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용섭 전북대 로스쿨 교수(변호사) 】 설날은 추석과 함께 우리의 전통명절이다. 설날의 세시풍속은 전통 유교문화의 일종이다. 오늘날 설날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는 대신 공휴일의 의미가 부각되고 있다. 설날에 차례상을 차리고 스승이나 마을 어른을 찾아 뵙고 세배를 올리는 풍습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조선시대 서원은 한국 유교의 전통과 정신문화을 간직한 공간이다. 지난해 7월 25일 법률 제19569호로 성균관·향교·서원 전통문화의 계승·발전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약칭 성균관·향교·서원법)이 제정 공포되어, 1월 26일부터
【뉴스퀘스트=김용섭 전북대 로스쿨 교수(변호사) 】 스승의 날의 발원지는 충남 강경이다. 그곳에는 우암(尤庵) 송시열이 설립한 팔괘정(八卦停)이 있다. 송시열의 스승은 조선 예학의 종장(宗匠)인 사계(沙溪) 김장생이다. 김장생은 금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에 후학을 양성하고 강학하기 위해 임리정(臨履停)을 지었다. 또한 그곳에서 약 50미터 떨어진 위치에 그의 스승 율곡(栗谷) 이이와 우계(牛溪) 성혼을 배향하기 위하여 죽림서원을 설립한 바 있다.송시열이 자신의 스승인 김장생을 닮기 위해 임리정과 같은 모양으로 인근에 팔괘정을 짓고
【뉴스퀘스트=김용섭 전북대 로스쿨 교수(변호사) 】 기호 유학의 발상지는 파주이다. 파주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교하(交河)지방이다. 지난 11월 1일과 2일 경기도 파주로 4인의 동료 교수 금화(琴和), 송백(松柏), 우경(又經), 가산(佳山)이 함께 1박 2일 일정으로 역사문화 탐방을 다녀왔다.올 봄과 여름에 영남 유학의 산실인 함양의 남계서원과 산청의 덕천서원 그리고 경주의 옥산서원을 돌아보면서 일두 정여창, 남명 조식과 회재 이언적 선생의 삶과 행적을 살펴보았다.우경은 일정상 그날 저녁에 합류하기로 하여, 금화, 가산, 송
【뉴스퀘스트=김용섭 전북대 로스쿨 교수(변호사) 】 최근 정치영역과 일상적 SNS에서 사실에 반하는 거짓말과 괴담이 난무하고 있다. “정직은 최상의 정책(Honesty is best policy)”이라는 영국 속담은 거짓말이 탄로나면 그 사람의 도덕성과 순수성(Integrity)에 손상을 입힐 수 있기 때문에 정직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읽힌다.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진술하거나 은폐나 왜곡하여 진술하는 거짓말은 여러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악의적 거짓말과 선의의 거짓말로 구분한다. 악의적 거짓말은 자기를 이롭
대한민국에는 약 1만5000그루의 보호수가 있습니다.마을에 오래 살아 마을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한 나무입니다. 느티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등 여러 수종의 나무입니다. 이 나무에는 각자 스토리가 있습니다.나무와 관련된 역사와 인물, 전설과 문화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문화콘텐츠입니다.나무라는 자연유산을 문화유산으로 승화시킨 예입니다.뉴스퀘스트는 경상북도와 협의하여 경상북도의 보호수 중 대표적인 300그루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연재합니다. 5월 3일부터 매주 5회 연재를 시작합니다.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경산시에는 경산향교, 자인향교, 하양향교 등의 세 향교가 있다.매년 봄가을에 경산의 3곳 향교에서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일제히 봉행한다.석전대제는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문묘(文廟)에서 공자를 비롯하여 신위(神位)를 모시고 있는 4성(四聖) 10철(十哲) 18현(十八賢)을 제사지내는 의식이다.경산의 향교마다 은행나무가 볼 만
대한민국에는 약 1만5000그루의 보호수가 있습니다.마을에 오래 살아 마을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한 나무입니다. 느티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등 여러 수종의 나무입니다. 이 나무에는 각자 스토리가 있습니다.나무와 관련된 역사와 인물, 전설과 문화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문화콘텐츠입니다.나무라는 자연유산을 문화유산으로 승화시킨 예입니다.뉴스퀘스트는 경상북도와 협의하여 경상북도의 보호수 중 대표적인 300그루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연재합니다. 5월 3일부터 매주 5회 연재를 시작합니다.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서쪽으로 낮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동쪽으로는 너른 들이 펼쳐졌으며 그 곁으로 낙동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마을 궁기리에는 고려시대의 충신 농암(籠巖) 김주(金澍:1365~?)