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590년(선조 23년) 3월, 천지에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 서울을 떠나 머나 먼 남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으로 구성된 조선통신사 일행이 산 넘고 물 건너 일본으로 가는 길이었다.1479년(성종 10년)에 떠났던 조선통신사가 일본 내부의 사정 때문에 제대로 일을 보지 못하고 돌아온 이후 110년 만의 파견이었다.1443년(세 종 25년) 정사 변효문, 부사 윤인보, 서장관 신숙주 등이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것부터 따지면 147년 만의 일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의 조선 통신사 파견이었다. 때문에 이들의 임무는 막중했고 어깨는 무거웠다.일본으로 떠나는 세 사람조선 초기 외부로부터의 가장 큰 위협은 북쪽 국경지방에 출몰하는 여진족과 남서 해안에서 노략질을 하는 왜구였다.여진의 침입에 대비해서 세종은 김종서에게 6진을 개척하도록 했다. 왜구 문제 해결을 위해서 이 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하도록 했다.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519년(중종 14년)에 일어난 기묘사화에 휩쓸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지내던 권별은 1533년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으로 임명되어 14년 만에 조정으로 복귀했다. 이후 밀양부사, 한성부좌윤, 경상도관찰사, 형조 참판, 병조참판,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했다. 1539년 7월에는 종계변무(宗系 辨誣: 조선 건국 때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 동안 명나라에 잘못 기록되어 있는 이성계의 가계를 고쳐달라고 사신을 보내 주청하던 일)를 위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나라를 방문했다가 이듬해 2월에 돌아왔다.율곡 이이, 권벌의 절개를 칭찬하다1540년에는 병조판서, 한성부판윤을 지냈으며 1541년에는 예조판서, 의정부좌참찬, 1542년에는 장령을 거쳐 1544년에 다시 의정부좌참찬, 1545 년에 의정부우찬성에 올랐다. 그해 7월 명종이 열한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권벌은 어린 임금을 보필하는 원상으로 임명되었다. 1545년 8월, 소윤 일파가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478년(성종 9년) 11월 6일, 권벌은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도촌에서 아버지 권사빈과 어머니 파평 윤씨의 4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 훤정(萱亭), 송정(松亭)이고 시호는 충정(忠定)이다.열아홉 살에 과거에 합격한 수재권벌 집안이 도촌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 권사빈 때부터였다. 권사빈의 외가인 서원 정씨들이 도촌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권벌의 어머니는 영원부원군 윤호의 형인 윤당의 딸 파평 윤씨였다. 윤호는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의 아버지였으므로 권벌의 어머니와 정현왕후는 사촌자매 사이였다.권벌은 안동 권씨 판서공파에 속했다. 판서공파의 시조는 권벌의 5대조 권인이다. 판서공파는 권인 때부터 중앙권력이 바뀔 때마다 권력을 좇기보다는 의리를 좇아서 은거하는 전통이 있었다. 권인은 고려가 망하자 안동시 서후면 교리에 은거했다. 태조와 이방원(훗날 태종)이 여러 차례
[뉴스퀘스트=(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김담은 1445년 이조정랑을 거쳐 제언종사관으로 임명되어 이순지와 함께 언제 공사(堰堤工事)에서 계산을 맡았다. 1447년 승문원부교리로 있으면서 『전부구등지법(田賦九等之法)』을 편찬했으며, 1448년 천변지이(天變地異)를 관측해서 기록하고 역서를 편찬하며 절기와 날씨를 측정하고, 시간을 관장하던 관청인 서운관(書雲觀) 책임자가 되었다.부친상을 맞자 여섯 차례나 상소하다그 무렵 김담은 문과 중시(重試: 과거 급제자를 대상으로 치르는 시험)에 응시했는데,을과 1등 3명 가운데 2등을 차지했다. 이때 1등은 성삼문(成三問)이었고 3등은 이개(李塏)였다.을과 2등 7명은 신숙주(申叔舟), 최항(崔 恒), 박팽년(朴彭年), 유성원(柳誠源) 등이었다. 당대의 수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김담의 학문은 뛰어났던 것이다.1449년(세종 31년) 1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김담은 3년 동안 시묘를 살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해 5월, 세종은 국사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434년(세종 16년), 세종은 이순지(李純之)를 천문역법 사업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순지의 본관은 양성(陽城)이며 자는 성보(誠甫)로, 1427년(세종 9년) 문과에 급제했다. 문관 출신이었지만 서울의 위도를 정확하게 계산해 낼 정도로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이순지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세종이 야심차게 추진하는 과학 프로젝트를 총괄 지휘하게 된 것이었다.이순지와 함께 『칠정산 내외편』을 완성1435년(세종 17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이순지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삼년상을 치르기 위해서 관직을 떠나게 되었다. 세종으로부터 후임을 천거하라는 명을 받은 승정원은 집현전 정자로 있던 김담을 ‘나이가 젊고 총민(聰敏)하고 영오(潁悟)하므로 맡길 만한 사람’이라면서 추천했다.그러나 세종은 관직을 시작한 지 겨우 1년밖에 되지 않은 새파란 나이의 김담만으로는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삼년상을 치르고 있던 이순지를 정4품으로 승진시키면서 1년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435년(세종 17년) 12월의 어느 추운 날, 집현전(集賢殿) 정자(正字: 정9품) 김담은 연신 손을 비비면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올 겨울은 유난히 쌀쌀했다. 손이 곱아서 책장을 넘기는 게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김담(金淡)은 전혀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부러워하는 집현전에 근무하기 시작한 게 불과 1년 전이었다. 과거에 합격하자마자 곧장 발탁되어 집현전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었다.별을 헤아리는 남자집현전은 조선시대 학문 연구를 위해서 궁중에 설치한 기관으로, 학자를 양성하고 문풍을 진작하는데 주력했다. 세조부터 성종에 이르는 조선 초기의 정치, 사회, 문화의 제도를 마련하고 이끌어간 대신들은 대부분 집현전 출신이었다.특히 세종은 민족문화를 창달하는 기관으로서 집현전을 매우 중요시했다. 뛰어난 인재를 집현전에 많이 배속했으며, 일단 집현전에 소속되면 다른 관직으로 옮기지 않고 계속 머물면서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