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만 화가의 '금강산' (131-51 1991년)
정영만 화가의 '금강산' (131-51 1991년)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정영만은 검은색 수묵 이외에도 회남색조나 암갈색 계열의 단색조로 물들인 산운도(山雲圖)를 이따금 그리곤 했다. 마치 단벌 신사가 가끔은 특별한 외출날 분위기를 바꿔 기품 있게 차려 입은 것처럼 말이다.

또한 일본 사람들이 특히 매료되는 경향의 시꺼먼 수묵으로 점철된 산과 구름 속에 일부 숲을 포인트로 처리하여 녹색의 목도리를 걸친 검정 양복의 신사처럼 투 톤 칼라의 선명한 대비로 화면에 파격미를 불어넣어 인상 깊게 화면을 분절시키기도 한다.

국가에서 발행한 정영만 화집에 실린 동일 구도의 비슷한 크기로 그려진 금강산 그림(1990년작)은 암갈색 계열에 가깝다. 이 구도의 금강산 그림은 정영만 그림 중에서 특히나 보기 드문 금강산 그림으로 화집에서와 실물에서 딱 두 번 밖에는 보지 못했다.

흔하게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특별한 버전의 금강산 회화라는 것이다. 하늘로 솟구친 바위산은 대머리 독수리의 두상처럼 하늘의 햇살을 반기며 큰 비상을 위해 날개를 접어 몸을 추스르는 동세를 취하고 있다.

​산맥의 정점에 바위산이 곡선의 형태를 띤 점도 이채롭다. ​보통은 날카롭게 부서진 칼날진 바위산이 병풍처럼 펼쳐지면서 곡선의 구름과 어우러져 춤을 추거나 구름에 포위되어 헹가레를 받는 형세를 품는다.

이 그림에서는 산맥에서 곡선과 직선이 함께 녹아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구름의 흐름 방향과 바위산의 뻗힌 형세가 대각선으로 교차하면서 탄탄한 대칭의 균형미를 선사하고 있는 점도 이 작품이 갖는 매력이다.

금강산의 어떤 특정한 지명의 바위산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바위산의 꼭대기 부분을 각도를 달리한 시점에서 보거나 예술적으로 왜곡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점은 수많은 북한 화가들의 금강산 화폭에서도 이 구도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하튼 정수리 부분을 둥글게 조각했다는 점은 묘한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석양 속에 잠기어 가는 고독한 나그네 무사의 두상 같기도 하고 말이다. ​바위산의 명암과 주름만이 검정색 선으로 묘사되었고 나머지 채색은 회색과 남색의 혼채 색상의 조화로운 농담으로 처리되어 있다.

때로는 빛의 반사를 받은 하얀 구름 파도가 바위산으로 돌진하여 부딪치며 파열음을 내는 것같은 환청이 들리는 듯하다. 바위산 저편에서는 용의 몸통과 꼬리같은 구름떼가 하루의 마지막 햇살을 즐기며 노닐고 있다.

이 금강산 작품은 90년대초 다양한 수묵 산수화를 실험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화가의 초창기 명품으로서 구도도 특이하고 난이도가 비교적 높은 작품에 속하여 화가가 즐겨 그리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정영만의 색다르고 각이한 명작과 조우하면서 담백한 동양적 풍미로 휘감긴 구름같은 여운과 저 하늘 위로 날아가는 새들의 날개짓처럼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기상, 그리고 깍아지른 절벽과 같은 매서운 절개가 표출되고 있음을 여실히 느낀다.

우리는 작가의 에너지를 받아 동양적 미학을 음미하고 동양적 단색 빛깔의 은은한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들어가 독보적 화가의 존재감을 만끽하게 된다.

정영만 화가 
정영만 화가 

◇정영만(1938-1999)은 누구인가?

정영만은 생존시 1995년과 1996년에 이어 1998년에 일본에서 열린 평화미술전람회에 참가하였고, 80여점에 달하는 작품을 가지고 1998년에 4월 6일부터 12일까지 일본에서 개인전람회를 진행하였다.

일본에서는 원래 채색주의 회화를 지향하고 선호하였기 때문에 정영만의 완전 수묵화 스타일 보다는 채색이 가미된 채묵화를 좋아하여 정영만은 이런 일본의 수요를 전시회에서 반영하였다. 정영만은 이런 류의 채색이 겸비된 추상 채묵화를 만년에 즐겨 그렸다.

일본에서 위의 1998년 전람회를 주최하면서 집행위원회는 “이번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봉의 화가로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인 정영만 선생의 개인전을 일본에서 개최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중략) 이번 일본에서 처음 열리게 되는 개인전이기에 선생이 중책을 맡아 다망하신데 불구하고 많은 역작을 창작해 주시었습니다. 기백이 넘치는 독창적인 화풍은 고대와 현대를 초월하고 국가를 넘어 보는 사람에게 고귀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개인전 화보집에서는 “억세고 활달한 필치와 강한 색조, 약동감 넘치는 구성과 독창적인 형상을 특징으로 한 화풍에는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의 감정이 흘러 넘치고 있다. 오랜 민족적 전통을 자랑하는 조선화를 현대적 미감에 맞게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조선화의 거장으로, 유능한 창작지도로서 인민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받고 활약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는 이 전시회 출품작들에 대해 높은 표현성과 세련된 기교, 형상의 독창성으로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과 이목을 집중시켰다고 전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그의 첫 개인전은 현대 조선화의 높은 발전 면모를 대내외에 널리 선전하고 구라파 위주로 되었던 중세 근대미술에 대한 도식화된 관념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가장 영향력이 큰 전람회였다.”고 자랑하였다.

