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10월 13일 토요일 가을 햇살은 강물에 보석을 뿌린 듯 물빛과 어우러져 유난히 반짝인다.

섬진강을 더욱 눈부시게 하니 어찌 가을 여행을 마다하겠는가?

오전 10시 섬진강 휴게소에서 1시간 반을 달려 장흥읍내, 아직 남아있는 아버지 시대의 골목길 걸어 남도의 정취를 느껴보지만 마침 토요시장이라 장마당의 유혹도 떨칠 수 없었다.

피마자・감・대추・생강……. 생강은 줄기, 잎을 같이 붙인 채 팔고 있다.

탐진강 바로 건너 매생이굴 식당에서 점심 먹곤 곧장 내달렸다. 

5년 전 천관산에 오면서 장흥읍내에 들른 전주 콩나물 국밥집, 음식이 정갈스럽고 맛도 최고였다.

“막걸리 한 잔 주세요.”

“……”

“술 한 잔.”

묵묵부답 주인은 한사코 벽 쪽을 가리킨다.

“……”

“술에 대한 생각, 우리 집은 해장국을 파는 음식점이므로 술을 파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손님 여러분의 깊은 이해를 바랍니다.”

나의 음주욕구를 여지없이 꺾어 놨다.

식당 벽면에 아주 크게도 써 붙였군.

얼마나 술꾼들이 귀찮게 했으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해하려 했지만 천길 나그네 요구를 가차 없이 거절하고 만 것이다.

절망감은 그날 밤 두륜산으로 내달려 폭음을 강행케 했으니 장흥은 나의 통음광가(痛飮狂歌)를 유발한 책임은 지금도 면키 어려우리라. 

어느 지역을 가나 막걸리 맛을 보면 그 지방의 물맛을 알 수 있다.

인심을 알 수 있고 풍속을 느낄 수 있다고 여긴다.

막걸리 한 잔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던 지난 시절, 벌써 추억처럼 이맘땐 더 애틋해 진다. 

오후 1시 45분 천관산 입구.

주차장을 지나 길옆에는 감을 파는 시골아낙들이 정겨운 사투리로 나그네를 불러세운다.

동백・황칠나무, 털머위는 햇살에 유난히 빛이 난다. 

털머위.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털머위.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국화과 식물인 털머위는 바닷가 근처에서 잘 자라는데 윤기가 돌고 잎 뒷면에 희스무레한 털이 있어 머위와 다르며 가장자리에 간혹 톱니가 있다.

9~10월 노란 꽃이 피고 어린 잎자루를 나물로, 상처와 습진에 잎을 바른다.

삶은 물은 어혈 해독제로도 썼다.

머위 나물은 머우(강원), 머구(경상), 머위(충청), 꼼치(제주)로 불렸는데 잎이 넓어 모자, 우산 대용으로 썼다.

넓다는 의미로 머휘, 머희, 머위로 바뀐 것으로 본다. 

10분 걸어 갈림길에서 정상을 향해 죽 걸어간다.

왼쪽 정안사, 오른쪽이 구정봉 가는 길이다.

곧 장흥위씨 재실 장천재, 오래된 동백나무들이 볼만하고 묘소, 석상, 장명등이 씨족의 위상을 실감케 한다. 

오후 2시 10분 갈림길(금수굴1.4・연대봉2.8・환희대2.8・금강굴1.7・장천재0.4・주차장0.9킬로미터). 땀이 송골송골 나올 정도로 급한 나무계단을 오르면 리기다소나무 능선길이다.

조릿대・동백・청단풍・마삭줄・팥배나무 열매도 붉게 물들었다.

졸참・쪽동백나무, 돌과 바위들이 어우러진 계곡 물소리 정겨운데 상수원보호구역이다.

참빗살・팥배・조릿대・대팻집・작살・신갈・사스레피나무 지나 사방오리나무 군락지, 나무둥치가 굵어서 흡사 박달나무 같이 보인다.

