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차 문화를 엿보다

고사자오도[작자미상, 고려, 견본채색, 日本 幽玄齋 소장]
고사자오도[작자미상, 고려, 견본채색, 日本 幽玄齋 소장]

[뉴스퀘스트=최혜인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연구원] 우리나라에서 차 문화는 고려(918~1392)시대에 들어 활짝 개화했다. 7세기 도당구법승(渡唐求法僧)들에 의해서 소개된 선종 수행승들의 차 문화는 신라 말~고려 초에 구산선문이 개창되면서 확산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태조 왕건 이래 불교가 국교로 숭상됨으로써, 차는 국가와 사찰을 중심으로 수요가 더욱 확산되었다. 최승로(崔承老, 927~989)의 「시무28조」를 보면 국가가 주관하는 대규모 불교의식에서 왕이 직접 차를 준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차가 종교를 넘어 국가 권력의 상징물로서 인식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왕실이 차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면서, 고려는 차 문화가 성행할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고사자오도>라는 그림이 있다. 커다란 소나무가 아름답게 드리우고 대나무가 둘러 있는 곳에 6명의 인물들이 둥그렇게 모여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고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 소나무 아래 붉은색 탁상에는 여러 기물들이 올려 져 있다. 투호화살이 가지런히 놓인 투호통도 보이는데, 투호는 고려시대에 즐긴 유희의 한 가지였다. 찬찬히 그림을 감상하다보면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있다.

세 발 달린 풍로 앞에서 단선(團扇)을 들고 있는 한 사내이다. 풍로 위에는 주전자가 올려 져 있다. 이 모습은 찻물을 끓이고 있는 모습이다. 그의 주변에는 여러 가지 도구들이 있고,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서 그 용도를 살펴볼 수 있다.

장방형 탁자 위에 단차(團茶)를 미세한 가루로 내기 위한 다연(茶硏)이 놓여있고, 그 뒤에는 찻물을 담는 수앵(水甖)이 있다. 차 가루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다음, 이를 휘젓는 데 사용되는 다구인 다전(茶筌, 다선(茶筅)이라고도 함)이 보인다. 주칠(朱漆)된 잔탁이 5겹으로 쌓아져 있고, 흰 다건(茶巾)이 걸려 있다. 이것은 모두 점다법(點茶法)으로 마실 때 사용되는 다구들이다. 점다법은 고운 차 가루가 담긴 다완에 뜨거운 물을 부어가며 다말(茶沫)을 내 마시는 탕법이다.

동시기에 같은 문화권인 송나라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차를 마셨다. 앞서 살펴본 휘종의 <문회도>나 <투다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송대 심안노인(審安老人)이 지은 『다구도찬(茶具圖贊)』(1269년)이라는 책은 그 당시 점다법에 사용되는 다구 12종을 그림과 함께 소개하고 있는데, <고사자오도>에 등장한 다구들과 대조해보면 그 모양새가 매우 유사하여 흥미롭다. 이를 통해 고려와 송나라의 상호 활발한 차 문화교류를 짐작해볼 수 있다.

두 나라의 차 문화 교류는 문헌기록 곳곳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문종 32년(1078년)에 송나라 사신이 가져온 물품 목록 중에 용다(龍茶) 5근과 봉다(鳳茶) 5근이 있다. 당시 용봉단차는 북원(北苑)에서 난 최상급 연고차로서 생산량이 얼마 되지 않는 고급차였다. 고려인들은 이를 매우 귀하게 여겼다. 1123년에 고려를 다녀간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내용을 보면, 사신들과 고려 관료들이 차를 마시고 바둑을 두며 종일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수준 높은 차 문화를 서로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사자오도>는 고려의 수준 높은 차 문화가 담겨있는 동시에 그 시대가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차 문화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6명의 인물들이 풍류를 즐기고 그 가운데서 차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 어느 원림(園林)에서 열린 아회(雅會)의 한 장면 같다. 아회는 3인 이상이 모여 풍류를 즐기는 우아하고 고상한 모임이다.

아회에 참여한 이들은 상산사호(商山四皓), 죽림칠현(竹林七賢)과 같은 은일지사들의 삶을 지향하며, 속세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오래된 기물을 완상하고 시를 짓고, 음악을 감상하며 차를 마시는 것은 내면의 자유로움을 추구했다.

최혜인 연구원
최혜인 연구원

고려 문인 임춘(林椿, 1148~1186)은 「사료혜수좌혜량(謝了惠首座惠糧)」『서하집(西河集)』권3 에서“… 느긋하게 허리끈 풀고 배불리 (밥을)먹고 일곱 잔의 좋은 차 마시니 더욱 족하여라. 겨드랑이 사이에 솔솔 맑은 바람 일어나니 이 세상 벗어나 하늘을 나는듯 하구나(緩帶甘飡若塡塹 七椀香茶飮更足 習習淸風兩腋生 乘此朝眞謝塵俗)”라고 하였다. 이처럼 차는 그들의 이상적인 세계를 구현하는 도구로서 인식했던 것이다.

그림 속 인물이 되어 상상해보자. 시원한 소나무 아래서 찻물이 끓는 소리를 들으며 벗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힘든 일상에서 잠시나마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