와 그 후손의 혼이 역력히 남아있다.인재가 많이 나왔다 해서 ‘재궁(才宮)’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마을이다.행정구역 이름인 궁기리는 재궁마을의 ‘궁(宮)’자와 도개면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905년, 한반도와 만주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벌인 제국주의 전쟁(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을 침탈하기 시작했다.7월 27일, 일본 수상 가쓰라는 미국 육군장관 테프트와 밀약을 맺었다. 주요내용은 ‘필리핀에서는 미국의 지배를 인정하고 대한제국에서는 일본이 지배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8월 12일에는 영국과 동맹을 맺고 ‘영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외교적으로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았다.국제적으로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를 인정받은 일본은 한반도 침략을 구체화했다.조국을 구하기 위해 일어나다11월 9일, 특명전권대신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에게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일본이 설치한 통감부(統監府)의 지배를 받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을사늑약(乙巳勒約: 한때 을사조약이라고 했으나 조약 체결 과정의 강압성을 나타내기 위해 을사늑약으로 정리되었다.늑약은 ‘억지로 맺은 조약’이라는 뜻이다) 체결을 강요했다.11월 17
【뉴스퀘스트=김재준 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구름은 해를 가렸다 열었다 한다.흙산(肉山)인 산세는 순하고 둥그스름하다.건너편 용마능선이 갈기를 휘날리며 달려오듯 안개구름이 한바탕 흘러가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광주호를 바라보니 담양 추월산이 흐릿하다.정상의 3개 바위봉은 군사시설이 턱 버티고 있어 안타깝게 못 간다. 2012년 12월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모두 이쪽으로 오세요. 중머리재 쪽이 광주 시가지, 오른쪽은 광주호인데 소쇄 양산보, 면앙정 송순,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의 풍류가 깃든 곳입니다.”몇 사람은 벌써 저만치 입석대 쪽으로 내려간다. 인걸은 지령이라 했거늘 무등의 바위는 김 장군의 얼굴처럼 햇살에 찡그린 듯하다.민중의 한이 서린 남도 제일산무등산 자락 외딴 초가집에 가난한 부부가 있었다.중국 사람이 찾아와 돈 많이 줄 테니 재워달라고 했다. 몰래 미행을 하는데 땅속에 알을 넣자 닭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몇 달 뒤 다시 온다며 자기 나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조위는 투옥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훈구파에 의해 조위, 김일손, 김굉필, 신종호, 정석견, 채수, 김전, 최보, 신용개, 권경유, 이계맹, 이주, 이원, 김심, 김흔, 표연말, 유호인, 정여창 등등 김종직의 제자들 명단이 작성됐다.그들은 모두 의금부에 연행돼 모진 고문과 함께 거짓자백을 강요받았다. 류자광과 훈구파가 원하는 자백은 김종직의 제자들이 「조의제문」에 대역부도의 뜻이 담겼음을 알면서도 찬사를 보내고 지지를 했다는 것이었다.당사자들 대부분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접연루자들은 고문에 못 이겨, 혹은 회유에 넘어가서 거짓자백을 했다.훈구파는 그 강압에 의한 허위자백을 근거로 김종직의 제자들 상당수에게 대역부도의 죄, 그리고 김종직의 유언에 따라 붕당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한 죄를 덮어씌웠다.김종직의 문집은 불태워졌고, 그 시신도 부관참시됐다.조위는 거열형에 처해야 한다는 류자광의 주장이 있었으나 이극균의 간청으로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장계향은 타고난 천성이 정이 많아 불우한 이웃을 돕지 않고 못 배기는 성격인데다, 성인의 말씀을 실천하려 노력했으므로 이웃사랑 애민정신이 몸에 배여 있었다. 그것은 그가 쓴 시「학발」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이웃사랑 애민정신이 몸에 밴 여인장계향이 사는 아랫마을에, 지난해 시집을 온 열 여섯 새댁과 스무 살 신랑이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노파는 딸만 여섯을 낳고 마 흔 후반에 어렵게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그 귀한 아들이 그만 군역에 걸려 징집되고 말았다.노파는 어렵게 얻은 외동아들이 군에 불려가자 식 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웠다.소식을 들은 장계향은 약간의 양식과 떡을 준비해서 노파의 집을 찾았다. 