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아침 8시 울진 근남 수곡리에서 불영계곡을 거슬러 올라간다.

“왕피천계곡에코투어 사업단” 사무실까지 승용차로 20분 남짓 걸렸다.

사무국장께서 반갑게 차 한 잔 권한다.

토요일도 일 하냐고 물으니 산을 걷는 것이 좋아 괜찮다고 한다.

탐방 길 찾기 어렵다며 한사코 차를 태워준대서 박달교 지나 산 입구에 내렸다.

계곡 끝나는 곳까지 안내한다는데 더 이상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박달나무가 많아서 박달교입니까?”

“……”

“아니면 물이 맑아 밝다는 의미인지 산이 크다는 것인지…….”

밝음, 새벽, 빛을 뜻하는 밝달, 박달(朴達)이 아니던가? 

탐방구간을 새로 만들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데 일정한 거리마다 빨간 리본을 매달아 두었다.

산길 입구부터 물이 흘러나와 돌, 바위, 나무들이 작은 계곡을 만들었다.

9시 25분, 개울을 건너고 생강·당단풍·신갈·병꽃나무, 광대싸리는 졸졸졸 물소리를 들으며 자란다.

키 큰 노린재나무 하얀 꽃잎을 달고 5월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무궁화 잎을 닮은 고광나무도 흰 꽃을 피웠는데 참회나무는 겨우 봉우리 맺었다.

신갈나무 그늘을 만들어줘 산행하기 좋은 날.

이 산속의 농업용 시멘트 수로에는 물이 넘쳐흐르고 소나무, 철쭉, 산수국 아래 사초, 취나물이 밟힐까봐 조심해 지나간다. 

10분 더 올라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계곡물 두 손으로 받아 마시니 한결 시원하다.

돌인 줄 알고 헛디뎌 그만 낙엽더미 뜬 물에 오른쪽 신발 다 젖었는데 옻나무 아니냐고 자꾸 묻는다. 

“……”

“붉나무다”

옻나무 새순은 연록이고 붉나무는 빨갛게 드러난다.

산속으로 더 들어가니 산수국, 병꽃나무 군락지. 수곡리 친구는 층층나무를 층층목이라 부른다.

계곡 군데군데 날개처럼 가지를 힘차게 펼치고 섰다. 

“낙엽송이 많은 것을 보니 이 근처는 화전민 터였을 겁니다.”

앞서가던 사무국장님이 고개를 끄덕인다.

“……”

화전민 이주.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화전민 이주.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화전민 터.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화전민 터.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화전(火田)은 숲에 불을 놓아 만든 밭으로 몇 년 동안 작물을 재배한 뒤 땅 심이 약해지면 다른 곳으로 옮겨 같은 방법으로 보리, 밀, 콩, 옥수수, 감자, 조, 메밀 등을 심어 먹었다.

화전민들이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은 일제 강점기 식민지 토지조사사업과 쌀 수탈로 굶주리게 되자 산으로 올라가 화전민이 되었다.

입에 풀 칠 하며 생활이 불안정했지만 가족과 함께 외부의 간섭을 피할 수 있었다.

전국에 약 20만 세대가 평균0.28헥타르(1,140평)가량 밭으로 일궈 한 가족이 먹고 살았다.

전체 화전면적이 7천5백 헥타르 정도였다. 

10시, 물 흐르는 돌에 네 사람이 앉아 한 잔씩 기울이는데 박달나무와 서어나무, 싸리나무도 옆에 섰다. 

“싸리나무는 화력이 좋고 연기도 잘 보이지 않아요.”

“……”

과거 울진에 침투한 무장공비들이 산에서 밥을 해먹을 때 싸리나무를 많이 썼다고 일러준다.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직후부터 화전민은 본격적으로 자취를 감췄잖아요.”

“…….”

무장공비들이 화전민으로부터 식량과 정보를 받거나 은신처가 될 것을 우려해 이 무렵 대대적으로 화전민들을 산에서 내려오도록 1970년 초까지 이주정책을 펼치게 된다.

밭으로 일궜던 그 자리에 빨리 자라는 낙엽송(일본잎갈나무)을 많이 심었다.

공비가 저지른 살해현장, 평창.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공비가 저지른 살해현장, 평창.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무장공비 수색.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무장공비 수색.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1968년 1월 21일 북한은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침투가 실패로 끝나자 월남전(越南戰) 베트콩처럼 게릴라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울진·삼척에 무장(武裝)공비(共匪)를 침투시킨다.

1968년 10월 30일, 11월 1일, 11월 2일 3일간 밤을 틈타 공비 120명이 울진 북면 고포해안에 상륙, 울진·삼척·봉화·강릉·정선 등지로 침투한다.

총칼로 협박하여 사람들을 모아놓고 인민유격대 가입을 강요한다.

울진 북면 고숫골에서는 11월 3일 새벽 5시 30분경 공비 7명이 나타나 당시 이 마을에 와있던 삼척 장성읍 주민을 대검으로 찔러죽이는가 하면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도록 위협했다.

삼척 하장에서는 80세 노인, 52세 며느리, 15세 손자 등 일가 세 사람을 잔인하게 죽였으며, 열 살이던 평창 이승복 어린이가 처참하게 죽은 것도 이 때였다.

