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무의 연애시집, 문단에 화제

이재무 시집 '한 사람이 있었다' 표지
이재무 시집 '한 사람이 있었다' 표지

시인 이재무의 시집 '한 사람이 있었다' (열림원)이 출간되자 문단 안팎에서 이야기가 만발했다. 이재무 시인이 연애시집을 표방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시적 본질을 탐색하여 문학평론가 유성호 교수(한양대학교 국문과)가 본지에 서평을 보내왔다. 이에 유성호 교수의 서평을 전재한다. /편집자 주

  몰래 와서는 존재의 흔적을 남기고 가는 것

  19세기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의 단편 「별」에는 첫사랑을 경험한 한 사내의 아련한 서사가 녹아 있다. 산정의 양치기 소년에게 식량을 가져다주던 아주머니가 휴가를 가자 주인집 소녀가 직접 목동을 찾아온다는 설정이 소설의 전반부이다. 후반부에는 우연한 이유로 귀가하지 못한 그녀와 밤을 지새우면서 별 이야기를 건네는 목동의 한없는 설렘과 감동의 순간들이 이어져간다. “저 숱한 별들 중에 가장 가냘프고 빛나는 별 하나가 그만 길을 잃고 내 어깨에 내려앉아 고이 잠들어 있노라고.”라는 마지막 문장은 모든 첫사랑의 충일감과 현실 불가능성을 동시에 암시해주는 낭만적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첫사랑’은 그동안의 삶을 송두리째 다르게 바꾸어버리는 관계의 충격이자, 그때 이전과 이후를 완벽하게 가르는 존재론적 사건이기도 하다. 이재무의 근작시집 한 사람이 있었다(열림원, 2022)에는 첫사랑의 그러한 떨림과 울림이 가장 순결한 통증과 희열의 감각으로 선명하게 재현되어 있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그 시절 그녀는 내 세계의 전부였다. 그녀로 인해 아프고 행복했다.”라고 했는데, 여기 고백된 ‘아프고 행복했다.’는 형용모순의 역설은 시집 전체를 관통하면서 ‘황홀한 고통’, ‘황홀한 재앙’, ‘가혹한 선물’, ‘고통이며 매혹’, ‘은총처럼 지옥처럼’, ‘아픈 축제’ 등으로 한없이 변주되어간다. 그 매혹이자 고통의 수원(水源)이었던 ‘첫사랑’의 순간을 담은 작품 「첫사랑」의 도입부를 한번 읽어보자.

어둠이 빠르게 마을의 지붕을 덮어오던

그해 겨울 늦은 저녁의 하굣길

여학생 하나가 교문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마음의 솔기가 우두둑 뜯어졌다.

  시인은 어디선가 자신을 “자주 감정의 솔기가 터지는 사람”(「솔기」)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도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마음의 솔기”가 뜯어졌다고 회상하고 있다. 첫사랑은 그렇게 우연처럼, 운명처럼, 섭리처럼, 더러 “통점을 불러오는 꽃”(「찔레꽃」)으로, 더러 “우아한 성장盛裝”(「신자처럼」)으로 불현듯 찾아왔다. 그 후 시인은 “너라는 감옥”(「장기수」)에 스스로 갇힌 채 “나를 연주하는 그녀”(「악기」)와 함께 때때로 “흑백사진 속으로 들어가”(「흑백사진」)서는 “수심 깊은 어린 시인이 되어”(「정오에서 두 시 사이」) 살아간다. 이후 “내 노래는 온전히/한 사람을 위한 것”(「노래를 위하여」)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 우연의 필연이야말로 “몰래 와서는 존재의 흔적을 남기고 가는”(「몰래 온 사랑」) 첫사랑을 이번 시집에 간절하게 소환하고 그녀에게 가장 빛나는 광채를 부여하게끔 한 힘이 되어준 것이다.

  내 의지가 아닌 것

  대체로 ‘첫사랑’에는 속된 세상과 완전하게 구별되는 순수와 무지가 개입한다. 영어로 그것은 innocence쯤이 아닐까 한다. 세계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와 세계의 실상에 대한 ‘무지’가 첫사랑의 발생론적 원천이 되는 셈이다. 거기에 대상 고유의 ‘신비’가 추가되면 첫사랑은 누군가의 생애를 완전하게 장악하여 항구적 그리움으로 몸을 바꾸어간다. 그러나 우리는 첫사랑이 강렬한 황홀을 이렇듯 선사한다 하더라도 결국 실현 불가능으로 귀결되는 경우를 더 많이 보아왔다. 다만 그것은 누군가를 발견하고 상실하고 끝내 그리워하는 흐름에 의해서만 흔적을 남긴다. 그런데 그것마저 시인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고 여러 번 말한다.

