21명으로, 65세부터 85세까지 20년을 아우르는 연령대의 노인들이다. 이들은 5품에서 6품의 관직을 역임했다. 조선 초기만 해도 기로회는 전·현직 고위 관리들의 공적인 모임이라는 성격이 강했는데, 18세기가 되면서 사적인 모임으로 성격이 변하고, 참여 범위도 확대되었다. 원래 ‘기로(耆老)’는 퇴임하거나 나이 든 관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18세기 이후에는 일반 사대부 노인들을 지칭하는 말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일반 노인들의 모임도 아취를 가미하여 기로회라고 부른 것으로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은 겨울철 야외에서 난로를 피우고 고기를 구어 먹는 장면을 그린 작자 미상의 풍속화다. 이 그림은 모두 8폭으로 구성된 풍속화 병풍 가운데 한 폭이다. 이 그림이 들어 있는 풍속화 병풍은 단원 김홍도가 그린 《행려풍속도병(行旅風俗圖屛)》과 유사하지만, 기방에서의 싸움 장면, 길거리에서의 호객 장면 등 기방 풍속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겨울날, 계곡의 소나무 아래 여러 명의 남자들이 기생들과 어울려 자리를 깔고 난로에 불을 피웠다. 차가운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기 위해 깔아둔 자리 위에 털방석도 준비하였다. 그런데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여섯 명인데 털방석은 두 개만 준비되었다. 제일 큰 것은 모임을 주최한 것으로 보이는 나이 든 인물이 차지했고, 나머지 하나는 등을 보이고 앉은 기생이 깔고 앉아 있는데, 이는 옆자리의 노인이 기생의 환심을 사보려고 그녀에게 양보한 것으로 보인다. 겨울철 야외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으려면, 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