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준 화훼도 (각 135-34 2점 1949년)
김용준 화훼도 (각 135-34 2점 1949년)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김용준은 화가가 되기 위한 중요한 요소로 ‘예술에 대한 양심, 열애, 고집’을 들었다.

그에게 예술가의 삶이란  “예술에서 산다는 간판을 건 사람이 아니요, 예술을 먹고 예술을 입고 예술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사람”을 의미했다."

김용준은 예술과 고매한 정신세계를 동일시하고 예술과 윤리적 기품을 연결시켜 보고 있기에 “위대한 예술은 결국 완성된 인격의 반영이다. 인간이 되기 전에 예술이 나올 수는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김용준은 남한에서 활동 당시 장승업의 회화미와 추사의 문인화풍에 순차적으로 경도되다가 이쾌대의 형 이여성과의 논쟁 후 그의 화풍은 색채주의를 지향하는 조선화 화풍으로 집대성되는 화법의 편력을 보인다.

도쿄미술학교의 서양화과 졸업 무렵, 김용준의 동양화에 대한 하대와 서양화가로서의 근거 없는 우월감은 조선시대 3대 화가인 오원 장승업의 기명절지도의 일격으로 무너지고 만다.

항아리의 입을 둥글게 그리지 않고 극단의 삼각으로 그려버린 오원의 패기에 입을 다물지 못했고, 해부해놓은 생선의 육질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생동감을 주는 그 강렬한 느낌 앞에서 전율했다고 한다.

이 때의 충격은 그가 후일 동양화와 동양화이론으로 관심을 선회한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고 술회한다.

김용준이 남종문인화풍의 추사를 얼마나 흠모했던지 “추사라면 표구소까지 뒤지고 다니며 그의 글씨의 외경 앞에서 떠날 줄 모르고 연필로 자형을 뜨는 김용준의 모습은 거의 종교적인 경건함을 풍기고 있다”고 그의 친구 소설가 이태준은 증언한다.

김용준과 이여성의 1941년부터 시작된 ‘속류화와 복고주의’ 테마 논쟁은 월북 이후인 50년대에도 몇차례 지속되었다고 전한다.

이 두 사람은 화가이면서 남북한의 근현대를 통틀어서 최고의 미술사가들이자 미술평론가들이라고 일컫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평가받을 이여성의 박학다식함 앞에서 김용준은 몇 수를 배우며 고개를 숙이는 시절도 있었다.

이여성은 고분벽화나 민화의 채색화 전통을 강조하고, 선과 수묵 위주의 회화를 색채와 빛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어 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입장이 문인화 혹은 수묵화에 심취했던 김용준의 입장과는 지향점이 달라 근본적으로 대립했다.

김용준은 한때 “채화(彩畵)를 찌꺼기 술이라면 묵화(墨畵)는 막걸리요, 사군자(四君子)는 약주​(藥​酒)요, 서(書)는 소주(燒酒) 아니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가장 단순하고 간결하면서도 만상의 철학을 담은 서도(書道)를 예술의 극치요 정화라고 보았다.

이같은 그의 입장과 성향이 이여성과의 논쟁을 통하여 채색화에 대해 포용적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굴곡의 여정을 겪는다.

김용준은 1920년대초 프롤레타리아 미술론(계급예술론)을 주장하던 시기와 서양화에 몰두하던 1920년대 중반 이​후 스스로 고백하기를 '외국 숭배열에 들떠 있는 시절'까지를 망라한다면 미술세계에서 범주화된 양극단의 스펙트럼을 모두 섭렵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김용준은 서구 모더니즘의 예술 사상 중 하나인 표현주의를 정신성의 표출로 이해하고 오원 장승업의 몰골기법의 문인화를 비롯하여 남종화풍의 사의화를 조선식 표현주의로 이해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러했던 그가 이여성과의 논쟁 후에는 워낙 서양화를 전공하여 색채에 대한 이해가 깊은 바탕도 있지만, 내심 이여성의 이론에 동화되고 그러한 기본 토대 혹은 틀적 구도를 적극 수용하여 향후 간결하고 선명한 채묵화(채색화와 묵화 혼용)의 조선화 스타일로 점차 전환한다.

