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해바라기'에 견주어도 손색 없어

1972년 황영준의 해바라기(60호)
1972년 황영준의 해바라기(60호)
 1990년 황영준의 해바라기(108-63.5)
 1990년 황영준의 해바라기(108-63.5)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해바라기 그림 중 황영준의 해바라기 그림을 바라보면 기존의 정물화와 풍경화의 관념을 뛰어넘어 회화의 새로운 지평으로 아우르는 통섭과 융합의 신선한 기운을 불러일으킨다.

황영준의 해바라기는 고흐의 해바라기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명작으로서 두 그림을 비교해보면 두 그림들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참신한 감흥을 샘솟게 한다.

두 해바라기 그림은 동서양 해바라기 그림을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이지만, 황영준은 야생의 해바라기를 보고 그렸다면 고흐는 화병 속 해바라기를 그린 점에서 오히려 그 원초적 에너지의 느낌은 황영준의 해바라기가 훨씬 더 강렬하다.

황영준의 살아 있는 해바라기에서는 잎사귀와 줄거리가 해바라기 꽃 못지 않게 비중 있는 존재감으로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점도 이채롭다.

황영준은 생명의 근원감을 강조하기 위해서 짙푸른 녹색을 지배색으로 돌출시키고 진녹색과 연녹색의 색채 원근감을 탄력적으로 살리며 노란색 잎을 포인트로 표현하여 사실감을 극대화했다.

앞으로 툭 튀어나온 해바라기 잎의 색깔은 빛을 머금은 녹색 융단의 신비로운 색감과 질감을 지니고 있어 주연같은 조연으로서 주연 해바라기를 떠받치며 환상적인 콤비를 이루고 있다.

반면 고흐는 태양빛에 노랗게 익어가는 가을 들판의 황금색을 해바라기에 입혔고 푸르른 배경색을 사용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노랜색과 푸른색 계열의 기조색들을 적용시키며 다소 정형화된 색상을 배열한 느낌을 주고 있다.

비유컨대 황영준의 해바라기에는 그리스 신화 속 메두사의 머리카락이 꿈틀거리고 고흐의 해바라기에서는 사자의 갈기털이 흩날리고 있다. 메두사의 머리카락은 한올 한올이 전부 뱀이고 뱀의 눈동자가 박혀 있는데 황영준의 해바라기는 한잎 한잎이 휘감겨지듯 요동치며 연녹색의 형광색 점이 박혀 있어 마치 뱀의 눈알과 마주치는 전율이 전달되는 듯 흥미롭다.

메두사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도 반한 무서운 미모를 갖춘 여신인데 그녀를 보는 사람은 그 즉시 모두 돌처럼 굳어버린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황영준의 해바라기는 그 메두사처럼 세부를 매우 세밀하고 율동적으로 묘사하여 관람자의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고 그를 사로잡고 포섭시키는 강력한 마력을 발산하고 있다.

황영준의 해바라기는 수줍어하는 동양의 여인처럼 한결같이 고개를 숙이며, 그 전면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고 살짝 가려진 얼굴의 일부만을 노출하고 있다. 한편으론 마치 사람처럼 관람자를 향해 공손히 인사하고 겸손의 미덕을 강조하는 동양적 정체성의 화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고흐의 해바라기[사진=네이버캡쳐]
고흐의 해바라기[사진=네이버캡쳐]

반면 해바라기의 전면 모습이 주조를 이루는 고흐의 해바라기는 ‘태양의 꽃’이라는 별칭답게 태양을 향하여 적극적으로 다가가려는 듯한 역동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어 사뭇 동서양의 고전적 특성미의 확연한 대비를 느끼게 한다.

국화과인 해바라기는 작은 들국화가 무럭무럭 자라나서 닮고 싶었던 둥그런 태양의 형상과 자신의 정열을 표현하는 수북한 사자의 갈기를 지닌 거대한 국화로 변모한 모습에 다름 아니다.

