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익 화가의 왕찔레꽃과 금어초(아스틸베꽃) 정물화(51-38 연대미상)
한상익 화가의 왕찔레꽃과 금어초(아스틸베꽃) 정물화(51-38 연대미상)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찔레꽃은 장미과에 속하는 꽃으로서는 아담하고 정갈하지만, 이 찔레꽃은 왕찔레꽃(일반 찔레꽃의 10배 정도 크기)으로 잎사귀가 무궁화처럼 넓적하고 투명한 빛깔로 우아하면서 여유롭다.

왕찔레꽃은 일반 장미와는 달리 꽃수술이 백일홍처럼 그 고운 속모습을 펼쳐보이고 있어 꽃이 간직하고 내포한 미적 장점을 요모저모 드러내고 있다.

찔레꽃은 그 꽃말에 청순미를 대표하며 고향과 가족을 그리는 마음으로 묘사되어 있어 우리의 옛 유행가 가사에 자주 등장하고, 일제 강점기 때에도 독립지사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달래주었던 친근한 꽃이었다고 회자된다.

찔레꽃 줄기에는 큰가시와 바늘모양의 붉은 가시가 나 있다. 보통은 20m 높이의 나무까지 줄기가 오르고 그 규모에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이 작품에서도 보여지듯이 옹기형의 자주빛 화병이 작아 보이는 것 또한 왕찔레의 커다란 꽃망울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는 꽃잎을 리드미컬하고 질감 어리게 마띠에르 기법으로, 꽃향기가 운율처럼 진동하게 흘러넘치듯 표현했다.

또한 금어초와 아스틸베꽃의 화려한 색감과 작은 꽃잎들과도 잘 어우러지게 조화시켰으며, 배경과의 콘트라스트 대비를 도드라지게 돋우워냈다.

특히 바탕면과 배후면은 금박과 은막 빛깔을 혼용 배합하여 고아하고 환상적으로 고급지게 연출해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왕찔레꽃 주변의 노란 소국(小菊)을 제외하고 긴 화형으로 꽂혀 있는 꽃들은 금어초와 아스틸베꽃들로 보인다.

금어초(金魚草)는 입을 뻐금거리며 헤엄치는 금붕어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아스틸베꽃은 작은 잎에 불규칙한 톱니가 있고 꽃은 매우 작고 분홍색, 흰색, 빨간색 등 여러 가지 색상이며 관상용 꽃꽂이 재료로 많이 쓰인다.

한상익 화가의 왕찔레꽃(5호 연대미상)
한상익 화가의 왕찔레꽃(5호 연대미상)

한상익의 꽃정물화에서는 꽃들이 한바탕 흐드러지게 춤을 추는 요정과 날으는 새들로 변환되어 아름다운 난장의 영상처럼 전환된다.

과묵한 화가 자신이지만 그의 집념은 열정적인 무희들의 춤사위처럼 꺼질 줄 모르고 한평생 불타올랐다.

이 꽃정물화는 세찬 바람이 불어와 꽃병이 요동치고 꽃잎이 사선으로 흩날리며 더불어 꽃향기가 진동하고 있는 모습이다.

붓터치나 질감묘사가 나비와 새들의 몸짓처럼 부드럽고 사뿐하며 물감의 마띠에르도 방금 막 칠한 흔적처럼 생신함이 느껴지고 생동감이 넘쳐난다.

벽쪽의 배경색은 회갈색과 밑바탕색은 회색빛 계열로 청아한 달빛처럼 신비롭고 교교함이 흐르며 노란 수술이 심어진 흰 잎새의 하늘거리는 우아한 자태가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한편 조선미술박물관 도록에도 그의 정물화 대표작으로 왕찔레꽃 그림이 선보였지만, 이 그림과는 대비되게 차분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율동미가 가라앉았다.

마치 정장을 차려입고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는 말쑥한 처녀의 모습으로 비춰져 자연스러움이 덜 느껴진다.

