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스토리]

이기영 논설주간

오는 4일 한국에서 치러질 예정이던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SAT)이 갑자기 취소됐다. 이 시험을 주관하는 비영리기관 칼리지보드는 “한국에서 치러질 시험 내용이 이미 많은 학생들에게 유출돼 시험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착실하게 시험을 준비해왔던 상당수 학생들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았다. 6월 달 시험은 예정대로 열린다고 하지만, 한 치 앞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다른 나라로 가서 시험을 보겠다는 학생들도 있다. 일부 업체와 불법에 공모한 범죄자들 때문에 제대로 나라 망신을 당했다.

SAT 문제 유출은 올해가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07년엔 학원 강사 일당이 태국에서 먼저 시험을 치른 뒤 한국으로 문제를 전송한 사실이 적발돼 한국 수험생 900여명의 성적이 모조리 취소됐다. 2010년에도 SAT 문제 유출 의혹이 불거져 경찰이 수사를 벌였다. 올 들어선 지난 2월 일부 어학원이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동남아에서 문제를 미리 빼내다 적발돼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이런 가운데 또다시 비슷한 일이 반복된 것이고 급기야 시험을 취소시켜버렸다. 사상 초유의 일이다. 한국인으로서 얼굴을 들 수 없는 일이다.

SAT는 미국 대학 수능이지만 우리나라와 달리, 전 세계 수십개국에서 동시에 치러지는 국제적인 시험이다. 여기에 착안해, 시차를 이용해서 문제를 빼내는 일이 계속해서 우리나라에서만 반복되고 있으니 나라 망신도 이런 나라 망신은 없다. SAT 문제 유출이 반복되는 것은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대한민국의 비정상적인 분위기 때문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했던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집권 5년 내내 청와대부터 공직사회가 천문학적인 비리를 저질러 온 나라가 비리 공화국으로 탈바꿈한 까닭에, 국민의식도 딱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

부정행위를 통해서라도 고득점을 받겠다는 학생과 학부모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돈이 많은 자본가들은 “얼마든지 돈을 지불하겠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약자와 서민들은 꿈도 꿀 수 없는 노릇이다. 돈 벌 욕심에 눈이 멀어 분탕질 하는 것은 대통령 친인척 뿐 아니라 학원들도 마찬가지다. 마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첩보작전 수준의 수법으로 문제를 빼낸다고 한다. 국내적 범죄가 아니라 국제적인 부정행위를 서슴지 않는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외국에서는 한국을 ‘불법 공화국’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SAT 문제 유출 파문은 이처럼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중차대한 사안이다. 이미 많은 한국 학생들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거나 미국 대학 입시를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들 한국 학생 중 일부는 분명히 부정행위를 통해 미국 대학에 합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인식이 만약 미국 현지 사회에 확산된다면 그 피해는 수치로 계산조차 어렵다.

가장 큰 걱정은 미국 대학들이 한국 학생을 선발할 때 “당신도 혹시…”라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이후 한국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까지 추락한 상황에서 이번 SAT 문제 유출 파문까지 겹쳐진다면 한국은 ‘신뢰성 제로의 나라’라는 인식이 더욱 팽배해질 것이다. 수단 방법을 안가리고 비리를 저질러 재산을 착복하겠다는 정권의 핵심 세력들이나, 수단 방법을 안가리고 높은 점수를 받겠다는 일부 국민이나, 이런 몰상식한 사람들 때문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는 건 사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게 죄일 뿐이다. 자업자득이다.

다만 한국인으로서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다시는 나라 망신을 당하는 일이 벌어져서는 절대 안된다는 점에서 SAT 문제 유출 관련자들은 샅샅이 찾아내 엄벌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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