선혈 찍어 마음 그리는 것은/내 의지가 아니다 - 「운명 1」

나무가 그곳에 태어난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 「운명 2」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흐르고 움직이고 변하는 것이/사랑 - 「사랑의 열쇠고리」

  그러고 보니 첫사랑이 찾아온 것도, 오랜 시간 숨겨졌던 것도, 다시 현전하고 다시 사라지는 것도 모두 시인 스스로의 의지 탓이 아니다. 다만 그저 잠시 “네가 내 생을 반짝였거나/내가 네 생을 흘렀다는 걸”(「사랑」) 서로가 마주한 시간만큼 새겨갔을 뿐이다. 물론 그 오랜 시간 속에서 시인은 2인칭을 향해 한없이 구부러졌지만 말이다. 다음의 아름다운 시편을 읽어보라.

강은 강물이 구부린 것이고

해안선은 바닷물이 구부린 것이고

능선은 시간이 구부린 것이고

처마는 목수가 구부린 것이고

오솔길은 길손들이 구부린 것이고

내 마음은 네가 구부린 것이다

― 「구부러지다」 전문

  「로미오와 줄리엣」, 「소나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 첫사랑의 고전들은 한결같이 미완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 그들의 사랑은 운명의 개입으로 좌절되었기 때문에 더 우리의 기억을 강하게 촉진한다. 우리는 첫사랑 서사가 부여하는 이러한 순수 원형의 매혹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사랑은 순진과 무구에서 태어나 한없는 신비와 황홀로 천천히 번져간다. 이재무는 ‘강’이나 ‘해안선’처럼 구부러진 마음으로, 자신에게 찾아온 첫사랑을 빛나는 특권의 순간으로 기억하고 기록한다. 또한 ‘소년 이재무’가 간직해온 영상은 “두근두근 첫사랑이 살던/키 작은 동향집”(「몽상」)이나 그녀를 생각하며 한없이 이어져왔을 “강경에서 부여까지 난 사십 리 길”(「시간 여행」) 같은 지리적, 공간적 구체성을 갖추고 있다. 그 길을 걸으면서 시인은 “나의 길은 너를 향한 길”(「나의 길」)이라고 노래했을 것이다.

바람을 예민하게 느끼고

구름과 별과 달에 눈길이

머무는 습관을 심어준 사람

비와 눈 속을 걷게 한 사람

그 흔한 달개비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하고

기차와 여관과 해안선과 강안을 좋아하게 만들고

바다의 수평선과 연緣을 맺어준 사람

슬픔이 거름이고 힘이고 지혜를 준다는 것과

나를 울게 한 이는 나라는 것을 알게 한 사람

모국어와 사랑에 빠지게 하고

마침내 시를 쓰게 한 사람

― 「한 사람 1」 중에서

  시인은 그녀를 시의 발원지이자 귀속처로 삼으면서 “사랑은 한 사람을 사는 동안//만인을 피우는 일”(「한 사람 2」)이라는 성숙한 시선으로 나아간다. 그러니 그녀는 자연스럽게 “나를 울게 한 이는 나라는 것을 알게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사물을 예민하게 느끼게 해주었고, 아름다움과 슬픔과 모국어의 힘을 온몸에 심어주었던 그녀를 ‘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시인의 마음이, 첫사랑을 간직한 모든 이들에게 깊이 공명될 것이다. 아름답고 애잔한 빛을 뿌리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재무 시인
이재무 시인

  돌아가 마침내 나를 벗는다는 것

  그동안 이재무의 시세계는 경험적 실감을 중시하면서 그것을 서정의 구심으로 삼는 과정에서 생성되었다. 그는 시집 전체를 뚜렷하고 치밀한 구도로 짜는 일에 큰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의 시편들을 선험적으로 마련한 담론에 편입시키지 않고, 그때그때의 경험적 구체성을 통해 완성하는 쪽으로 자신의 이력을 쌓아왔다. 그런데 이번 시집은 일관된 ‘사랑’의 테마를 견인하고 있으니, ‘첫사랑’이 그러한 예외성을 그에게 허락한 것이다. 단테가 신곡에서 처음 베아트리체를 보았을 때 “나의 삶은 이제 전혀 새로운 것이 되었다.”고 한 경이의 순간을 이재무도 순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이번 시집은 이재무의 시를 관통해온 원천이 ‘사랑’이었음을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집 머리에서 “그 시절 그녀는 내 세계의 전부”였다고 한 시인은 다른 작품에서도 “한때 내 세계의 전부였던 이여,/그러면 안녕!”(「일몰의 바다」)이라고 노래하였다. 다시 한 번 그녀를 “내 세계의 전부”로 명명하면서, 섬광처럼 길을 밝히고 가뭇없이 사라진 첫사랑의 표지(標識)로 온전하게 부조(浮彫)한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진정한 사랑은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집착이 아니라 자기 극복”(「아포리즘」)이라고 토로했고, 시집 마지막 문장을 “돌아가 나는 마침내 나를 벗으리라”(「돌아간다는 말」)라고 썼다. 온전히 한 사람을 위해 부른 이 정결하고 순수한 노래의 힘으로, 그는 또 새로운 시편들을 써갈 것이다. ‘첫사랑’을 품고 ‘진정한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혹은 돌아가는 이재무는 이제 정말 ‘사랑’의 시인이다.(유성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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