북한 화단이 조선화만의 독창성과 개성미에 함몰되고 여념이 없었을 때도 한상익은 유화도 우리식으로 창조미를 가꾸어 탄력있고 산뜻한 조형미와 맑고 투명한 색채미의 재구성에 새롭게 불을 지펴 우리식 유화의 품격을 조선화와 동격으로 격상시킨 우리식 유화의 선봉장이자 지휘자이다.

모(사)작은 도저히 한상익의 그런 힘과 기가 뒷받침 될 수가 없고, 소나무 잎들도 네잎 크로바처럼 뚝뚝 찍어 바르고 휘돌리는 순발력 있고 신명나는 감각의 붓질을 꽁무니조차 뒤따라갈 수 없다.

마치 물촉새의 번개같은 움직임과 비둘기의 굼뜬 동작과의 차이 정도로 비유된다.

한상익 자화상(25.5-18.5 연대미상)
한상익 자화상(25.5-18.5 연대미상)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차분하고 기품있는 잘생긴 외모에 끌린다.

게다가 그의 인생 역정을 접하게 될수록 정의의 수호자로서 남자다운 기백이 투철하고 예술가로서 불굴의 집념과 불타는 정열이 이글거리며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자상함과 겸손함, 소박함이 배어 있는 그의 품성에 흠뻑 매료된다.

일생을 자기 소신대로 굽힘 없이 살면서 자신의 예술적 재능과 피땀어린 노력을 다바쳐 멋지게 펼쳐간 의지와 신념의 화신이다.

이 자화상 작품은 청년기에서 중년으로 접어드는 시점에 그려진 모습 같다.

53세에 결혼했던 그였기에 결혼 전 청자켓을 입고 자유분방하게 살았던 시기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단아하고 훤칠한 훈남이지만 강렬한 눈빛과 강골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지사형 예술인의 인상이다.

어찌보면 생애 자체가 늘상 도전적이고 과감한 삶을 살았기에 나이에 관계없이 영원한 청춘으로 불릴만하다.

청년기의 골상과 풋풋함이 그대로 간직된 희귀한 그의 자화상은 조각작품 같이 살결의 각이 살아 있고 붓끝의 힘이 넘치는 보배로운 작품이 아닐 수 없다.

한상익 부인 초상화(32-24 1970년)
한상익 부인 초상화(32-24 1970년)

한상익은 갖은 시련과 악조건 속에서도 유니크한 개성미의 화가로서의 소명을 불철주야 이어나간 것이 늦깍이 결혼한 화가 부인의 든든한 내조 덕분이었다는 사실은 북한미술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결혼 적령기 시절 정온녀 화가의 청혼을 마다하여 비운을 안고 살아가야 했지만, 정온녀와 한상익 화가 모두 본연의 화업에 전념케 하여 둘다 많은 업적을 남기게 된 것은 결과적으로 우리 미술사로서는 불행 중 다행이 되었다.

한상익의 인물화 중에서 이 초상화 그림은 유난히도 차분한 붓질에서 우러나오는 중후함이 어리어 있고, 심지 깊은 여인의 표정이 은근히 살아 있는 그림이다.

이 초상화는 투터운 마띠에르가 깔리면서 그의 정성과 공력이 듬뿍 배어 있어 독보적이고 은은한 안정감이 돋보이는 인상적인 작품이다.

그의 부인은 남편의 재능이 방향성을 잃지 않게 지켜주고 꽃피워 세계적인 화가로 도약하는데 한평생 헌신적으로 기여하여 한결같이 듬직한 친구같은 이미지를 풍긴다.

한상익 딸 한명혜 초상화(5호 연대미상)
한상익 딸 한명혜 초상화(5호 연대미상)

한상익은 50대에 결혼을 하고 슬하에 아이가 생기지 않자 양자를 들인다.

그 수양딸이 바로 이 초상화의 주인공인 숙녀이다. 그의 딸 이름은 한명혜인데 밝은 은혜가 깃들어달라는 소망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딸 또한 미술대학을 졸업하였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깊은 그녀가 장성하여 유복한 남편을 만나서 훗날 생활의 여유를 찾은 뒤 그의 부친 한상익의 그림을 사모으는 효심을 보여왔다고 전한다.

