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우리식 유화 이론적 창시자, 사실주의 아카데미즘 회화의 정통 교육자

문학수 화가의 '기타치는 소녀''(52-36, 80년 11월)
문학수 화가의 '기타치는 소녀''(52-36, 80년 11월)
르누아르의 '기타치는 여인'(1987년)
르누아르의 '기타치는 여인'(1987년)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르누아르의 '기타치는 여인'(1897년작 리용 미술박물관 소장)이라는 작품이 있다.

르누아르의 작품 중에 유일한 기타 연주그림으로 토레스 모델을 닮은 기타로 양손 모습이 기타를 어느 정도는 연주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보여지고 기타현 등의 세부적 묘사는 하지 않았다.

문학수의 '기타치는 소녀'는 르누아르의 그림과 전체적인 주제와 양식미, 여성과 기타라는 공통분모를 품고 있다.

르누아르 작품은 인상주의적인 색채와 사조의 기풍을 충실히 반영한데 비해, 문학수의 그림은 당시 시대상으로 보았을 때, 흔치않던 소재인 기타를 야외의 한적한 장소에서 소녀가 몰입하여 연주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르누아르와 마찬가지로 기타의 넥크(neck)현들의 세부적인 묘사를 하지 않은 것 또한 매우 흡사한 표현방식이다.

소녀의 얼굴과 손의 세부묘사는 차분한 살색톤 위에 부분적으로 굵은 터치로 질감을 통한 면불할적 묘사를 한 것으로 수준 높게 덧칠해간 것을 엿볼 수 있다.

소녀의 보랏빛 스웨터의 반짝이 점들은 꿈결같은 밤하늘의 은하수 별들이 총총이는 듯 회화적 색채미가 수려하고, 오른쪽 상단 모퉁이에서 서광이 비추는 초록빛 숲속에 둘러쌓인 아늑한 자연속 배경도 작품의 품격과 운치를 높여주고 있다.

르누아르의 기타치는 여인은 풍만한 관능적인 여체를 통하여 생명의 근원을 탐구하고 화사한 여성미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이에 비해 문학수의 기타치는 소녀는 소녀가 실제 기타 연주를 진행해가는 생동적인 모습들과 작가의 감흥이 혼연일체로 어울려 운율과 리듬을 타며 잔잔하게 펼쳐진 작품이다.

문학수의 '처녀 용해공'(50.5-41.5, 1983년)
문학수의 '처녀 용해공'(50.5-41.5, 1983년)

과연 문학수답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명작이다. 이 작은 화면의 공간 제약성은 사라지고 다인물 군상의 구도적 특성을 깔고서 살아 숨쉬는 현장성을 지닌 복잡다단한 대작(大作) 같은 스케일의 효과가 발휘되고 있다.

내적으로는 감동적인 스토리를 담은 역동성 넘치는 명화의 속성을 아우르고 있는 본바탕 때문이다.

이 화면은 인물마다의 개성적인 몸짓과 표정 속에 공간적인 착시성 뿐만아니라 감상자를 당시의 상황으로 거슬러 타임머신을 태워 보내면서 시간적인 현기증도 일으킨다.

이 화면은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 같은 사실주의 화면 속의 어둠침침한 배경 색조이지만, 중심은 노동을 통한 보람과 환희를 느끼며 여유있는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의 순박한 표정과 희망의 불꽃이 노란 별빛같은 스파크를 튀기며 화면을 환하고 강렬하며 영롱하게 채색하고 있다.

일터 현장에서의 용솟음치는 삶의 의지와 화면을 가로지르며 꿈틀거리는 긴장미가 시선을 와락 잡아당긴다.

한편 작가의 깊이있는 사색과 통찰, 조자룡 창 놀리는 듯한 현란한 실력과 민중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뿌리며 시대를 열정적으로 살아갔던 문학수라는 대가의 진정성에 흠뻑 매료된다.

팔뚝을 걷어붙이고 쇳물을 붓는 미모의 처녀 얼굴에서 자신만만한 미소와 몸에 익은 단련된 자긍심이 풍겨 나온다.

담배를 꼬나물며 처녀의 작업을 지긋하게 바라보는 작업반장의 눈빛에서는 대견함과 흐뭇함이 흘러나온다.

처녀의 뒤편에 서있는 남성에게서는 반사되는 불빛을 가리고 시선을 집중하느라 머리 위에 팔을 얹고 처녀의 안위를 걱정하는 듯한 오빠같은 심경이 녹아 있기도 하다.