노각・사람주・노간주나무, 발아래 청미래덩굴, 히어리나무 잎맥이 선명하다. 

히어리.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히어리.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히어리(Korean winter hazel)는 우리나라 원산으로 조록나무과, 희어리속. 잎은 어긋나고 둥근 심장형이다.

가장자리 톱니가 있으며 잎 양면은 매끈하다.

3월 하순에 노란 꽃이 꼬리처럼 늘어져 달리고 지리산을 중심으로 전라남도에 자란다.

개나리, 산수유, 다음으로 봄을 알리는 꽃.

일제강점기 일본인 우에키가 송광사 근처에서 꽃잎이 벌집 밀랍처럼 생겼다 해서 납판(蠟瓣), 송광납판화, 조선납판화로 불렸으나, 해방 후 순천지역 방언 히어리가 정식 이름이 됐다.

시오리마다 볼 수 있대서, 햇살에 꽃이 희다는 등 여러 얘기가 있다.

산청 웅석봉이 군락지로 뱀사골, 쌍계사 숲길에서도 만날 수 있다.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2시 반, 바위에 서서 숨을 고르는데 황금들녘 너머 다도해, 고만고만한 섬들이 떠 있는 보성만이다.

쇠물푸레・신갈・키 작은 소나무들……. 아래쪽엔 노랑, 빨강, 아니 불그레한 빛깔 단풍이 든다.

여름 더위를 이겨낸 팥배나무 붉은 열매도 먼 바다를 굽어보며 다가오는 계절을 준비한다.

굴참・신갈・진달래・국수・생강・사스레피나무…….  왼쪽의 신갈나무 숲길너머 바위들이 넘어가는 햇살에 소금강 단풍까지 어우러져 절경이다.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오후 3시경 큰바위 입석에는 역광으로 눈이 부셔 바라볼 수 없을 정도다.

힘들어 땀 뻘뻘 흘리는데 먼저 온 사람들이 “안녕하세요.” 자꾸 인사한다.

숨차고 힘 드는데 대답하려니 오히려 죽을 맛.

인사도 적절하게 상황을 봐가면서 해야 할 것이다.

곧 한사람 겨우 들어갈 만 한 바위인데 금강굴(환희대0.8킬로미터), 5분 더 올라서 돌배(石船)다.

몇 발자국 지나 대세봉 갈림길(천관사1.6・자연휴양림1.5・환희대0.6・연대봉1.4・주차장3.1킬로미터).

잠시 후 외곬으로 나앉은 바위산들이 뚝뚝 떨어져 우뚝우뚝 섰다.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른 특징으로, 다른 성격으로……. 가을 역광의 실루엣은 황홀하면서도 신비롭다. 

오후 3시 15분 구정봉(九頂峰), 환희대(연대봉1・닭봉헬기장0.4・탑산사0.6・구룡봉0.6킬로미터). 하늘로 솟은 바위들은 저마다 기묘한 형상이다.

스코틀랜드의 스톤헨지 분위기인 듯, 고대 이집트의 석물을 모아둔 것 같기도 하다. 햇살에 비늘처럼 섰다.

평평한 능선 길게 걸어가며 뒤돌아보니 구정봉의 바윗돌이 억새와 어우러져 환상적이다. 

구정봉은 대장·문수·보현·대세·선재·관음·신상·홀·삼신봉인데 기묘한 형상으로 솟은 아홉 개의 바위를 일컫는다.

나도 자연에 취해 가냘픈 몸짓, 바람 따라 일렁이며 하늘하늘 춤사위를 벌이면 바다, 섬, 바위, 가을도 같이 흔들린다.

억새풀 너머 멀리 점점이 찍힌 섬은 마치 배가 떠있는 듯.

이렇게 경치가 뛰어나니 어찌 한바탕 벌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봄은 진달래, 가을이 되면 정상 능선으로 4킬로미터 억새가 장관이다. 시월 초순 억새제를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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