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스토리] 송은정 기자 = 월간 ‘현대문학’이 9월호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수필을 조명하는 이태동(74) 서강대 명예교수의 비평을 실었다. 이 명예교수는 ‘바른 것이 지혜이다 - 박근혜 수필 세계’라는 제목의 비평에서 “그의 에세이의 대부분은 우리들의 삶에 등불이 되는 아포리즘들이 가득한,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진주와도 같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극찬했다. 이 명예교수는 또 “그의 수필은 그가 경험했던 처절한 삶에 대한 느낌을 지극히 절제된 언어로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부조리한 삶의 현실과 죽음에 관한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의 코드를 탐색해서 읽어내는 인문학적인 지적 작업에 깊이 천착하고 있기 때문에 문학성이 있는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긍정적 평가를 쏟아냈다. 9월호에는 그러면서 ‘꽃구경을 가는 이유’ 등 박 대통령의 수필 4편이 함께 실렸다. 이번에 수록된 작품은 1998년 발간된 박 대통령의 수필집 ‘결국 한 줌, 결국 한 점’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명예교수는 비평에 단 각주에서 “박 대통령이 6월 중국 국빈방문 중 칭화대 연설에서 수필집에 대해 언급하는 걸 보고 작품을 모두 찾아 읽은 뒤 글을 썼다”고 설명했다. 박 대통령이 한국문인협회 회원이기는 하지만 박 대통령이 10여 년 전 발표한 수필에 대해 본격적인 비평이 이뤄진 것은 이례적이다. 이 명예교수는 지금 시점에서 왜 박근혜인가에 대한 자세하고 친절한 답변도 실어놓았다. 그는 “박 대통령의 에세이가 정치인이라는 무의식적인 편견과 함께 피상적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지적으로 풍요함은 물론 높은 수준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며 “이런 사실을 정직하게 알리는 것이 우리 수필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 교수가 쓴 다른 글들도 눈부실 정도다. 박 대통령의 에세이가 출간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크게 조명을 받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선 “한국 수필계가 세계문학 수준에서 에세이 문학 장르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국 수필계를 평가 절하했다. 그러면서 “박근혜의 수필은 우리 수필 문단에서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일상적인 생활 수필과는 전혀 다른 수신(修身)에 관한 에세이로서 모럴리스트인 몽테뉴와 베이컨 수필의 전통을 잇는다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기자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으나 여하튼 ‘극찬’ 중의 ‘극찬’으로 들린다.

또한 그는 “박 대통령의 수필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부조리한 삶의 현실과 죽음에 관한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의 코드를 탐색해서 읽어내는 인문학적인 지적 작업에 깊이 천착하고 있기 때문에 문학성이 있는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며 “우리 문단과 독자들이 그의 수필을 멀리한다면 너무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고 기술했다. 이 정도가 되면 이 교수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부정할지 모르지만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보면 용비어천가 수준이다.

물론,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보면 인간 박근혜의 개인적 느낌을 묘사한 아주 단순한 글로 볼 수도 있지만, 이 바닥의 전문가인 이 교수는 달리 볼 수도 있다. 이 교수는 지난 2007년 한 일간지에 쓴 칼럼에서 피천득 수필을 평가절하하며 “과공(過恭)이 비례(非禮)인 것처럼, 과찬(過讚) 역시 비례”라고 질타한 바 있다. 그는 그러나 박 대통령의 수필에 대해선 “우리들의 삶에 등불이 되는 아포리즘들이 가득한,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진주와도 같은 작품”이라고 과찬했다.

지난 4월로 지령 700호를 맞은 국내 대표적 문예지인 <현대문학> 측이 서술한 후기는 얼굴이 부끄러울 정도다. 현대문학 측은 “절제된 언어로 사유하는 아름다움의 깊이를 보여주는 문인 한 개인을 넘어, 한 나라의 대통령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큰 기쁨”이라며 “에세이 문학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가지고 쓴 이 비평이 한국 에세이 문학의 재발견과 더불어 문학을 보는 진정한 시선 확장에 기여될 것임을 기대한다”고 적시했다. <현대문학> 측이 기술한 문장을 아주 쉽게 설명하면, 박 대통령의 수필을 우연히 접하게 돼서 기쁘고, 그런데 너무나 훌륭했고, 그래서 자신들이 자신있게 박 대통령의 수필을 (국민에게) 추천한다는 것 정도로 요약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필과 비평의 게재가 “작가의 동의를 구해 이뤄졌다”고 한 필자 주석의 한 구절은 그리 반갑게 들리지 않고 있다.

이달 초 박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 오찬 모임에 참석한 한 인문학자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괴테의 <파우스트>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며 “대통령께서 영원한 여성의 이미지를 우리 역사 속에 각인하셔서 우리 역사가 한층 빛나기를 기원한다”고 발언해 논란이 일었다. 한국시인협회가 박정희 이승만 이건희 정주영 등을 찬양하며 권력과 자본에 아첨하는 시들을 실은 시집을 냈다가 전량 폐기하는 소동을 빚은 것이 불과 5월의 일이다. 인문학의 죽음이 공공연하게 운위되는 한국사회에서 인문학의 ‘진짜 죽음’이 도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고, 이와 더불어 우리 문학 사회가 공백의 가능성 또한 잃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이번 기회에, 현대문학 또한 근대문학으로 이름을 바꾸는 것은 어떨지. 그러는 게 불가능하다면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박근혜와 그의 아버지에 대한 삶을 문학적으로 진지하게 통찰해 보는 것은 또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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