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먹칠하다'의 유래는...

면신례에서 먹칠 벌칙
면신례에서 먹칠 벌칙

【뉴스퀘스트=김승국 전통문화칼럼니스트】 강릉의 향토지인 『임영지(臨瀛志)』에 주문진 나루에 살았던 여성 옥도(玉道)는 용모가 아름다웠으나 나이 20세에 일찍이 남편을 잃어 부모가 그를 불쌍히 여겨 다른 곳으로 재혼시키려 하였으나 죽기를 무릅쓰고 이를 거절하고, 5번이나 머리를 삭발하고 얼굴에는 먹칠하는 등 스스로 추하게 보여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얼굴에 먹칠하면 아름다운 사람도 흉하게 보이거나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다. 

  창피를 당하거나, 체면이 여지없이 깎일 때, 혹은 명예, 체면 따위가 더럽혀졌을 때 “얼굴에 먹칠한다”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하기야 멀쩡한 얼굴에 먹칠한 모습이 보기 좋을 리가 없다. 이 말이 어디에서 유래되었을까? 이 말의 유래를 밟아 올라가려면 먹과 붓(筆墨)이 필기도구로 흔히 쓰이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먹과 붓이 필기도구에서 사라진 현대 시대에도 ‘얼굴에 먹칠한다’라는 표현이 사회 전반에서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얼굴에 먹칠한다’라는 표현은 먹과 붓이 필기도구로 쓰인 이후 아주 오랫동안 사용된 일상 용어였단 것이 분명하다. 과거 문헌에서 전통사회에서 사람들을 놀리거나 수치감을 주려 할 때 먹을 붓에 발라 얼굴에 몰래 묻혀 놀리거나, 놀이의 벌칙으로 ‘얼굴에 먹칠’했던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놀이의 벌칙으로 얼굴에 먹칠을 하였다

  궁중무용인 정재(呈才)의 ‘포구락(抛毬樂)’은 포구문(抛毬門)을 중앙에 두고 여령(女伶)인 무원(舞員)이 좌우편에 양쪽으로 갈라서서 문 상부에 뚫린 풍류안(風流眼)이라는 구멍에 나무로 만든 공 채구(彩毬)를 차례로 던져 넣어 승부를 가리는 춤이다. 무원(舞員)이 던진 채구가 풍류안(風流眼)이라는 구멍에 들어가면 무원(舞員)중 1인인 봉화(奉花)가 상으로 꽃을 주고, 만약 들어가지 못하면 무원(舞員)중 1인인 봉필(奉筆)이 벌로 무원(舞員)의 뺨에다 먹점(墨點)을 찍어 춤을 바라보는 관객들에게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렇듯 아름다운 여기(女妓)의 얼굴에 먹점(墨點)이 찍혔으니 웃음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포구락(사진 제공=국립국악원) 
포구락(사진 제공=국립국악원) 

  이와 비슷한 놀이는 투호놀이(投壺戱)라 할 수 있다. 투호놀이는 서울의 양반 가정이나 궁중에서 하던 놀이이다. 명절날이나 집안에 큰 잔치가 있어 일가친척이 많이 모일 때 여흥으로 후원 마당이나 대청마루에서 귀가 달린 큰 항아리를 놓고 동서로 편을 갈라 그 속에 편을 표시하는 이름다운 무늬가 색색으로 물들어 있는 청·홍의 화살(矢)을 던져 넣은 후에 들어간 화살의 수효로써 승부를 결정하는 놀이이다. 화살이 적중하여 항아리 안에 들어가면 춤추며 기뻐하고, 하나도 넣지 못하면 얼굴과 이마에 먹칠해서 벌을 주어 놀렸는데 이 놀이는 명절만 되면 세시 민속놀이로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포구락 먹점(사진제공=국립국악원)
포구락 먹점(사진제공=국립국악원)

  조선조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에서는 공식적인 행사는 아니지만, 신입생 환영회 격의 신방례(新榜禮) 또는 접방례(接房禮)가 있었는데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합격 축하를 빌미로 과도한 대접을 요구하기도 하고, 체면이 손상될 정도의 무리한 과제를 주어 과제를 수행하지 못한 신입생에게 벌칙으로 가볍게는 얼굴에 먹칠하는 등 갖은 괴롭힘을 하였다고 한다. 공식적인 행사는 아니지만, 유생들 사이에서 관례상 치러지던 전통이었다. 

백합이 썩으면 잡초보다 더 악취가 난다

  이처럼 ‘얼굴에 먹칠한다’라는 표현은 재미있자는 뜻에서 놀이의 시합에 져서 주는 벌칙의 차원을 넘어 자신과 본인이 속한 집단의 명예와 직결된 표현이다. 자신의 실수와 잘못으로서 본인은 물론 자신의 부모님과 가족, 모교, 자기 직장과 집단, 더 나아가 나라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더러 본다. 게다가 문제는 본인이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낸다는 것이다. 만절(晩節)을 지키지 못하고 노추(老醜)를 보이는 몇몇 지도자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런 생각이 확신으로 다가온다. 셰익스피어는 '백합이 썩을 때 그 냄새는 잡초보다 훨씬 고약하다.(Lilies that fester smell far worse than weeds.)”고 하였다. 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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