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골법의 적극적 사용을 통해 서양 미술과의 차별성 강조

리석호의 목련 (77.5x44cm 1961년 조선화)
리석호의 목련 (77.5x44cm 1961년 조선화)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수묵 몰골화(문인화)는 전문 도화서 화원이 아니더라도 선비들이 취미로 그리는 사군자화 등을 통칭하였다. 그런데 이와같은 몰골화에서는 재주와 연마가 부족한 수묵화가들이 어설프게 몰골 기법을 화선지에 적용했을 때, 얼치기 사의화(寫意畵-뜻을 담은 그림)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마치 현대 미술에서 타고난 솜씨와 갈고 닦은 실력이 설익은 이들이 구상회화를 건너뛰고 추상화나 미니멀리즘으로 대뜸 직행하여 혁신적인 표현주의 예술로 포장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그러나 그러한 부정적 경향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과는 별개로 창의성이 매우 뛰어나서 새로운 회화의 지평을 열면서 보편적인 수준에서 공감을 얻게 되면 다른 부족한 점들을 상당히 상쇄시킬 수도 있는 것이 동양적 추상화로 비약할 수 있는 몰골화이다.

몰골화에 대해 이렇게 비판과 지지의 양면성이 공존했던 측면들은 북한 화가들이 몰골화에 곱지 않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면서도 갑론을박하며 몰골화를 자신들만의 개성적인 사실주의 회화의 우군으로 붙잡아 두려고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목련꽃 그림은 리석호 그림의 집약적 총화로서 북한 화첩에 표지 그림으로 등장한다. 그만큼 그의 특징적인 사의적 몰골화 스타일을 제대로 보여 주는 대표작이다.

목련 나무에는 만개한 꽃, 반쯤 핀 꽃, 꽃 몽오리 및 움트는 새순들이 공존해 있다. 이는 하얀 꽃잎을 활짝 드러낸 장년기, 붉은 꽃술을 선보이기 시작하는 청년기, 노란 껍질 속에서 꿈을 키우는 청소년기, 그리고 나무 껍질에 달라붙은 새순을 자그마한 점을 찍은 모습으로 표현하여 보호받는 유년기의 구성원으로 각각 상징하였으며 한 나무뿌리에서 단계적으로 아름답게 피어나는 다양한 나무꽃들의 모습을 각이하게 형상하였다.

하강하는 활짝 핀 꽃과 상승하는 꽃 봉오리 군상들의 대칭적 대비, 굵은 나뭇가지와 여린 나뭇가지의 농담 조절을 통한 원근법 적용, 경사면을 미끄러지듯 활강하며 자유스러운 영혼의 붓놀림과 매섭게 뻗어나가는 힘찬 기백, 그리고 먹선의 직선미와 곡선미의 조화와 균형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그림이다.

리석호 화법의 이론적 후견인은 김용준 화가이고 실질적 지원자는 김정일 위원장이다. 그들의 글을 읽어보면 리석호와 그들이 왜 서로 우호적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김위원장은 리석호의 화첩을 국가출판사에서 발행해 주었고 대규모의 국가전시회를 개최해 주어 국보급 작가에 대한 극진한 예우를 다했다.

김위원장은 1977년 ‘몰골법을 배합하여 발전시켜야 한다’라는 글에서 몰골법의 적극적 사용을 장려하고 이를 통해 서양 미술과의 차별성을 강조한다. “몰골법은 묘사 대상의 본질적 특성을 단붓에 집약적으로 나타내는 함축성 있는 표현력을 가지고 있고 힘 있고 아름답고 활달한 여러 가지 필치로 화가의 창작 의도와 감정을 잘 나타낼 수 있는 보다 풍부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기법이다.”라고 리석호의 화법을 추켜 세우며 그의 창작활동에 대해 심오한 독창성을 인정하고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김용준은 1957년 ‘우리 미술의 전진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사실주의와 몰골적 사의기법의 조화로운 접목을 꾀한다. “사실주의 전통과 그 방법상 문제에 있어서도 봉건 사회에서의 봉건적 제약성과 봉건적 이데올로기의 작용을 고려함이 없이 종교적 형식을 가진 작품이라는 간단한 결론만으로 비사실적 범주에 휘몰아 넣기도 하며 세밀하게만 그렸다고 구체적인 묘사로 보며 사의적 방법은 비사실적 주관주의로 보는 것도 옳지 못한다. 대상 사물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하여서는 어느 기간 형태 파악에 충실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나 작가의 형태 처리가 능숙하게 되면 다시 대상 사물의 진실감을 강조하기 위하여 요약 처리하는 사의적 방법은 로련한 예술가들로 하여금 높은 수준의 예술 작품을 낳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들을 정당하게 해석하지 못하고 근시안적 척도로서 대한다면 결국 우리 미술의 본질적인 특색은 어느 곳에 있는 지 찾을 길이 없게 되고야 말 것이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예술가의 독창성(오리지낼러티)을 견고하게 확립하려면 독자성과 발전성, 보편성의 연결고리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풀어 말하면 자기만의 개성과 화폭의 분위기와 내용을 질량적으로 변화 및 진화시키고 그것의 보편적 가치 획득이 순환 사슬로 연결되어 작가의 명성과 실력을 향상시키며 화업의 신세계를 구축한다는 선순환의 의미로 해석해본다.