주민들 신고로 군인과 향토예비군이 출동, 연말까지 소탕전을 벌였다.

공비 대다수를 사살했지만 민간인 피해와 전사자도 수십 명에 달했다.

이른바 울진·삼척지구무장공비 침투사건이다.

개울을 지나면 안내자 없이 우리끼리 산길을 올라가야 한다.

길이 분명치 않아 신경 쓰이는데 빨간 리본만 보며 가라고 이른다. 

“이 산에 올라서 임도길이 나오면 불영사 방향 능선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제일 높은 곳이 천축산 정상”이라고 한다. 

“이곳은 국유지인데 탐방길 조성협의는 끝냈으니 본격적으로 추진하면 돼요.”

“숲을 해치지 말고 최소한으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

땀을 닦으면서 방국장님은 말을 잇는다.

“근남 구산리 굴구지에 연구용역사업을 했는데 동네 이장이 나무이름을 ‘막소나무’라고 했어.”

“막소나무?”

“……”

“과거 일본군 막사가 있던 앞쪽을 가린 소나무를 그렇게 불렀나 봐. 이장님 말만 듣고 막소나무라 한 거지.”

“나중에 따져서 바로 잡았어.”

“사실은 땅이 좀 썰렁한 곳에 나무를 심었다는군.”

“기(氣)가 허(虛)한 곳 말이지요?”

“……”

“풍수적으로 부족한 곳을 보태려 비보림(裨補林)을 만들었군요.”

“그렇대.”

“……”

“그냥 뒀더라면 그릇된 이야깃거리를 만들었겠지요.”

“……”

10시 10분께 서로 헤어졌다.

“신세 많이 졌습니다.”

“내려와서 연락해요.”

“감사합니다.”

호랑버들.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호랑버들.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이정표.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이정표.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지금부터 일행은 경사 급한 산을 오르면서 빨간 리본을 찾아 걷는다.

몇 미터 간격으로 탐방길 만들려고 표시를 해 뒀는데 나무계단을 만들지 말고 있는 그대로 다닐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

조금 오르니 쇠물푸레, 신갈나무와 소나무림이다. 쪽동백나무 지나 박달나무 큰 것도 두 그루 높이 섰다.

숲속을 헤치고 오르는데 거미줄에 매달린 벌레들이 모자와 옷에도 자주 붙는다.

10시 반쯤 돼서 임도를 만나는데 아스팔트길이다.

이정표에는 서면에서 왕피리까지 이어지는 도로다.

길옆으로 층층나무, 고광나무, 병꽃나무 꽃들이 활짝 폈고 햇살이 따갑다.

호랑버들도 꽃을 피웠다. 

소나무 숲길.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소나무 숲길.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눈길 끄는 이정표.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눈길 끄는 이정표.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

“맞다.”

“뭐가?”

“박달나무가 많아서 박달재였어.”

길옆으로 박달나무가 줄 섰는데 물박달나무도 드문드문 옆에 있다.

박달나무는 전라도 일부를 빼곤 전국에 자란다.

우리나라는 박달나무를 신성시하여 신단수(神檀樹), 건국신화에도 단군왕검이 박달나무 아래서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잎은 어긋나고 긴 달걀 모양의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다.

물에 가라앉을 정도로 무겁고 단단하여 홍두깨, 방망이, 곤봉, 수레바퀴 만드는데 썼다.

나무껍질은 붉은 금빛을 띠고 묵을수록 회색으로 갈라진다.

새순은 위장병에 달여서 마시기도 한다.

조팝나무는 흰 꽃을 피워 드문드문, 붉은 꽃 병꽃나무가 온 산길에 가득하다.

이곳에선 흰색이 없고 모두 붉은색이다.

10시 50분, 박달재 공원관리초소에 닿는다(수곡삼거리15.3·왕피삼거리6.5킬로미터).

방국장께서 연락해뒀는지 차 한 잔 내어주는데 미안하기 그지없다.

이 일대는 왕피천 생태경관 보전지역으로 국내 최대면적이란다.

산양, 삯, 담비를 비롯해서 산작약, 노랑무늬붓꽃이 자라는 지역으로 2005년 지정됐다.

102킬로 평방미터쯤 된다. 

왕피천은 통고산 부근에서 발원하여 근남지역을 가로지르는 대략 5~60킬로미터 길이다.

하류는 울진읍에서 흘러드는 광천과 매화천이 합류되어 동해로 흐른다.

수산천(守山川)·대천(大川)이라 하였으나 조선시대 이후 왕피천으로 불렸다.

마의태자가 피신 와 어머니가 이곳에서 죽자 금강산으로 갔다는 것과 홍건적을 피해 공민왕이 피신하였다고, 삼한시대 삼척에 있던 실직국(悉直國) 왕이 피난 왔다고 해서 왕피리(王避里)가 되었다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왕피리……” 

“다음 올 때는 대금(大笒)을 가져와 불어야겠어.”

“……” 

관리초소에서 박달나무가 많아 박달재라고 했으니 확인된 셈이다. 길가에 베어놓은 물푸레나무 몇 개 가져가려고 교육용 회초리로 써도 되냐고 물으니 회초리시대는 지났다며 웃는다.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