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렬의 북한미술 산책>을 시작하며...

윤석렬 정부 출범 이후 연일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남북관계가 갈수록 경색되면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에 대한 열망은 갈수록 요원해지는 듯하다.

그러나 북한의 핵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과는 별개로 문화적 측면에서의 남북교류와 협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문화는 이념과 체제를 뛰어넘어 남북한 간의 이질감을 극복하고 상호공감과 연대를 형성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뉴스퀘스트는 ‘통일의 시작점은 문화적 교류’라는 명제 아래 문화를 고리로 남북대화와 협력의 접점을 마련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북한 미술 바로보기’ 시리즈를 기획했다.

북한 미술계가 체제 특성상 선전 선동의 도구와 수단일 뿐이라는 비판적 시각도 있지만 나름 회화성과 서정성 더불어 민족 동질성을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존재한다.

아울러 북한 미술가들의 그림을 통해 그 작품이 갖는 역사적 맥락을 들여다봄으로써 북한 미술을 이해하는 계기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기획 시리즈는 북한 미술 작품에 대한 품평과 감상평 및 작가의 이력과 인생 역정에 대해 소개하고 주변국들의 선호도와 세계 미술계의 흐름을 통해 북한미술의 특이성과 경향 및 발전상과 현재적 위상을 가늠할 수 있는 돋보기를 독자들에게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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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63  1983년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정종여의 화조화 색감은 참으로 깊이 있고 부드럽기 그지 없으며 그 자태는 오묘하고 우아하다. 그림 속의 모란꽃 담홍빛은 실제의 어느 모란꽃 보다 더 색상이 풍부하고 화려할 뿐만아니라 꽃의 형상은 더욱 귀티가 자르르 흐르면서도 푸근해 보인다. 하얀 모란꽃들은 선묘기법으로 그려서 연노랑 색채를 군데군데 미묘하게 입혔다.

선묘와 바림(몰골기법 중 농담으로 인한 같은 색계열의 점차적 색변이)의 대비가 가히 명품이다. 나뭇잎들은 저마다 오묘한 초록 빛깔들의 다채로운 향연이 볼거리가 풍성한 수가 새겨져 있듯 구성지게 펼쳐져 있다.

만약 이 꽃 그림이 집 밖에 걸려 있다면 솔거의 일화처럼 새들이 이 꽃을 실물로 착각할 정도가 아니라 이 꽃의 아름다움에 반해 꽃을 향해 돌진하거나 내려와 앉다가 미 끄러지는 접촉사고가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다.

농묵과 담묵의 초록빛으로 빛어낸 모란꽃 잎새들 숲의 향연 속으로 빨려들어가 풀내음을 만끽하게 한다. 북한의 박물관에서나 감상할 수 있는 작가의 큼지막한 모란꽃 대작은 참으로 귀하고 보배로운 작품으로서 대가의 기품을 되새겨주며 아울러 눈의 호사를 눈부시게 안겨준다. 실제로 이 그림은 거의 같은 크기의 비슷한 그림이 조선미술박물관 도록에 실려 있는 정종여의 저명한 대표작이다.

작가의 신들린 듯한 붓질의 춤사위와 색상의 다양한 숨결과 절묘한 색배합의 운치가 그윽한 향기처럼 온누리에 퍼져나가는 느낌이다. 모란꽃이 꽃중의 여왕으로 평판을 받고 있는 품격을 화폭에 오롯히 구현한데 더하여 이 모란 작품은 정종여의 실물 작품 중에서 가장 조화롭고 이상적인 색상을 구현한 화조화의 최고봉이라 찬탄받을 만하다.