이러한 지적이고 정서적인 자극의 계기가 향후 월북을 준비하게 된 전주곡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위의 1949년 작품인 월북 직전 김용준의 파초와 비파 그림은 그의 문인화와 채색화에 대한 견해가 상충 없이 융화되어 무르익은 표상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명필체 한문 문장을 나열한 문인화적인 형태를 취하기는 했지만, 소재 측면에서도 관념적인 사군자 스타일에서 벗어나 일상적으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파초와 비파를 택한 것도 친근하고 편안한 느낌을 안겨준다.

이와 더불어 색채주의 조선화 화법의 모드로 변신 중인 화가 김용준의 변곡적인 면모를 여실히 발견할 수 있다.

시원스러운 명암 대비의 잎새들과 힘 있게 뻗어나간 필치의 줄기와 가지, 선명하면서도 고상한 파초와 비파의 색감은 향후 북한에서 꽃피우는 조선화의 전형을 예고하고 있다.

파초와 비파 그림은 그의 벗에게 방문하여 야간에 선물로 그려준 세트 그림이다. 초록의 단색조 파초 그림 속에서는 자유자재로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직선과 곡선의 선묘와 변화무쌍한 몰골기법이 두드러지게 각인된다. 파초의 잎새 갈래마다에서 그의 필력의 기상과 힘이 맺혀 있음이 고스란히 다가온다.

한편 가지와 잎새 마디에서 분수처럼 솟구치거나 섬세한 화살촉처럼 뻗쳐나간 강약의 필선과 몽글몽글하게 잘 익은 탐스러운 비파 열매에 녹아 있는 미려한 주홍빛 색상의 농담 표현이 조화롭게 교차하고 있는 비파 그림에서 우리는 전통을 숭모하는 그의 예술적 경지와 활달하고 예리한 기량을 마음껏 느낄 수 있다.

김용준에 대해 그와 이웃해 살았던 김정일의 처 성혜림의 친구는 말했다. “김용준은 북한에서는 다시 보기 어려운 고결한 기품이 넘치는 신사로서 늘 중절모를 쓰고 한결같은 풍모를 지닌 분이었다.”

월전 장우성은 6.25 당시를 회고하며 “서울대 미대 학장이었던 김용준은 어느날 우리집에 불쑥 찾아와 병상의 나를 보고 무척 수척해졌다며 약처방을 써 준 뒤 몸조리 잘 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말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김용준은 예술세계에서 만큼 일상에서도 청빈하고 다감한 품성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김용준 화가 
김용준 화가 

◇김용준(1904-1967)은 누구인가?

조영복 광운대 교수의 김용준에 대한 평론을 살펴보면, 그의 이상적인 예술가상과 고고한 내면 세계를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다. “그는 거속(去俗)의 경지 속에서 예술의 도를 찾고자 했고, 장승업, 최북, 임희지 등등의 불우했던 조선 화가들에게서 자기 예술적 삶의 이상적 모형을 보았던 것이다.

그가 마지막에 노시산방을 버리고 의정부 단칸방에서 탈속적인 삶을 살았던 것도, 다 이 같은 거속의 경지로서의 예술가의 삶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것이 예술가의 인격이며, 이 인격이 곧 그림의 품격을 결정한다고 믿었다. ‘태양과 같은 강렬한 빛을 발산하는 작품’의 화격이란 이 고매한 인격에서 온다고 그는 믿었다.’(중략)

화가의 성격이 화폭에 재현된다는 생각도, 예술이 무엇보다 인간성의 표현이라는 맥락에 닿아 있는 것이다. 유형의 기교가 예술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무형의 인간 정신이 예술가다운 창조성과 번쩍이는 기교와 예술의 위대함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는 상업적이고 기교적인 흐름을 보이는 당시 화단에 대한 경계를 띤 발언이기도 했지만, 시종일관 유지했던 그의 예술가론 또는 예술의 존재조건이 집약된 발언이기도 했다. 위대하지는 않으나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하는 고집과 정열과 독창성이 그가 생각하는 예술가의 조건이었다.”

김용준은 1946년 서울대학교 동양화과 교수, 1948년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6.25 기간 중에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1950년 9월 월북하여 평양미술대학교 교수와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위원장, 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였다. 저서로는 <근워수필>(1948년), <조선미술대요>(1949년), <고구려 고분벽화>(1958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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