떡을 내놓아 노파를 위로 했고, 그 집의 농사와 살림을 거들어주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초서로 시를 지었다.백발의 할머니 몸져누웠네(鶴髮臥病)아들은 떠나 만 리 밖에 있고(行子萬里)만 리 밖으로 떠난 아들(行子萬里)어느 달에 돌아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반신 초상이다.이 초상화의 주인공인 송시열은 유학자들의 상징인 심의(深衣)를 입고, 복건(幅巾)을 썼으며, 얼굴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얼굴은 선묘(線描)를 주로 사용하여 표현하였는데 선의 짙고 옅음으로 얼굴의 부분을 나누었다. 얼굴의 울퉁불퉁한 외곽선과 깊게 패인 주름은 마치 높은 산맥의 줄기를 그린 것처럼 보이고,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눈썹은 터럭 한 올 한 올을 정치하게 묘사하였다.눈은 크게 뜨지 않았지만 검은색의 세필로 속눈썹과 눈매를 선명하게 그렸고, 눈동자는 윤곽을 그리지 않고 옅은 회색으로 수정체를 칠했으며, 동공은 짙은 색으로 칠한 후 흰색 안료를 점으로 찍어 생생한 눈빛을 연출하였다.수염은 얼굴을 채색한 이후에 그렸는데, 구레나룻부터 턱까지 백색의 선으로 풍성하게 표현하였고, 수염 아래의 턱 선은 그리지 않았으며, 입은 수염에 감추어
[대전 = 트루스토리] 이영훈 기자 =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은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용인 심곡서원’(龍仁 深谷書院)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제530호로 지정한다고 28일 밝혔다.‘용인 심곡서원’은 조선 중종 때 사림파의 영수였던 정암 조광조(1482~1519년)를 주향(主享)으로 하는 서원이다.용인은 조광조가 부친의 시묘(侍墓)살이를 한 곳이자 조광조의 묘소가 있는 지역으로, 1605년 그의 묘소 인근에 사우(祠宇)가 조성됐다. 이 사우가 조선 효종 원년(1650)에 ‘심곡(深谷)’이라는 이름과 현판, 토지, 노비 등을 받으면서 사우를 현 위치로 옮기고 강당(講堂) 등을 중창한 것이 현재의 심곡서원이다.강당이 전면에 위치하고, 사우가 뒤쪽에 배치된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을 갖춘 심곡서원은 조선 시대 서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심곡서원은 1871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시 조광조를 모신 서원 중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고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어 가치
[대전 = 트루스토리] 이영훈 기자 = 문화재청은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용인 심곡서원’(龍仁 深谷書院)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지정 예고한다고 25일 밝혔다.‘용인 심곡서원’은 조선 중종 때 사림파의 영수였던 정암 조광조(1482~1519년)를 주향(主享)으로 하는 서원이다.용인은 조광조가 부친의 시묘(侍墓)살이를 한 곳이자 조광조의 묘소가 있는 지역으로, 1605년 그의 묘소 인근에 사우(祠宇)가 조성됐다. 이 사우가 조선 효종 원년(1649)에 ‘심곡(深谷)’이라는 이름과 현판, 토지, 노비 등을 받으면서, 사우를 현 위치로 옮기고 강당(講堂) 등을 중창한 것이 현재의 심곡서원이다.강당이 전면에 위치하고, 사우가 뒤쪽에 배치된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을 갖춘 심곡서원은 조선 시대 서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심곡서원은 1871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시 조광조를 모신 서원 중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고,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어 가치가 있다.사우와
[트루스토리] 따뜻한 봄을 알리는 3월 어느 날, 한 여행사에서 주관한 담양 문학기행에 참가했다. 서울에서 버스로 4시간 반을 달려 광주 무등산을 마주 보고 펼쳐진 담양에 도착했다. 일단 담양 어귀의 번듯한 한정식집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소문대로 가짓수도 많고 반찬마다 맛이 있었다. 식사 후 우선 송강 정철이 초기작품인 성산별곡에서 썼다는 식영정에 들렸다. 식영정 아래 ‘송강 정철 가사의 터’라는, 오벨리스크처럼 생긴 기념탑이서 있었다. 그 뒤로 연못 딸린 부용당과 서하당이 있었고, 주변에 사당과 장서각이 있었으며, 언덕배기에 올라서니 비로서 식영정이 나왔다. 부용당과 서하당은 정철이 동문수학한 벗이자 인척인 김성원의 소유였으며, 식영정도 김성원이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장인 임억령을 위해 세운 정자라고 한다. 정철은 이곳을 드나들며 임억령으로부터 시를 배웠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았던 김성원의 풍류를 읊은 것이 성산별곡이라 한다. 식영정은 언덕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