한상익의 딸도 화가가 되어보니 아버지의 그림이 존귀하고 특출나다는 점을 알기에 더욱 그러한 마음을 먹게 되었을 것이다.

비록 수양딸이긴 하지만 딸이 심지가 굳건하고 성격이 반듯하며 나름의 미모도 지녀서 좋은 사람과 결혼도 하게 되어 더욱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수양 외동딸은 한상익 부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서 한상익에 대한 애틋한 추모의 정이 각별하다는 전언이다.

가까이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닮는다고 하였던가? 이 수양딸도 아버지의 훤칠하고 강직한 인품을 닮은 인상이 역력하다.

의협심이 강했던 아버지, 자신이 옳다고 여긴 뜻을 한평생 굽히지 않고 밀고 나아간 지사형 선비같은 아버지의 얼이 딸에게도 어렴풋이 스며든 느낌이다.

자신의 고귀한 딸의 초상을 그려서 간직하고자 하였기에 화판에 싸인도 단촐하게 ‘한’ 자만 써놓았고 연도도 기재하지 않았다.

1995년 중국 연길에서 전시회 개최 후 한상익(가운데)화가와 김흥수(오른쪽) 권옥연 화가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1995년 중국 연길에서 전시회 개최 후 한상익(가운데)화가와 김흥수(오른쪽) 권옥연 화가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 한상익(1917-1997)은 누구인가?

한상익이 꿈꾸는 이상적인 화업의 세계는 어느 누구도 꺽을 수 없었고, 그에 관한 고집과 뚝심은 철옹성과도 같이 견고하였다. 누구도 넘보기 어려워 하였기에 그를 이해하고 따르려는 주변 사람들과 후배들에게는 든든한 울타리였지만, 그의 새로운 시도에 뭔가 흠결을 찾아내려던 사람들에게는 걸고 넘어서기가 두려운 존재였다.

일본 미술대학 유학 시절 일본 교관과의 분쟁으로 본의 아니게 자퇴했지만, 그의 동료 친구들과 심지어 일본 교수들까지 그의 재능과 의기를 아끼어 그의 신상에 해가 없도록 보호하고 돌봐줄 정도였다.

1995년 12월 함흥 후배 김흥수와 권옥연이 열어준 중국 연길 전시회는 감격의 환희와 회한의 눈물바다로 출렁였다. 전시도록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국토는 갈라져 있지만 따스한 인정과 마음은 통했다. 우리는 기쁨으로 만났고 눈물로 헤어졌다.’

남한 최고 화가가 된 후배들이 그 머나먼 타국 땅까지 가서 자비를 들여 진심어린 존경과 뜨거운 사랑을 담아 전시회를 열어준 사례는 일찍이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일화로 회자될 것이다.

그의 말년인 1995년 3월에 국가 차원에서 개최해준 평양국제문화회관 전시회에 남겨진 감상록들에는 그가 예술가로서 사랑받는 비결이 담겨 있다. “유화의 고유한 기법들을 살리면서도 조선사람의 민족적 감정과 정서에 맞게 밝고 선명한 조선화의 화법을 배합시킨 그의 절묘한 유화작품들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안겨주었다.’ ‘로화가 한상익의 고심어린 탐구와 노력이 엿보이는 전람회다. 어쩌면 그렇게도 색이 독특한지, 유화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특이한 색으로 우리 인민의 민족적 정서와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 전람회를 본 재중동포인 중국 연변미술관의 법인대표이며 부관장인 리영인은 ‘한상익 선생님의 미술전람회를 보고 조국의 유화미술의 높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거침없이 휘두르는 신필의 붓끝이 그려낸 조국산천의 풍경은 실로 아름답고 실물을 보는 것같은 느낌을 줍니다.’

또한 전람회를 취재한 기자는 ‘그는 우리 인민이 좋아하는 맑고 은근하면서도 부드러운 색을 얻기 위해 정열과 지혜를 깡그리 바쳤다.’ 라는 찬사의 기사를 남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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