이 그림의 모란꽃은 정종여가 즐겨 그린 모란꽃 중에서도 그 꽃무리가 수려하고 함박스러운 장중함이 특출한 수작이다. 그 꽃 빛깔들은 은은한 안정감을 주는 가운데 화사롭기 그지없다. 더군다나 꽃 수술 부분도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양새가 말미잘의 촉수처럼 생동적이고, 매우 섬세하고 정성스럽게 묘사하면서도 붓끝의 공력이 섬광처럼 동시다발로 번득이는 신기전같은 이미지를 풍긴다.

모란꽃은 작약과 꽃으로 둘다 꽃중의 여왕꽃으로 풍만하고 화려하여 여성들에게는 더없이 매혹적인 꽃으로 사랑받고 있으며, 동양의 전통으로는 고귀함과 영화로움을 상징하는 상서로운 꽃이다. 그런데 이 두 꽃은 외형적으로 우열을 가리기 어렵고 또한 분간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나무꽃은 모란꽃이고 작약꽃은 풀꽃이어서 꽃나무가 보이면 무조건 모란꽃으로 쉽게 식별이 가능하다, 모란꽃은 고귀한 황후의 자태를 지닌 꽃으로 현재 북한의 국화이기도 하여서 북한 화가들에게는 더욱 특별 대접을 받는다.

한때 측천무후의 낭군이었지만 사후에는 시아버지가 돼버린 기구한 팔자의 당태종이 신라의 선덕여왕에게 선사한 모란꽃 그림에 관한 에피소드 비사가 있다. 그 모란꽃 그림을 선물받은 선덕여왕은 모란꽃 그림에 나비와 벌 등 곤충이 없는 것을 보고 자신이 향기 없는 꽃임을 암시한 것이며, 자신의 남편이 없는 처지를 조롱한 그림이라고 푸념을 늘어놨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측 입장은 다르다. 모란꽃 그림은 그 자체로 부귀의 상징으로 선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했고, 이 그림에서처럼 벌과 나비 등 곤충이 없는 것에 과도하고 민감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이다.

◇ 정종여는 누구인가?

정종여의 가족사진 
정종여의 가족사진 

오늘날 북한 조선화의 찬란한 전범(典範)의 위업을 우뚝 세우는데 최고의 수훈 갑이자 1등 공신이 정종여라고 칭송하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영향의 폭과 깊이 그리고 지속성 측면에서 단연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인물이다. 달리 풀어 말하면 정종여의 북한 조선화를 향한 정성의 손길은 지대하고 연모하는 정은 지극하며 포옹하는 감촉은 끈끈하다.

  ​그는 조선미술가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1954년 평양미술대학에 초빙된 이후로 조선화의 우월한 화법과 기법들을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저서들을 발간했다. 그 당시의 저서(교수요강)로는 <채색화에 대하여>, <묵화에 대하여>, <채묵화에 대하여>, <조선화 재료에 대한 사용법> 등이 있다.

   정종여의 말년 화조화는 색채에서 말랑말랑하고 푹신한 촉감이 느껴질 정도로 곱고 부드러워 그가 소시적부터 그렇게 닮고 싶어 했던 신사임당의 색채 미학을 어느덧 뛰어 넘어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정종여는 일제시대에 구사하던 채색 기법을 더욱 발전시키고 싶었으나 해방 이후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모토 하에 일본화(채색화) 일소를 추진하던 당시 한국화단의 풍토와는 맞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북한에서의 그의 채색화 기법 추구는 민족적 개성과 색깔을 회복하려는 조선화의 대중흥 시대를 만개시키고야 만다.

※ 필자 정형렬은

고려대학교 철학과 졸업하고 동대학 기초교육원 과장,자유전공학부 차장을 역임했다. 현재 갤러리피코 대표로 북한미술에 대한 관심을 넘어 많은 북한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북한미술명작 200선 감상’(2016년 10월)을 발간했다.

안동문화예술의전당, 오산시립미술관, 인천시립 문화예술회관, 경남 창원시립 성산아트홀, 고성군립 진부령 미술관, 고성 DMZ박물관 등에서 '북한미술특별전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북한미술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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