이러한 흐름이 악순환으로 가게 될 경우는 화가의 상업적인 성공과는 별개로 치열한 자기 예술 세계의 확장과 심화가 아니라 단조로운 아성에 틀어박혀 안이한 배부름에 주저앉고 만다.

경매회사에서 쏟아져 나오는 특정 유형의 고가 그림들은 마치 현대의 영리한 개념화 작가들이 자신의 주도적 아이디어와 통솔 하에 하청을 주어 대량 생산해내는 종류의 미술 패턴의 경향성과 별다른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또한 우리 미술계의 단색화에 대한 과도한(?) 가치 부여가 미술가들의 엑소더스 쏠림 현상을 가속화하고, 우리 미술세계의 협량함을 드러내며 스스로 특정 유행에 갇히는 것을 우수한 전통으로 고수해 나가는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몰골법의 부정적 사례에 비추어 경계해야 한다. 고상한 여백미만 남고 메시지와 의미가 증발되어 버리면 예술의 특정한 미적 측면만 부각되어 한낱 장식이나 배경으로 전락할 수 있음도 경계해야 한다.

리석호와 그의 부인 
리석호와 그의 부인 

◇리석호(1904-1971)는 누구인가?

김용준은 조선화의 사의성(寫意性)이 ‘비사실적 주관주의’라는 견해에 대해 리석호의 개인전을 보고 난 뒤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리석호가 그린 월남의 풍광은 어느 하나 우리의 심금을 두드리지 않은 것이 없다. 한 가지 묵색에서 수십길 물의 깊이를 느끼게 하고 푸른 하늘과 누른 대지를 감촉케 한다.

(중략) 세상에는 얼른 보아 알기 쉬운 그림들이 있다. 형태 묘사가 정확하고 설명이 친절한, 누가 보아도 알기 쉬운 그림들이 있다. 그러한 그림은 좋은 그림이다. 그러한 그림들을 일러 능품(能品)이라 한다. 그러나 그림이란 이러한 것에 국한하지 않는다. 능품 위에 묘품(妙品)이 있고, 또 그 위에 신품(神品)도 있다. 얼른 보아 알기는 어려우나 두고 볼수록 좋은 그림이 있다.”

리석호는 '조선화 채색에 대한 의견'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먹은 형상의 아름다움을 그려내는데 있어서 색깔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힘을 더하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유한 빛깔을 가진 먹과 다양한 채색이 잘 어울리게 한다면 우리는 더욱 화려하고 풍부한 화면들을 창조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리석호에 대한 필자의 평론이다. 그의 붓끝의 착지 과정과 붓질의 착색 흔적을 보면 천상의 빛깔들이 어김 없이 새처럼 혹은 민들레 홀씨처럼 사뿐히 내려앉아 있다. 맑고 고운 그 빛깔들은 천상의 목소리라고 비유되는 노랫소리를 들을 때의 떨리는 감흥처럼 눈부시고 싱그러운 파장력을 지니고 눈에 마주치는 순간 부드럽고 감미로운 전율을 불러 일으킨다. 형형색색의 투명하고 고상한 그의 색감은 천연 그대로의 자연의 미색을 더욱 신비롭고 고도로 아름답게 진화시키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리석호 화첩에서 언급한 그에 대한 평가와 관련된 예술론은 남과 북이 문화 영역에서 이견의 여지 없이 공감하고 동반하여 지향할 점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기에, 같이 음미해 보고 공통분모의 인식 영역을 확장해 보고자 한다.

“그는 전통적인 조선화의 몰골기법을 시대의 요구와 우리 인민의 미감에 맞게 완성해 나가는데서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하여 우리나라의 주체적인 미술발전에 크게 기여한 우수한 예술가의 한 사람이다.

50년대 중기에 리석호의 창작적 독창성은 뚜렷한 양상을 띠고 무르익기 시작하였으며, 이때부터 그는 시대의 정서가 풍만한 조선화 몰골 작품을 열정적으로 창작하였다. 그는 조국의 아름답고 수려한 자연을 화조화와 풍경화의 형식으로 폭넓고 깊이 있게 그려내였으며 일부 인물화도 그렸다. 그의 크지 않은 매 화폭마다에는 화가의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우리 인민의 고유한 민족적 정취가 깊이 스며있다.

50년대말과 60년대에 리석호는 화조화, 정물화들과 더불어 주제 영역을 더욱 넓히기 위하여 풍경화 창작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하여 성산 백두산과 금강산을 비롯하여 명승지와 사적지들을 탐승하였으며 항일 투사들의 고매한 정신을 체득하면서 사적지의 의의있는 자연풍경을 정력적으로 습작하고 그것을 우수하게 창작 완성하여 세상에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 창작된 <백두산>과 <청봉> 그리고 <해바라기>는 국가미술전람회에서 각각 1등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이러한 축적에 기초하여 장기적인 창작계획을 구상하고 더욱 왕성한 창작의욕을 가지고 실현해 나갔다.”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