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 사찰은 문화예술, 정치, 학문, 사회적 network의 중심지였다【뉴스퀘스트=김승국 전통문화칼럼니스트 】 고려조를 개국한 태조 왕건은 분열된 민심을 하나로 묶고 기존의 다양한 세력 집단을 공동의 문화로 결속시키는 방안으로서 불교를 이용하였다. 불교의 기본 정신인 귀족이든 평민이든 부처님 밑에 다 같은 중생이라는 의식이 일반화되어 공동체 결속이 쉬웠다. 또한, 지역적 특성과 전통문화를 인정하는 다원 문화가 꽃피었던 자유스러웠던 사회였다. 고려조에는 남녀 평등사상이 잘돼 있어서 양가의 합의가 있으면 남자든 여자든 이혼과 재혼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조선의 개국 공신 중 한 사람인 조반(趙胖, 1341~1401)의 부인, 계림 이씨의 초상화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아무런 배경이 그려지지 않은 초상화 화면 상단에 ‘개국공신 배천후인 조반지부인초상(開國功臣 白川后人 趙伴之夫人肖像)’이라 쓰여 있다.조반 부인 이씨는 오른쪽을 바라보며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아 있으며 종아리 부근까지만 그려져 있다.이씨 부인은 별다른 장식이 없는 검은 색의 큰 족두리를 쓰고 있다. 조선 후기가 되면 족두리는 머리에 얹는 방식으로 바뀌었다.부인은 흰색의 속저고리 위에 허리까지 오는 녹색의 겉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겉옷으로 짙은 청색의 포(袍)를 입고 있다.백색의 속저고리는 깃이 목 위로 올라와 있고, 녹색 겉저고리의 깃에는 붉은 색 천이 대어져 있어 색상의 대비가 선명하다.옥색의 치마는 주름이 잡혀 있고, 치마의 중앙 부분에는 미색의 다른 천을 대었다.겉에 입은 포는 짙은 청색의 비단으로 보이는데, 구름
[뉴스퀘스트=김재준 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앞에서 계속) 나문재는 개펄 등에 무리지어 사는 한해살이 풀. 어긋나는 녹색 잎은 잎자루가 없고 나중에 붉게 변한다. 8~9월에 꽃피고 어린잎은 나물을 해먹는다. 경징이풀·함초·칠면초·기진개 등으로 부른다. 철종이 머문 고택, 고려왕실이 머문 궁지 다음날 새벽 안개비 맞으며 철종외가까지 걸었다. 파주염씨(坡州廉氏) 고택인데 고샅에는 첫사랑길 안내판을 붙여 놨다. “봉녀와 강화도령.” 강화도령으로 알려진 이원범은 서울에서 나서 자랐으나 역모에 몰려 강화도로 유배된다. 형과 19살까지 농사를 짓던 그는 왕족이 아닌 백성처럼 살 뻔했으나, 헌종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자 왕으로 끌려간다. 꼭두각시 왕이니 끌려갈 수밖에……. 이곳 외가의 담장, 우물가 길목을 걸으며 봉녀와 사랑을 나누던 강화도령은 왕이 된다. 그러나 사랑을 뺏긴 봉녀는 목 졸려 강물에 던져졌다고 전한다. 아침부터 비는 추적추적 내린다. 우산을 받쳐 들고 고려궁지에 차를
[뉴스퀘스트=최혜인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연구원] 우리나라에서 차 문화는 고려(918~1392)시대에 들어 활짝 개화했다. 7세기 도당구법승(渡唐求法僧)들에 의해서 소개된 선종 수행승들의 차 문화는 신라 말~고려 초에 구산선문이 개창되면서 확산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태조 왕건 이래 불교가 국교로 숭상됨으로써, 차는 국가와 사찰을 중심으로 수요가 더욱 확산되었다. 최승로(崔承老, 927~989)의 「시무28조」를 보면 국가가 주관하는 대규모 불교의식에서 왕이 직접 차를 준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차가 종교를 넘어 국가 권력의 상징물로서 인식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왕실이 차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면서, 고려는 차 문화가 성행할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라는 그림이 있다. 커다란 소나무가 아름답게 드리우고 대나무가 둘러 있는 곳에 6명의 인물들이 둥그렇게 모여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고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 소나무 아래 붉은색 탁상에는 여러 기물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