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과 절망의 인간군은 시들어 꽃잎이 떨어지고 줄기가 구부러진 꽃으로
도약과 희망의 인간들은 꽃잎이 빽빽이 들어찬 만개한 꽃들로
꽃의 수량에 비해 다소 작게 그려진 백자는 강인한 우리민족의 굳은 심지 그리고 결코 흔들리지 않겠다는 신념

이쾌대의 국화정물(63-46 1956년)
이쾌대의 국화정물(63-46 1956년)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이쾌대의 '국화정물' 그림은 56년 작품으로 해방 직후 그린 군상시리즈의 구도를 꽃정물화에 패러디하여 꽃을 의인화한 작품이다. 꽃 중에서도 국화는 맹추위 속에도 피는 꽃이기에 시련의 상황 한가운데 놓인 그 시대의 민중들을 대변하기에 적절한 주인공으로 보여진다.

좌절과 절망의 인간군은 시들어 꽃잎이 떨어지고 줄기가 구부러진 꽃으로 비유되며 도약과 희망의 인간들은 꽃잎이 빽빽이 들어찬 만개한 꽃들의 군상으로 형상화하였다. 꽃의 수량에 비해 다소 작게 그려진 백자로 하여금 강인한 우리민족의 굳은 심지, 그리고 결코 흔들리지 않겠다는 신념을 엿볼 수 있다.

바탕천의 울긋불긋한 장면은 피비린내 나는 폐허 속에 희생되어 버려진 우리민족을 상징하듯, 의인화된 절규와 한을 마치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용광로의 불길로 묘사한 듯 역동성을 불어넣고 있다. 노란색 화염빛과 음영처리된 잿빛이 혼합되어 뒤섞여진 전체적으로 붉은 빛깔은 불안하고 위험한 시대상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흰 국화꽃이 자주빛에 물든 형상은 핏빛으로 얼룩진 아비규환의 역사 속에 신음하는 군상 작품 속의 인물들을 닮았다. 그 속에서 빛나는 두송이의 노란색 장미로 하여금 아직 끝나지 않은 우리의 의지와 희망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의 형 이여성으로부터 미술사와 고전 및 전통문화에 대한 지식을 어린 시절부터 습득한 그였고 조선백자에 대해 정통하였기에 국화 꽃병인 백자의 빛깔과 문양을 다룬 솜씨도 가히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듯하다.

그림 속 백자의 흰 빛깔은 국화 꽃잎의 흰색과 잘 어울려 대가의 색감에 대한 깊이를 느낄 수 있고 노란색 국화 송이가 상단과 중간에 배치되어 자줏빛이 섞인 흰 국화들의 응집력을 강조하였다. 마치 바닥의 노란 화염 빛깔과 노란 국화송이들의 색감이 수미상관하여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기역자로 꺽여진 모서리를 경계로 좌측 꽃잎들은 땅을 응시하며 고개를 숙이며 지고 있는 형상이고, 우측면 쪽의 꽃잎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개화에 박차를 가하거나 이미 만발한 꽃잎들로 빼곡이 채워져 있어 구획을 기준으로 극명한 대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쾌대의 작품은 세화기법으로 그려지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역동적이며 대상을 생동감 넘치게 격렬하게 형상화하는 세계에 자랑할만한 근대 최고의 실력파 화가이다. 그는 인물화와 풍광화를 그릴 때에 표현에 다소 차이가 있다. 예컨대 인물화에서는 표정이나 주름살 등 세부묘사에 좀 더 디테일하게 표현한 반면, 풍광화에서는 더 굵고 거칠고 거침없이 묘사해 나갔음을 본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쾌대 국화 정물은 96년 조선역대미술가편람 저술 당시, 책에 서술된 대로 가족의 집에서 나와 선보인 작품이며, 캔버스 뒷면에 저자 리재현의 친필 싸인과 함께 ‘리쾌대 선생의 꽃 정물화는 매우 보기 드문 작품이다.’라는 품평의 글이 기록되어 있다.

리재현은 위 저작에서 ‘리쾌대의 형 리여성은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였으며, 조선화를 잘 그린 력사학자, 미술사가였다. 리여성은 <조선미술사>, <조선건축사>, <조선공예사>를 서술하였다. 리여성의 제자는 조준오이다. 리쾌대는 북과 남, 해외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미술가이다.’ 라고 리여성과 함께 리쾌대를 간명히 압축하여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 그림은 북에서 난 그의 아들 리한욱이 아버지 이쾌대의 북한 부인인 백은선 여사가 이 그림과 같이 찍은 인증사진과 함께 아버지의 소개글을 담은 단면의 전단을 제작하였다.

이쾌대 작품 확인서(부인 백은선 인증 사진-아들 리한욱 제작)
이쾌대 작품 확인서(부인 백은선 인증 사진-아들 리한욱 제작)

◇이쾌대(1913-1965)는 누구인가?

작가는 일제 치하 여러 동인회의 리더를 역임하면서 민족의식의 각성에 앞장서기도 하고 해방 직후에는 우리 미술사에 길이 빛날 군상시리즈 작품을 남기며 투철한 역사의식을 노출시키기도 하였다. 그후 6.25전쟁 직후에는 애틋한 가족사랑이 담긴 수십통의 편지를 남기면서 월북을 자처하였다.

이쾌대는 북한에서 해방탑 건립를 위한 협력작업을 위해 1947년에 초청받아 일찍이 방북한 적이 있었다. 그들 일행(리석호, 김정수, 조규봉 동행)의 방문은 기실 평양미술대학의 설립을 위한 물밑작업의 수행도 겸해졌다. 그는 그때 북한의 화단을 두루 체험한 소감을 밝힌 바 있는데, 북한의 화풍이 리얼리즘에 너무 경직되었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렇지만 그 당시 목격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대작들로부터 얻은 영감을 토대로 그의 군상 시리즈 4부작에 대한 기초적 기획이 성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친형 이여성이 북에서 유명한 미술사가이며 화가, 그리고 정치가로 활발히 활동한 가운데 그의 6.25 이후 월북은 형과 관련된 고려가 적지 않게 작용한 듯하다. 그의 최종 월북은 전쟁 이전 월북한 형님 전력의 영향과 6.25 당시 북한의 지침에 주도적으로 협력한 측면 등으로 인한 주변의 따가운 눈총과 형님을 공경하고 따른 면이 교차하면서 단행되었다.

그러나 이여성이 연안파 김두봉에 친화적인 발언(김두봉이 우리의 고대 역사에 해박하다는 칭찬 취지의 발언 등)을 한 영향으로 북한에서 숙청당한 1961년 이후 즈음하여 공교롭게 이쾌대도 위천공 등의 병앓이를 하며 그의 작품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비운의 형님과 공동 운명을 같이 겪게 되는 안타까운 그의 처지를 살필 수 있다. 그의 형은 숙청 기간 한동안 도자기 공장에서 일했다는 목격담도 전해진다.

이쾌대는 자기 주장이 강하였기에 북에서의 강한 이념적 압박은 그의 예술에 대한 견해와 순탄하게 공존하기 어려웠고, 그로 인한 굴곡진 행보와 시련으로 짧았던 생애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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