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여름 휴가철 8월 3일 토요일 폭염은 대단하다.

춘천에 도착하니 오후 6시 50분 여름날이라 해는 아직 있지만 오늘 저녁 묵을 방을 찾는다.

마침 새마을금고 근처 효자동 게스트하우스에 용케 빈방 하나 있어 돌아다닐 수고는 덜었다.

외국인, 젊은이들 많이 찾는 집이라 깨끗하고 2층 휴게실에 간편하게 구운 빵(toast)이나 커피를 그냥 내주는 곳이다.

방값도 싸다.

2인실 3만6천원.

명동거리에서 닭갈비, 막국수, 한 잔으로 먼 길의 피곤함을 잊는다.

숙소로 걸어오다 등산가게 들러 휴대용 가스난로(gas stove)를 샀다. 

물놀이 사고를 당한 직원 걱정에 잠을 설쳤지만 아침 7시 가평으로 달린다.

몇 해 전 강경교 아래서 튜브(Tube) 타던 여름날은 참 빨리도 흘러갔다.

1시간 반을 달려 관청리 등산길 찾아 반야사 입구에 차를 대니 강렬한 햇볕. 계곡 물소리 요란한데 벌써 오전 9시 이정표가 인색하다.

다리 난간 지나 중봉5.2킬로미터 팻말을 봤다.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을 건너 상수도보호구역 옆길로 올라간다.

주차장 못 찾아 애를 먹었다고 하소연하는 어떤 부부를 만나 외진 산길에 동질감을 느끼며 인사한다. 

"반갑습니다."
"조심해서 갑시다."
"……"

계곡 넘어 화악산.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숲속의 산길
숲속의 산길.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계곡으로 들어서자 그늘이 깊게 깔렸다.

쓰러진 고목에 이끼로 치장한 비밀의 숲속나라, 시공(時空)이 바뀐 듯 원시림으로 들어온 것 같이 공기도 기이하다.

물소리는 온 산천을 적시며 떠들어대는데 한껏 물오른 노란 달맞이꽃, 분홍색 칡덩굴 꽃도 신났다.

주위에 꿈틀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자연이 살아나는 것처럼 숨소리가 섞여 나무들 사이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광대싸리·생강·물푸레·산뽕·쪽동백·국수·두릅·좀깨잎·붉·소나무……. 병꽃나무 꽃은 지고 꽃싸리·사위질빵·다래덩굴·짚신나물·양지꽃·피나물·파리풀·노루오줌, 저마다 형형색색(形形色色), 대개 분홍·노랑·흰빛이다. 

가마소.
가마소.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여기저기 개다래는 하얀 라커(lacca)칠을 한 듯 울긋불긋.

가마솥 같이 둥근 폭포 가마소에 9시 15분(정상4·관청리1킬로미터), 계곡물 돌 사이로 단풍취, 고로쇠·생강·개옻·당단풍·작살나무…….바위마다 콸콸콸 물이 넘쳐흘러 산천이 진동한다.

몇 걸음 옮겨 계곡물 마시려다 돌에 미끄러져 물에 빠졌다.

휘청거리며 배낭 중심을 잃고만 것. 옷이고 신발이고 배낭, 수첩, 휴대전화기, 손수건, 장갑 모두 다 젖었다.

그것도 모르고 뒤에 올라오던 어떤 일행은 벌써 하산 길이냐고 웃는다.

내려오는 길에 씻은 줄 알았던 모양. 대퇴부(大腿部) 한참 욱신거리는데 분홍색 칡꽃이 가득 떨어졌다.

곧장 20분 걸어오르니 이정표(중봉3,8·애기봉2·관청리1.2킬로미터)가 나타난다.  

개다래는 깊은 산속이나 계곡에 자란다.

이상한 모양으로 달린 벌레집 충영(蟲廮)을 목천료(木天蓼)라 하는데 신장에 직방. 통풍에 열매나 충영을 쓰면 요산수치를 낮춰준다고 알려졌다.

곤충을 부르기 위해 스스로 흰빛을 낸다. 열매가 맺히면 원래 색으로 돌아가는데 바이러스에 원인을 찾는다. 

오르막 산길.
오르막 산길.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개다래의 유혹을 뒤로 하고 짚신나물·사초·관중이 자라는 빽빽한 숲, 물이 철철 넘치는 바윗돌 몇 번씩 건너니 등산화엔 물소리 철벅철벅.

난티·고광·박쥐·고추나무 지나 이정표(중봉3.3·애기봉3.3·관청리2킬로미터), 부천에서 온 앞서 가던 부부는 계곡에서 땀을 씻는다.

"……"
"시원하시겠습니다."
"……"
"먼저 올라가세요."

10시, 이제부턴 계곡이 멀어지고 가파른 산길인 듯 물소리도 멀다.

높은 산, 깊은 계곡, 정상까지 2.6킬로미터 거리인데 발아래 짚신나물이 많다.

멧돼지 금방 뒤지다간 흔적이 뚜렷하고 두 사람 다니긴 마냥 즐겁지 않은 산이다.

