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단원풍속도첩》에 실려 있는 풍속화로, 단원 김홍도가 동네 우물가에서 일어난 일을 포착하여 재미있게 그려낸 작품이다.그림 속에는 아낙네 둘이 물을 긷고 있고, 지나가던 남자 한 사람이 물을 얻어 마시고 있다. 이 남자는 갈증이 심한지 두레박 채로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데, 챙이 넓은 갓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분이 낮아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웃옷을 다 풀어 헤쳐 가슴 털을 고스란히 노출시키고 있다.이 사내가 입은 옷은 철릭으로 왕을 비롯하여 문관이나 무관 모두 융복(戎服)으로 착용하였으며, 하급 관료·악공·무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겉옷으로 즐겨 입었다. 조선 후기의 철릭은 포의 끝자락까지 주름을 잡은 형태여서 주름치마와 유사하였다.사내에게 두레박을 건네주는 고운 얼굴의 여인은 차마 사내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얼굴을 돌렸고, 다른 여인도 우물에만 시선을 고정시켜 남성의 행동을 일부러 외면하고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김홍도와 이명기가 합작해서 그린 서직수(徐直修, 1735~?)의 전신 입상 초상화이다.초상화의 주인공인 서직수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평상시에 썼던 이중관 형태의 쓰개인 동파관(東坡冠 :송나라의 시인인 소식이 썼다고 해서 그의 호를 따 동파관이라고 한다)을 쓰고 검은색 띠(광다회·廣多繪·넓고 크게 짠 끈목)를 두른 미색의 도포를 입었는데 소매통의 폭이 매우 넓다.초상화 속 서직수는 두 손을 소매 속에 넣어 밑으로 내려 마주잡고 있으며, 신을 신지 않은 버선발로 오른쪽을 보며 서 있다. 머리에 쓴 동파관은 음영의 차이를 두고 채색되어 입체감이 두드러지며, 전체적으로 옅은 살구색으로 채색된 얼굴은 외곽선과 이목구비에 잔 붓질을 많이 해서 윤곽이 뚜렷하게 나타난다.눈썹은 골격대로 위로 올라갔으며, 눈꺼풀에도 음영의 차이가 보인다. 쌍꺼풀은 굵은 선으로 그려 눈매가 뚜렷하게 완성되었고, 눈 앞머리 부분은 붉은색, 동공은 검은색, 홍채 주변은 금색과 청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고종이 왕의 일상복인 황색의 곤룡포를 착용하고, 익선관을 쓰고, 주칠에 금색 장식이 달린 용상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어진이다.어진 속 고종은 화문석이 깔린 바닥에 놓인 의자에 앉아 붉은 색 족좌대 위에 두발을 올려놓았다. 황색 곤룡포 속엔 붉은색 받침옷을 입었고, 받침옷의 깃이 위로 올라왔다. 각대는 가슴까지 위로 올려 맸고, 왼쪽 옷자락을 접어서 각대에 끼워 붉은색 안감을 드러냈다. 얼굴과 몸은 모두 정면을 바라보고 있고, 두 손은 양쪽 무릎 위에 편안하게 올려놓았다.왼쪽 허벅지 위로 붉은색 술과 상아로 만든 호패가 보이는데, “임자생 갑자등국(壬子生 甲子登國)”이라고 적혀있다. 이는 ‘임자년(1852년)에 태어나 갑자년(1864)에 왕위에 오르다’는 뜻이다.이 어진은 표제가 없지만, “광무황제 사십구세어용(光武皇帝 四十九世御容)”이라는 표제가 있는 원광대 소장본 고종 어진과 전체적인 형식이 유사하여, 두 어진은 같은 초본을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조선 시대에는 나이가 많은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기로소(耆老所)라는 관청을 만들고, 70세 이상으로 정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전·현직 문관들에게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비록 특별한 직무를 맡은 것은 아니지만, 조선 시대 관리들은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더할 나위 없는 영예로 여겼다. 기로소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에 한 차례씩 기로소에 입소한 원로들을 예우하고 위로하기 위해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 잔치를 시대와 참석 범위에 따라 ‘기로연’ 또는 ‘기영회’라고 불렀다. 기영회가 열리면 임금이 직접 술과 악(樂)을 내려주었다.이 그림은 조선 선조 때의 기영회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그림의 격이 높고,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은 작품이다. 족자로 꾸며져 있는데, ‘기영회도’라고 제목이 쓰여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전서체로 쓴 ‘기영(耆英)’ 두 글자만이 남아 있고 ‘회도(繪圖)’ 두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제목 아래 화면은 크게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어진이다.태조는 조선을 개국한 시조로서의 상징성이 있었으므로 조선 왕실에서는 특별히 국초부터 태조 어진을 제작하여 여러 곳에 나누어 봉안해왔다. 공식적으로 서울의 문소전을 비롯하여 경주·개성·평양·전주·영흥의 여섯 곳에 건물을 지어 태조 어진을 봉안했고, 이후에도 많은 태조 어진이 제작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전해지고 있는 태조 어진은 전주의 경기전에 봉안된 한 점뿐이다. 과거에는 어진이 낡고 오래되면 다시 그려 보관했는데, 이 어진 역시 고종 9년(1872)에 새로 이모한 어진이다.익선관을 쓰고 푸른색 곤룡포를 입은 태조는 두 손을 소매 속에 넣고 용상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곤룡포 속에 입은 포의 깃이 목 위로 바짝 올라와 있어 경건하고 엄숙한 느낌을 준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어진 이모 당시 흰색 비단에 써서 붙인 ‘태조대왕어용 소자사복지구년 임신 이모(太祖大王御容 小子嗣服之九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는 이원(梨園), 즉 장악원(掌樂院)에서 열린 기로회 장면을 그린 기록화다. 버드나무 늘어진 아름다운 봄날, 스물 한 명의 노인이 한자리에 모여 잔치를 열었다. 이들이 잔치를 연 곳은 조선 시대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과 무용을 관장하던 장악원, 다른 말로 이원이라 부른 관청 내 누정이다. 이 잔치에 참석한 인물들은 전 장악원 도정 홍수렴을 포함하여 모두 21명으로, 65세부터 85세까지 20년을 아우르는 연령대의 노인들이다. 이들은 5품에서 6품의 관직을 역임했다. 조선 초기만 해도 기로회는 전·현직 고위 관리들의 공적인 모임이라는 성격이 강했는데, 18세기가 되면서 사적인 모임으로 성격이 변하고, 참여 범위도 확대되었다. 원래 ‘기로(耆老)’는 퇴임하거나 나이 든 관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18세기 이후에는 일반 사대부 노인들을 지칭하는 말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일반 노인들의 모임도 아취를 가미하여 기로회라고 부른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