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열 살 무렵부터 김성일은『소학』,『사서』,『시경』등 유교의 기본경전을 공부하면서 학문의 토대를 쌓았다.열일곱 살 무렵에는 맏형의 부임지에 따라가서 공부를 했으며, 열아홉 살 무렵에는 세 살 아래 동생 김복일과 함께 풍기의 소수서원에 가서 공부를 했다.그때 소수서원에는 퇴계의 제 자 황준량(黃俊良)이 있었다. 황준량은 학식이 높기로 소문이 난 인물이었다.그에게서 퇴계의 명성을 전해들은 김성일은 퇴계를 흠모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정진하여 점점 공부가 깊어지던 어느 날, 김성일은 책을 덮으며 탄식을 했다.퇴계의 3대 제자가 되다“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과거를 보기 위한 공부만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천지만물의 이치와 자기 자신의 본질을 깨우치는 학문을 모르고 어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김성일은 집으로 가서 아버지에게 말했다.“우리나라 최고의 스승이신 퇴계 선생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흔쾌히 허락하자 김성일은 동생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1556년 스물세 살이 된 권문해는 경북 안동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았다.당시 퇴계의 문하에 있던 서애 류성룡, 학봉(鶴峰) 김성일 등과 친교를 맺고 평생에 걸쳐 우정을 나누었다.퇴계는 권문해에게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손수 써주면서 학문에 정진할 것을 당부했다.「숙흥야매잠」은 중국 송나라 때 학자 진백(陳栢)이 지은 것으로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면서 부지런히 수양하라’는 심신수양의 구체적 실천방법을 제시한 글이다.퇴계가 손수 적은 글을 제자에게 내리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퇴계는 권문해의 자질을 알아보고 기대를 품었음을 알 수 있다.유교, 불교, 도교를 통섭적으로 수용하다156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한 권문해는 1562년 겨울 안동 향교의 교수로 있을 때 계상서당으로 퇴계를 찾아가서 한 달 동안 머물기도 했다.퇴계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스승을 기리는 일에 적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세자를 모시고 영변으로 피신해 있던 정탁은 이여송의 군영을 출입하면서 평양성 탈환 작전을 수립하는 데 협조했다. 마침내 평양성을 탈환하자 종묘사직에 제사를 올리고 평양을 수복했음을 고했다. 이어 세자를 모시고 평안도 정주로 가서 선조를 알현하고 이 기쁜 소식을 아뢰었다.국란 속에서 빛난 원로의 역할평양성을 탈환한 이여송은 곧장 남하하여 개성을 향해 쳐들어갔다. 그러자 개성을 지키던 왜장 고바야가와는 싸우지도 않고 서울로 퇴각해버렸다. 그러자 왜군을 가볍게 여긴 이여송은 곧장 그 뒤를 쫓아서 서울로 향했다. 이여송 부대가 서울 북쪽 40리 지점 벽제관(碧蹄館) 남쪽 여석령(礪石嶺)에 이르렀을 때 매복하고 있던 왜군이 기습공격을 했다. 이 싸움에서 크게 패한 이여송은 황급히 개성으로 후퇴하고 말았다.평양성 패배로 사기가 크게 꺾여 있던 왜적은 여석령 전투(또는 벽제관싸움)에서 거든 승리로 기세가 되살아났다. 이때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기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이황학 연구의 권위자인 이상은 박사는 이황의 생애를 수학기, 출사기, 강학기로 나누었다. 태어나서 서른세 살이 될 때까지를 수학기, 문과에 급제한 서른네 살부터 풍기군수에서 막 퇴임한 마흔아홉 살까지를 출사기,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 교육에 전념하던 쉰 살부터 임종할 때까지를 강학기로 구분했다. 이황이 자신의 철학을 완성하고 중요한 저술을 집필한 것은 대부분 강학기에 이루어졌다.이황이 강학기였던 쉰세 살에 완성한 「천명신도(天命新圖)」는 성리학의 이론체계를 천명을 중심으로 한 장의 그림에 담은 것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과 우주의 관계를 밝히려고 시도한 「천명신도」는 정지운(鄭之雲:1509~1561)의 「천명도」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이황 철학의 근본은 사람이 중심이 되는 세계관이다. 이황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사회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사회이며 인간의 도덕이 통용되는 사회였다. 「천명신도」는 그러한 이황의 철학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이황이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스물한 살이 되던 해 이황은 결혼을 했다. 상대는 진사 허찬의 딸인 동갑내기 김해 허씨였다. 김해에 살다가 고성을 거쳐 의령에 정착한 허씨의 집안은 크게 출세한 인물은 없지만 향리에서 덕망을 얻고 있었다.이황이 스물세 살 되던 해 가을에 첫 아들 이준이 태어났다. 스물네 살이 되던 해, 이황은 세 차례나 과거에 응시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훗날 대학자가 되어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이황이 과거시험에 여러 번 떨어졌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이는 어쩌면 이황은 천재형 학자가 아니라 노력형 학자였는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비록 출발은 더디었지만 나중에는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높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으니 말이다.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 이황은 비로소 소과에 합격을 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에는 문과, 무과, 잡과, 그리고 생원시와 진사시가 있었다. 문과와 무과, 또는 이 양과를 합쳐서 대과라고 했고, 생원시와 진사시는 소과라고 했다. 잡과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558년(명종 13년),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에서 학문 연마와 후진 양성에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30대 초반의 젊은이가 찾아왔다. 전라남도 나주 출신의 기대승(奇大升)이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가던 길에 이황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당시 이황의 나이는 쉰여덟 살이었다. 비록 자식뻘이었지만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학식이 뛰어나고 인품도 훌륭하다는 걸 알게 된 이황은 기대승을 정중하게 대했다.얼마 후, 기대승은 문과에 급제했고 그 소식을 들은 이황은 기대승에게 축하와 격려의 편지를 보냈다. 한참 어린 선비에게 당대의 대학자가 먼저 편지를 보낸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이황이 기대승을 인정했다는 뜻이자 사람을 격의 없이 대하는 이황의 인품을 알 수 있는 일화이다.이때부터 시작된 이황과 기대승의 관계는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두 사람의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