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인의 길로 들어서다[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 대동악극단 공연을 1년 정도 따라다닌 뒤 박귀희는 악극단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대구에 머문다.이때 박귀희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 하나 더 보태진다. 대구에서 가야금병창의 명인이었던 강태홍(姜太弘)을 만난 것이다. 강태홍은 전남 무안 세습무가(世襲巫家) 집안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부터 가야금을 배웠으며, 가야금산조의 창시자로 알려진 김창조(金昌祖)에게서 가야금을 전수받았다.가야금병창은 가야금을 타면서 노래를 하는 것이다. 창(唱)이 주가 되고 가야금이 부(副)가 된다고 할 수 있지만 줄은 줄대로 잘해야 하고 창은 창대로 잘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가야금 산조와 가야금 병창은 모두 19세기 중반 이후 정립된 것으로 김창조와 박팔괘 등을 그 원조로 삼는다.이화중선의 눈에 든 것이 박귀희에게 하나의 행운이라면 마침 대구에서 사범을 하던 강태홍에게 가야금병창을 사사받을 수 있었던 것도 박귀희에게는 또 하나의 행운이었다. 박귀희는 강태홍에게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고려 무신정권 때부터 시작된 팔경의 유행은 조선 개국 초 정도전에 의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정도전, 조준 등의 신흥사대부 세력은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라는 맹자의 말을 모토로 삼아 왜구의 침입, 권문세가의 착취, 토지제도의 모순 등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고자 이성계를 앞세워 역성혁명에 성공한다. 당시 역성혁명파의 성리학은 실용적 경세지학이었던 것이고, 그들은 곧 새로운 국가 수립에 착수한다.정도전은 당시 새로운 수도 한양 건설의 책임자이기도 했다. 정도전은 경복궁, 근정전, 숭례문 등의 한양 도성의 궁궐이나 사대문 이름을 짓고 한양 주변의 도성을 설계하고 공사 책임을 맡았다. 한양을 5부로 나누고 52방의 동네로 구획하여 여러 관청을 들어서게 하고 52방의 이름을 지은 것도 바로 정도전이다. 지금도 남아있는 가회동이니 안국동이니 하는 지명이 바로 그때 탄생했다.이성계와 건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석북 신광수는 50세가 되어서 처음 관직에 오른다. 영릉(寧陵:효종의 능)을 돌보는 참봉으로 종 9품 벼슬이었다. 그야말로 뒤늦게 겨우 미관말직의 벼슬자리를 하나 받은 셈이었다. 하지만 한양 풍류가에서 석북은 시로 명성을 제법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석북이 지은 시로 가객 이응태에게 주는 시가 있는데 바로 그러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증가자이응태((贈歌者李應泰)당대의 명창 이세춘이십년동안 한양사람들을 경도시키네청루에 협소들은 능히 창을 전하고백수로 강호에서 신가락을 움직이네9월9일 국화꽃이 벽사를 찾고한 잎 배 옥피리로 섬강을 올라와영동에 와 놀며 내 시를 많이 얻어가또 장안 안에 이름을 가득 퍼뜨리겠구나(當世歌豪李世春 十年傾倒漢陽人 靑樓俠少能傳唱 白首江湖解動神 九日黃花看甓寺 孤舟玉笛上蟾津 東游定得吾詩足 此去聲名又滿秦)능지기라는 게 사실 별 할 일 없는 자리다. 여주에서 능지기를 하면서 석북은 늘 그랬듯이 소일거리로 시를 지었는데, 몇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국악에서 민요로 분류되는 노래 중에 작사가와 작곡자가 알려져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시조나 가곡의 경우, 시조시(時調詩)를 노랫말로 하고 있기에 작사가가 알려져 있는 경우는 상당히 많지만, 일반 민요의 경우 자연스럽게 발생하여 구전되어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작곡자는 거의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서도 시창(詩唱)으로 분류되는 의 경우 예외적으로 신광수 작사, 평양 기생 모란 작곡으로 추정된다.는 조선 영조 때의 문인 석북 신광수(石北 申光洙:1713-1775)가 과거 때 시험 답안으로 제출한 시이다. 모두 44구의 칠언(七言)으로 상당히 긴 시이다. 원제목은 이었고 1746년(영조 22년) 가을에 시행된 한성시(漢城試)에서 2등에 오른 작품이다. 이 시는 당나라 시대의 시인 두보(杜甫)가 만년에 천하를 유랑하다가 악주(岳州)의 악양루에 올라 안녹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서도소리란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발달한 우리의 전통 소리를 말한다. 서도소리에는 민요, 잡가, 입창(立唱), 재담소리, 송서(誦書), 시창(詩唱)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서도소리의 대표는 역시 다. 노랫말은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하고 사랑하는 임을 그리워하는 것이 주를 이룬다. 의 유래에 대해서는 서북인의 차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병자호란 때의 기생 부용이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노랫말을 살펴보면 시(詩)에서 여기저기 두서없이 차용한 흔적이 보이는 점, 한문 문투의 혼합적 사용이 보이는 점 등으로 보아, 오랜 세월에 걸쳐 평양 지방을 중심으로 기방(妓房) 등에서 구전되면서, 소리하는 자에 따라 변형되고 증편에 증편을 거듭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때문에 처럼 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 지방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 오래도록 구전되면서 발전을 거듭해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현재의 서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중학교 때이던가? 음악 시간이면 선생님은 피아노를 치고 아이들은 한 소절씩 따라서 노래를 불렀다. “성문 앞 샘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로 시작되는 노래를 배운 기억도 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찾아보니 이 노래는 독일 시인 빌헬름 뮐러의 ‘겨울 나그네’라는 연작시에 역시 독일의 작곡가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연가곡 중의 하나라고 되어 있다. 초등학교 때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와 같은 여러 동요를 배우다가 중학교 음악 시간에 ‘가곡’을 배우기 시작했던 것이다.“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 가안다/ 물 맑은 봄 바다에 배 떠나 간다...”와 같은 ‘사공의 노래’나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와 같은 ‘동심초’도 배웠던 기억이 난다. 학기말이 되면 음악은 실기 시험이 있어 노래 연습도 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 학교에서 배운 가곡들은 음과 노랫말이 기억이 난다.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여러 연주자가 서서 소고를 두드리며 합창을 노래를 부르는 를 처음 보고 들었을 때, 참 특이한 노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판소리나 다른 국악의 소리를 연희하는 방식보다 우선 물량적으로 많은 사람이 동원되는 것이니 만큼, 원래 노래하는 주체가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일반적인 서도소리나 경기소리와는 상당히 다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가 하는 생각으로 와 이와 흡사한 방식으로 연희되는 의 노랫말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에 대한 의문은 점점 호기심과 흥미의 대상으로 다가왔다. 의 노랫말을 보면 참으로 이채롭다. 에는 여러 원본 시가(詩歌)가 다채롭게 들어있는 것이 발견된다. 는 네 곡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연곡 형식인데, 이 네 곡은 각각 , , , 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중 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