달빛이 슬며시 새어들어오는 좌측 편에서는 달덩이같은 용광로와 대치되는 희미한 등불에 힘입어 불철주야 땀을 적시는 인부들의 불굴의 투지가 어리어 있다.

이 주인공 여인을 보니 여전사와 같은 기개가 흘러 넘친다. 병약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전장터의 군인으로 출동했던 효녀 여전사 뮬란이 연상되기도 한다.

한편 이러한 여전사의 사례들은 우리나라 역사에도 종종 등장한다. 광개토대왕의 약연 왕후는 왠만한 장군 못지 않은 용맹함으로 수많은 적들과 맞서 싸우던 여장수였다.

또한 연개소문의 여동생인 연수영은 당나라 함대 100여척과 당수군 2만여명을 섬멸한 고구려의 이순신 장군으로 칭송받는다.

안시성 전투의 승리에 기여했던 많은 여인 무사들은 첩보병과 호위병, 전투병으로 활약하며 기꺼이 조국을 위해 희생을 주저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행주치마에 돌덩이를 담고서 일본군들을 향하여 목숨걸고 저항했던 많은 무명의 아낙네들도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문학수 화가 
문학수 화가 

◇문학수(1916-1988)는 누구인가?

문학수는 변월룡과 동갑내기 벗이었지만 늘 그의 제자를 자처하고 그로부터 배우기를 감격스러워하는 겸손의 화신이었다. 그도 일본 유학파(가와바타 미술학교 졸업, 이중섭의 문화학원 1년 선배)이자 재학중인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일본에서 자유미술가협회(일본의 대표적인 아방가르드 미술협회로 구상과 추상의 구별 없이 자유로운 창작을 지향) 활동에 참가한 당대의 미술 수재였다.

이 당시 그의 환상적인 말 그림이 훗날 이중섭의 흰소 그림에 영감을 주었다는 것은 미술계의 정설이 되어 있을 정도로 그는 다양한 회화의 세계를 넘나들은 백전노장 같은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북한 미술계의 가장 위대한 교육자로서 두터운 신망과 명성을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누리고 있다. 미술교육자로서 늘 배우고 탐구하고 실천하고 제자를 사랑하고 키우려는 간절하고도 투철한 그의 사명감은 가히 존경받을 만하고 과연 이런 면에서 그를 따를 만한 미술교육자가 있을까 하는 마음도 든다.

그는 북한에서 우리식 유화의 이론적 창시자이고 구현자이며, 사실주의 아카데미즘 회화의 정통한 교육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세부(디테일)가 부족하다느니, 주체미술 확립기에 북한 화단의 거의 모든 인사가 다함께 그 길로 가보았던 조선화로의 전향에 소극적이었다느니 하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그의 화법은 세밀하다기 보다는 두터운 마띠에르의 힘센 유화 붓질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간 손맛이 물씬 느껴지는 정통 유화가의 진수이다. 그는 조선화의 발전에 깊이 공감하고 조력을 다하면서도 조선화에 몸담지는 않고 유화 발전의 한길로 매진하였다. 그런 측면 때문에 향후 그가 좌천되는 빌미가 제공 되었으리라 유추해본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도 그의 공식적인 주요작품 활동이 70년대초에 멈추고 만다. 그 시기는 공교롭게도 주체사상 확립과 함께 그의 절친인 조선미술가동맹위원장인 정관철을 비롯한 거의 모든 북한 화단의 유화가들도 의기투합하여 조선화 발전을 위하여 정력을 투여하는 시기였는데 문학수는 그 대열에서 이탈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 교수(스승) 문학수에 관한 내용을 옮긴다. “그는 학생을 무척 사랑하였고 새싹을 귀중히 여기고 계통적으로 키워내기 위해 정열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실기교수에 의의를 부여하였다고 할만치 제자들에게 전문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후대 교육사업에서의 공로로 그는 1961년 4월에 부교수의 학직을 수여받았다. (중략)

문학수의 작품에서 색조는 형상의 목적에 맞게 구체화되였고 따라서 한붓한붓 옮겨진 유화구는 내용을 밝히는 수단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색의 특성과 조색과정에서 색의 변색되는 요인들을 학술적 탐구와 실천적 경험으로 체득한 그는 오래 전해져야 하는 미술작품들의 색구현을 기술적으로 담보하도록 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돌리였다. 이에 대한 요구성을 자신에게도 제기하고 창작지도와 후대교육에서도 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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