이 전람회를 본 일본의 이름있는 평론가들과 세계 여러나라 인사들은 “이 전람회는 세계사적 의의를 가진 미술전람회, 사그러져가는 동양회화에 재생의 활력을 부어준 전람회”라고 찬양하였다. 또한 작품을 창작한 그를 가리켜 “세계적인 미술가, 단연 패권을 쥔 아세아의 자랑, 인간국보”라고 칭찬하였다.

전람회를 주최한 통일교의 박보희는 “정영만 선생은 조선의 국보인 동시에 세계가 낳은 인간국보이다. 이런 미술 천재는 몇세기에 한명씩 나온다. 정영만 선생의 이름은 일본과 남조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국보적 작품들은 응당 세보로서 일류급의 미술박물관들에 전시되어야 한다. 그의 개인전은 빠른 시일 안에 서울, 워싱톤, 파리, 런던 등에서도 열리여야 한다. 이렇게 되면 동방의 미술이 서방미술을 압도하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한편 그와 선우영이 거대 집체작을 공동작업하며 후배인 선우영이 정영만에게서 사명감이 활활 타오르는 열혈 작품활동을 지켜보면서 감동과 감탄의 도가니에 휩싸이고, 정영만의 비상한 집중력과 추진력에 대해 존경해마지 않는 선우영의 글이 있어 옮겨 전한다.

“1985년 4월 정영만 동무와 나는 대형조선화 <동해의 해돋이>를 창작할데 대한 과업을 받았다. 너비 18미터에 길이가 20미터나 되는 커다란 화폭이었는데 열흘 동안에 창작해야 할 긴박한 과제였다. 나는 기간이 짧다는 조바심으로 하여 작품에 착수하자마자 쉬임없이 붓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화면이 얼마나 컸던지 아무리 그려도 좀처럼 자리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영만 동무가 며칠이 지나도록 붓을 들지 않고 화면을 마주하고 앉아 사색에 잠겨 있는 것이었다. 날은 흘러 이틀 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다. 조급해진 나는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하고 물었다. 그는 "머리 속에 화면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러오."라고 태연스레 대답했다. 내가 다시 "창작기일을 연장해달라고 제기할까요?"하고 묻자 그는 "무슨 소릴?! 무조건 해야지"하고 단마디로 잘라버리였다.

그날 밤 자리에 누웠던 나는 '쾅'하는 소리에 놀라 깨여났다. 옆자리에 누웠던 정영만 동무가 보이지 않았다. 급히 창작현장에 달려가보니 글쎄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는게 아닌가. 3개의 발판을 설치한 맨 위층에는 색감을 가득 탄 5개의 소랭이가 있었고 그 앞에서는 정영만 동무가 번개같이 붓을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3층 발판을 헐고 2층으로, 2층 발판을 헐고 또 1층으로, 1층에서 다시 밑으로...

이렇게 한층 한층 발판이 내려지면서 해솟는 하늘과 원경의 바다가, 또 다음은 근경의 거세찬 파도가 자기의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전투는 다음날 마지막 하루 오전 10시경에 쉬임없이 계속되었다. 드디어 동해의 물결이 파도쳐 설레이고 아침햇빛을 받아 붉게 물든 해금강의 전경이 실경처럼 펼쳐졌다. 나는 다시 한번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어디서 저런 힘이 생겼을까? 한쪽 폐가 없고 위궤양과 심장병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이, 오래전에 로동능력을 상실했다고 진단을 받은 사람이 12시간 동안 단 1분의 휴식도 없이 이처럼 훌륭한 화폭을 창조했다고 과연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오직 당이 맡겨준 창작과제를 한치의 드팀도 없이 무조건 수행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과 혁명적 창작 기풍이 낳은 화폭인 것이다.”

정영만은 북한의 20세기 후반기 조선화의 대가로 현대조선화를 발전시킨 선각자로 평가를 받는다. 37년 동안 만수대창작사에서 활동하면서 북한의 조선화를 현대적 미감에 맞게 발전시킨 정영만의 작품은 간결한 구도와 강렬한 색대조, 대담한 필치로 독특한 개성을 이룬다.

정영만의 작품은 약동감이 넘치는 구성과 독창적 형상, 활달한 필치와 강렬한 색채, 사실주의적 묘사력과 다양한 기법이 특징이다. 정영만은 국제미술전람회에서도 1973년 금메달과 최우수상을 받은 바 있으며, 이후 유럽과 아시아 등에서도 금강산의 풍경을 묘사한 작품들로 여러 차례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1938년 강원도 원산에서 출생하여 62세가 되던 해인 1999년 별세한다. 그는 짧은 생애를 통해 북한 화가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총망라하여 모두 수여함으로써 단명에 대한 아쉬움을 위로받으며 화가로서 불꽃같은 인생을 불살랐다.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