40호 정도 크기의 하단의 황영준 해바라기 작품은 해바라기의 정면 모습을 좀더 볼 수 있어 위 작품에 대한 다소간의 갈증을 덜어준다. 다만 촘촘한 형광색 불빛처럼 번득이는 메두사의 눈알 같은 묘사력은 약하여 작품의 긴장도가 미약해짐으로 인하여 상호간 보완재 역할을 담당해주고 있다.

하단의 해바라기 작품에는 평화를 희구하는 상징인 비둘기들이 아래로 날아들고 있어 마치 해바라기가 거대한 성채같은 착시효과를 일으키면서 웅장한 위용을 돌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생동감 있고 입체적인 구도를 연출해주고 있다.

 황영준(가운데 붓 든이)과 그제 제자 인민화가 리근화(오른쪽)
 황영준(가운데 붓 든이)과 그제 제자 인민화가 리근화(오른쪽)

◇황영준(1919-2002)은 누구인가?

황영준은 1세대 조선화가의 막내답게 패기 왕성한 조선화의 젊은 피였고, 북한 조선화에서 점묘 기법을 성공적으로 창안한 창시자이자 북한 화단내 저항의 아이콘이었다. 실제 자기 주도의 창의적인 화법을 발양하여 인정을 받는 과정에서 한때 평양 화단의 중심부로부터 잠시간 유배살이를 하기도 하는 인생 역정을 겪는다.

또한 그는 금강산이 온갖 경이적인 다채로움과 신비스러움으로 점철되어 있기에 어느 누구 못지 않게 금강산 화가로서 열렬한 애정을 뿜어내어 그 모습을 화폭에 일평생 자기식으로 고집스럽게 발자취를 남겨 왔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은 황영준에 대해 개성적인 화풍을 명백하게 수립한 많지 않은 미술가들 중의 한사람으로서 조선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의 개성적 화풍에서 주요한 특징은 독특한 선묘이며 선묘 방법에 의한 형상의 완결을 보장한 것이다.

대상 표현의 기본수단으로 되고 있는 선묘는 전통적인 선묘기법에 토대하고 있으나 그의 작품에서는 일정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주요 묘사 대상의 형태 처리를 선묘 위주로 하면서 짧은 선과 점으로 형상을 완결짓고 있는 것이다. 색채 처리에서도 자기 식의 독특한 형상 방법을 가지고 있다.”

작고한 위 조선역대미술가편람의 저자 리재현의 화첩 작품에 드러나 있는 황영준과 다른 화가들에 대한 회고의 단상을 살펴본다. “현대 조선화에서 리석호, 정종여, 최도렬, 황영준 등을 선배로 보고, 그후 리률선, 천창원, 안상목이 련결되고 지금은 정영만, 박창섭, 정창모, 리창, 김승희, 선우영, 김춘전 등이 확고히 진지를 구축했다. (중략)

황영준 선생은 1931년에 서울에 올라와 김은호의 화숙에서 리석호, 김기창 등과 함께 조선화를 배웠다. 5년간의 미술수업은 그에게 전통적인 기법과 개성적인 화풍을 따라 배울 수 있게 한 지중한 시기였고 장차 미술가로서 운명을 결정지어 주었다.

전쟁시기 월북하여 한때 미술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리근화, 유충상 등이 제자이다. 평남도와 남포시 미술가동맹 위원장을 하였고, 말년에 장철 문화상의 도움으로 통일거리의 편리한 집으로 옮겨와 송화미술원 고문으로 여생을 보냈다. 혈육과의 상봉이 마련되였던 때에 로환으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황영준 선생은 한때 주제화도 그렸으나 선과 점으로 이어지는 자연풍경에 특기를 나타내여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다. 늘 만성적인 기관지 천식으로 고생했지만 건강관리를 잘해서 팔십고개를 넘어 살았다.

일구월심 바라던 통일의 날을 보지 못했고 사랑하는 딸과는 종시 만나보지 못했다. 외세에 의한 민족의 비극이 이 한 가정에도 가슴 아픈 상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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