머리에 거미줄을 뒤집어써서 다래 순으로 걷으려니 줄기는 뚝뚝 잘 부러진다.

물푸레·가래·광대싸리·싸리·고추·고광나무, 멸가치·질경이·연분홍동자꽃·터리풀….

10시 25분 가파른 산길에 고추나무군락, 상층목은 신갈·산뽕·당단풍·물박달나무, 까치수염, 요란스럽던 물소리도 이제 들리지 않는다.

세 쌍의 일행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라가는데 나는 물에 빠져 옷이 다 젖었고 말랐다 싶으면 땀에 다시 젖었다.

15분 더 올라 이정표(중봉2.3·관청리3킬로미터)에서 잠깐 숨을 돌리며 자두, 복숭아 한 개씩 먹어뒀다. 땀을 너무 많이 쏟아 지칠까 염려됐다. 

"산 참 잘 타시네요."
"……"

어느덧 11시. 앞선 일행이다.

"두 분이 더 나은데요."
"……"

"산에 오른다 하지 않고 왜 '산을 탄다.'라고 할까?"
"산을 따라 가는 거?"
"글쎄."

'타다'의 사전적 의미는 '탈것이나 짐승의 등 따위에 몸을 얹다'는 뜻. 줄이나 산·나무·바위를 밟고 오르거나 따라 지나가는 것이다. 

산에 갈 땐 몸을 온전히 맡기고 산의 품에 안겨야 한다.

산아일체(山我一體), 마음까지 맡겨야 비로소 산을 따르는 기본이 된 것. 온 몸을 던져 하나 되어야 한다는 거다.

산에 다녀와도 심신이 개운치 못한 건 마음을 덜 내려 산에 푹 안기지 못했거나 순응(順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겸손한 사람이 쉽게 산과 일체가 될 수 있다.

정신이 피곤하고 육신이 지쳤을 때, 외롭고 쓸쓸할 때, 생각이 복잡하거나 메말랐을 때 산을 찾으면 용케도 정기를 불어넣어준다.

그러기에 산을 바르게 오르면 어려운 일도 저절로 이루어지므로 만산형통(萬山亨通) 아닌가?

외경(畏敬)의 산, 어머니 같은 산, 친구 같은 산, 고향 같은 산……. 마음먹기 나름이며 생각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발밑에 단풍취는 꽃이 지고 대궁만 남았다.

이 산은 계곡으로 짚신나물, 올라갈수록 고추나무가 무리지어 자란다.

고로쇠·까치박달나무, 확실히 깊은 산중이어선지 오래된 산작약 몇을 만난다.

인간들에게 들키면 목숨은 남아나지 않을 것. 일부러 덤불로 가려놓고 간다.

능선 지표식물 노린재나무에 닿은 11시. 드디어 능선이다.

신갈·당단풍·꽃싸리·미역줄·진달래·산목련·팥배나무, 원추리꽃·족도리풀·동자꽃·사초·며느리밥풀꽃·중나리꽃……. 

큰 구멍이 생긴 오래된 신갈나무 고목은 팔 벌리면 두 아름 족히 되겠다.

산길에 향긋한 냄새, 무슨 냄새일까?

온갖 산나물과 풀잎 냄새, 하늘과 맞닿은 향기로운 산의 얼굴. 둥굴레·애기나리·며느리밥풀·사초·모시대·단풍취·산쥐손이풀, 이들이 뿜어내는 향기다.

피나무, 잣나무 아래 어린나무 가득, 씨앗이 저절로 떨어져 생긴 천연갱신(天然更新)지대다.

산앵도 능선 길 왼쪽으로 물박달나무 북쪽을 보며 외롭게 섰다.

왼쪽부터 큰세잎쥐손이풀, 동자꽃.
왼쪽부터 큰세잎쥐손이풀, 동자꽃.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마가목 위로 정상.
마가목 위로 정상.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뒤 따라오듯 군데군데 분홍색으로 많이 핀 큰세잎쥐손이풀은 이북지역 높은 산에 드물게 자라는 여러해살이, 7~8월에 꽃 핀다.

이질풀과 비슷하지만 남한에 드물게 자라며 잎이 잘고 길게 갈라진다.

작은 손바닥 같은 잎이 다섯 개 갈라져 쥐손이풀 식구다.

이질풀처럼 설사약으로 썼다.

설사 이(痢), 병 질(疾), 이질은 설사병이다.

6~70년대 비위생적 불결한 화장실·식수·부엌 환경, 인분(人糞)으로 키운 채소 등으로 장티푸스와 근대적 질병이었다.

세균성 급성 감염성 질환으로 배 아프고 설사를 한다.

잎을 말려 달이거나 술에 담가 먹는다. 

11시 30분 능선길, 박쥐나물·노란 피나물 꽃·꿩의다리 흰꽃, 썩은 냄새나는 버섯, 박새……. 후다닥 멧돼지 세 마리 지나갔다.

15분 더 올라서 이정표(적목리,가림4.9·중봉0.5·삼팔교6·석룡산3.6킬로미터), 능선 바위사이로 마가목·구상나무 군데군데 자라는데 그 너머 철탑의 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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