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근의 과기누설(49)

【뉴스퀘스트=김형근 과학전문 기자】 태풍이 지나간 들녘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 들었다. 가을 알리는 귀뚜라미다. 우리에게 더운 여름이 끝나고 시원한 가을이 왔다는 것을 제일 먼저 알리는 전령이다.

자연의 질서는 늘 아름답다.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온난화로 기후변화로 세계가 몸살을 앓았지만 그래도 더운 여름을 뒤로 하고 어김없이 가을은 찾아온다.

사계절의 질서가 이렇게 아름답고 고마울 수가 없다. 대자연의 섭리 앞에 인간의 왜소함을 느끼며 숙연해 지는 지금이다.  

김형근 논설위원 과학평론가

추석을 앞두고 가을의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한다. 아침 저녁으로 꽤나 선선한 바람이 분다. 필자가 사는 서울 성북동 뒷산 북악산에도 가을의 기운이 찾아 들었다. 가을을 알리는 반가운 손님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했다. 

귀뚜라미의 한자어인 실솔(蟋蟀)은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시가(詩歌) 문학을 대표하는 ‘시경(詩經)’에 수록된 한 시의 제목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말라는 내용으로 모두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1장은 다음 구절로 이루어진다. 

蟋蟀在堂(실솔재당) 귀뚜라미가 마루에 있으니/ 歲聿其莫(세율기모) 해가 드디어 저물었구나.

今我不樂(금아불락) 이제 우리가 즐거워하지 않으면 / 日月其除(일월기제) 해와 달은 가버린다

無已大康(무이태강) 너무 편안하지 아니한가/ 職思其居(직사기거) 자신의 직책을 생각하여

好樂無荒(호락무황) 좋고 즐거움이 지나치지 않음이/ 良士瞿瞿(양사구구) 어진 선비가 조심할 내용이다.

사족을 달아 풀이하자면 귀뚜라미가 집안으로 들어온 것은 이제 좀 있으면 한해가 저물어간다는 소식이다. 그래서 게으름 피우지 말고 겨울 준비를 하고, 그리고 조신하게 행동하고 올바른 마음가짐을 해서 한 해를 잘 마무리하라는 내용이다.

비슷한 교훈으로 “귀뚜라미가 울면 게으른 아낙이 놀란다”는 속담이 있다. 겨울을 나기 위해 여름철에 부지런히 길쌈해야 할 아낙네가 실컷 게으름을 피우다 가을을 알리는 귀뚜라미 소리에 놀라 김쌈을 시작한다는 이야기다.

“귀뚜라미 울면 게으른 아낙이 놀란다”

그래서 귀뚜라미를 ‘촉직(促織)’이라고도 한다. 베를 짜는 것()을 재촉하라고() 우는 벌레라는 의미다.

옛날 사람들은 귀뚜라미를 지루한 여름철의 끝과 시원한 가을철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으로 생각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귀뚜라미 소리로 주변의 온도를 짐작했다는 기록도 있다. “귀뚜라미는 가난한 자의 온도계”라는 미국 속담도 여기에서 나왔다.

그러나 귀뚜라미는 단순히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는 신비한 영물(靈物)에서 그치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온도를 정확히 알아차린다.

1897년 미국의 물리학자 아모스 돌베어(Amos Dolbear, 1837~1910)가 한 학술지에 온도와 귀뚜라미 소리의 연관성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일명 ‘돌베어 법칙’으로 알려진 이론이다. 종마다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긴 꼬리 귀뚜라미가 바로 ‘온도계 귀뚜라미’다.

우는 횟수로 온도를 측정, 놀라울 만큼 정확해

14초 동안 우는 횟수에 40을 더하면 화씨 온도가 나온다. 예를 들어 귀뚜라미가 14초 동안 35회 울었다면 화씨 온도는 75도이고 이것을 섭씨로 환산하면 24도 정도가 된다는 것이다.

귀뚜라미는 주변 온도에 따라 체온이 변하는 변온동물이기 때문에 온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린다.

많은 사람들이 귀뚜라미 소리를 매미처럼 ‘우는’ 소리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마찰음이다. 두 날개를 비벼서 소리를 낸다. 온도가 높아질수록 울음소리의 빈도가 더 높아진다.

귀뚜라미는 인간이 생활하기에 가장 적합한 온도인 섭씨 24도일 때가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한다. 여름을 마무리하고 가을로 들어서는 시기의 이맘때가 귀뚜라미 소리가 가장 아름다운 시기라 할 수 있다.

우리 선조들 역시 귀뚜라미를 영리한 곤충이라고 여겼다. “칠월 귀뚜라미 가을 알 듯한다”는 속담처럼 아직 더운 감이 남아있는 음력 7월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는 ‘가을 전령’ 역할을 톡톡히 하기 때문이다.

자연에 순응하는 한갓 미물을 통해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게 된다. 자연의 질서는 늘 아름답다. 그러나 인간의 질서는 늘 추악한 것 같다. 아름다운 자연의 질서에 역행하려 하기 때문이다.

성북동 뒷산이 가을을 손짓하고 있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너울너울 흔들리는 코스모스가 우리를 반긴다. 긴 목을 쳐들고 미모를 자랑하기가 바쁘다. 그러나 질투하지 않는다. 

가을의 길목이다. 위대한 자연의 섭리에 숙연해지고 고마움을 느끼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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