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변히 보여줄 것 없는 빈곤한 전체주의 체제
절대 권력자에 충성과 결집 보여주는 의식
‘극장국가’가 민생 외면 땐 막장국가 될 수도

북한이 노동당 8차 대회를 계기로 2021년 1월 14일 밤 개최한 열병식. [사진=조선중앙통신]
북한이 노동당 8차 대회를 계기로 2021년 1월 14일 밤 개최한 열병식. [사진=조선중앙통신]

【뉴스퀘스트=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 】 평양 남서쪽 외곽에는 미림비행장이란 작은 규모의 공항이 있다. 붉은 흙밭에 활주로 하나가 달랑 놓인 이곳은 본래 군사공항이지만 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 열병식 훈련 때다.

이번 겨울에도 1만명 넘는 군인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무기체계와 방사포, 전차 등 장비가 동원돼 군사퍼레이드 준비에 부산했다. 미국의 첩보위성도 미림비행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동향을 살폈고, 위성사진을 토대로 “2월 8일 북한군 창건 75주년을 맞아 대규모 열병식을 개최할 것”이란 정보판단이 일찌감치 나왔다. 영상에 북한 군인들이 대형을 이뤄 ‘2.8’이란 글자를 새기는 걸 연습하는 게 포착된 때문이다.

열병식에 대한 북한의 집착은 상상을 초월한다. 엄청난 규모의 병력과 장비를 동원하는 건 물론이고 좌우 행렬은 물론 군인들의 보폭과 팔 높이 등을 칼같이 맞추느라 장시간에 걸쳐 연습을 벌인다. 콘크리트 활주로에 군화발로 몇 달 동안 행진연습을 하다보면 관절이 못쓰게 되거나 허리 등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 다반사라고 행사에 동원됐던 군 출신 탈북민들은 귀띔한다.

문제는 혹한의 겨울에도 예외 없이 열병식 훈련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번 2.8 열병식을 위해 지난해 말부터 채비가 시작됐고 미림비행장에는 병력과 장비 뿐 아니라 지휘부용 대형천막 등이 들어섰다. 한 탈북민은 “과거 2월 16일 김정일 생일에 맞춰 열병식을 준비하느라 추위에 떨고 동상까지 심하게 걸렸던 일이 악몽처럼 떠오른다”고 말했다.

행사에 동원되는 주민들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 한복 차림으로 나서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무리 두터운 내복을 껴입는다 해도 견디기 힘든 한계상황을 맞는다고 한다.

행사 연습장까지 교통편이 제대로 없어 새벽부터 길을 나서야하고 현장에서 2~3시간 기다리는 건 예사라고 한다. 퍼레이드를 벌이는 군인들을 향해 환호하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서다. 행사에 쓰기위해 일일이 집에서 만들어간 붉은 꽃술을 하루 종일 흔들어대는 연습을 하다보면 온 몸이 얼어붙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군인과 주민 고통이 이어지지만 북한 당국은 열병식 행렬을 멈추지 않고 있다. 특히 김정은 체제 들어 한 해에 한 두 차례 거르지 않고 대규모 열병식 행사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20년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을 맞아서도 심야에 열병식을 개최했다. 불꽃놀이와 드론, 전투기 야간비행 등으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려는 의도였다. 3개월 뒤인 이듬해 1월에는 8차 노동당대회 기념 열병식을 열었고, 지난해 4월에는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주년 열병식을 개최했다.

이런 움직임은 대규모 병력⋅장비 동원을 줄이고 꼭 필요한 계기에만 첨단 장비 위주로 군사 퍼레이드를 벌이는 서방 국가의 추세와 비교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열병식을 강행하는 건 북한이 변변히 내세울 게 없는 상황과 맞닿아 있다. 경제난과 대북제재 등이 겹쳐지면서 파국 상황을 맞고 있는 터라 산업이나 문화⋅예술, 스포츠 등 보여줄 만한 게 없는 현실에서 핵과 미사일 등을 내세운 군사 퍼레이드에 매달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김정은 체제 들어 열병식은 최고지도자에 대한 찬양⋅선전에 더욱 무게가 실렸고, 그에 대한 충성과 결집을 보여주는 현장으로 자리매김 했다. ‘극장국가’ 북한의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
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행해지는 전통의식에서 착안된 극장국가라는 개념은 본래 물리적 강제력이 아니라 화려한 의식이나 공연 등을 통해 체제의 면모를 과시함으로써 통치를 이어가는 체제를 말한다.

하지만 북한은 억압과 강제력을 동원하는 방법으로 군사 퍼레이드를 주기적으로 펼치고 있다. 군인 뿐 아니라 주민과 여성⋅학생까지 혹한의 날씨에 광장에 내세우는 것이다.

민생을 제대로 챙기지 않는 북한식 극장국가는 자칫 막장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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