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진섭 화가의 '추수'(112/78, 1940년대)
​길진섭 화가의 '추수'(112/78, 1940년대)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일제 36년 치하에서는 대다수 문화계 인사들이 자신의 생존 및 문화활동의 지속을 위해 부일(附日)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일부 인사들은 저항적 기백을 발휘하여 자신의 문화활동과 교육운동 속에서 이를 직간접적으로 노출하거나 은근히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일제시대 저항 문인과 시인, 그리고 저항 음악인의 활동과 작품은 종종 우리의 뇌리에 각인되었지만, 저항 미술가의 발자취는 볼 수 없었다.

일부 몇몇 미술 동인회 리더들의 저항 활동이 역사의 기록이나 전설 속에서만 활약을 찾아볼 수 있었고 해당 작품은 남아 있지 않았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은 길진섭 화가(독립운동 33인 대표중 한 분인 길선주 목사의 아들)가 일제의 수탈을 고발하는 회색조의 저항그림을 남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그 역사적 기록화가 오랜 동면에서 깨어나 여기 우리 눈 앞에 등장한 것이다.

남북한 미술관과 박물관을 통틀어 유일하게 남은 현존하는 일제 강점기 저항 작품이라서 길이 빛나는 우리 민족의 보배로운 문화유산으로 보존되어야 한다.

1940년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역사화의 발견은 우리 예술계 뿐만아니라 우리 민족의 문화적 자존심의 회복이요, 우리 선대에 대한 경외감을 일깨워 준다.

독일 점령 치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운동에서 저항 미술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져 그들이 전후 프랑스 문화계를 주도하며 이끌고 갔는데, 우리의 실정은 그렇지 못하여 우리 미술계의 자부심 한켠에 감춰진 상처처럼 존재하였던 터였다.

길진섭의 추수에서는 황량한 벌판에서 헐벗은 민초들의 삶의 질곡과 일제의 포획의 갈퀴가 할퀴고 간 농촌의 피폐한 현장이 전개되어 있다.

검게 타들어간 깡마른 체구의 농민의 표정과 긴장된 근육에서는 수탈 당한 빈약한 곡식 푸대, 이나마 억척스럽게 갈무리하고자 하는 결의가 꿈틀거리는 듯하다.

농부가 신고 있는 하얀 고무신은 일제 강점기 한반도에서 대량 생산 유통되었던 우리의 소박한 근대성의 상징적 소재로 된다.

그러한 현실을 등지고 있는 옆의 단아한 여인은 미래를 끌어안듯 아기를 품어안고 희망을 응시하면서 잔잔하지만 단호한 결의를 발산하고 있다.

누나와 까꿍 놀이를 하는 아이는 엄마와 같은 옷감으로 하의를 두르고 있어 모자지간의 일체감을 드러내주면서 토실한 엉덩이 살을 드러내 미래에 대한 긍정을 키우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을 엿볼 수 있고 암울한 주변의 실상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면서 반전을 이룬다.

어린 동생과 재미있게 놀아주고 있는 민첩한 누나는 화면에 활달한 역동성을 불어넣으며 긴장감을 풀어주고 있다.

여인과 어린이 옆을 밀착 호위하고 있는 강아지의 모습에서는 변치 않는 충직함이 느껴지면서 고립된 처지의 우리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있다.

농부의 옆을 지키고 선 황소는 비록 등가죽은 뼈에 닿아 있지만 우직한 표정과 다리 근육에서 힘과 끈기가 느껴진다.

묵묵히 우마차에 사람도 태우고 곡식도 실고서 목적지까지 끌고 갈 준비를 하고 있는 든든한 동반자임을 환기시켜 준다.

소의 등 뒤 황량한 평야의 다른 저편에서는 풍성하게 쌓여 있는 볏섬이 대량으로 어디론가 실려갈 채비를 하고 있는 장면이 목격된다.

길진섭의 추수는 다양한 등장인물과 피사체의 의미심장한 구도적 배치 및 암시와 비유를 통하여 일제가 강탈한 한반도에서 고혈을 빨아가는 현실과 좌절함 없는 불굴의 기상으로 희망을 피워내는 우리의 민초를 극적으로 부각시키면서 일제에 대한 의연한 저항정신을 도도하게 드러내고 있다.

또다른 “추수”의 감상 포인트는 19세기 초,중반 프랑스의 대표적인 미술사조인 바르비종파(Barbizon & Fontainebleau)의 대표화가인 장프랑스와밀레(Jean Francois Millet)의 추수(Harvest Resting-Ruth & Boaz)와 그의 대표작인 만종, 이삭줍기와 견주어 비교 감상을 하게 된다면, 우리의 “추수”가 실로 얼마나 대단한 작품인지 자긍심이 충천되어 전율처럼 느껴지게 될 것이다.

위의 추수라는 동명의 작품들 속에서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소박한 농민들의 일상을 담은 같은 공통분모도 존재한다.

그렇지만 길진섭의 추수는 밀레의 추수나 만종, 이삭줍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 민족의 한과 처절한 삶의 의지를 응축한 예술 이상의 역사화로서 채색된 색감에서부터 소재의 함축적인 사실표현, 묘사기법 등의 디테일(Detail)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실로 우리 근대화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월북하기 전의 길진섭 화가 
월북하기 전의 길진섭 화가 

◇길진섭은 누구인가?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 수록된 길진섭의 이력과 화풍에 대한 중요 부분을 발췌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길진섭에게 있어 1930~40년대 기본주제는 일본식민지로 전락된 생기 없는 산과 들 등 자연풍경이었다. 그는 김용준과 함께 1932년에 <목일회>를 조직하고 어용미술전람회와 대치되는 목일회전람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목일회> 자체도 그의 체포로 말미암아 해산되었다. 그후 다시 <백만회>를 조직하여 미술신인들을 키우는 사업을 하였으나 일본놈들의 방해 책동으로 계속하지 못하였다.

1937년 여름 평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전람회에는 10~40호 정도의 유화 40여점이 전시되었다. 대표적인 것은 <언덕풍경>(1937년 25호), <성밖의 여인들>(1937년 30호)이다. 이해 가을에 서울에 가서 1년간 문예잡지 <문장>의 편집원으로 그후 해방될 때까지 경성보육학교, 서울동구여자상업학교 교원으로 있으면서 미술품들을 활발하게 창작하였다.

1940년에는 전라남북도의 풍경을 그린 <유달산>(1940년 12호> 등 20여점의 작품을 가지고 목포에서 개인전을 하였고, 연이어 1941년에는 <해변가>(1940년 12호) 등 40점을 가지고, 1942년에는 <한강> 외 20점을 가지고 평양에서 각각 개인 전람회를 가졌다.

이 시기 창작한 작품들 역시 풍경이 위주로 되었다. 특히 그림들에는 일제의 대륙침략과 대동아전쟁 이후 강화된 우리 인민에 대한 약탈과 착취로 더욱 황폐화되어 가는 농촌과 헐벗은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이 사실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그림에는 회색조가 짙게 깔려 있다.

길진섭은 서울대 미술대학 초대 교수와 북한의 초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