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정물화'는 소박한 자연미와 완숙한 인공미가 동시에...

정온녀 화가의 '여인 누드'(80.5-59 1945년 6월)
정온녀 화가의 '여인 누드'(80.5-59 1945년 6월)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북한의 신사임당이라 칭송받은 그녀가 해방을 맞이하기 전 옷을 벗고 우아한 핑크빛 망사를 걸친 채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 그림은 45년 6월 해방 직전에 그려진 작품으로서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 속 여인은 북한의 현대판 ‘황진이’라고 비유하여 불려져도 무방할 정도이다.

이 그림은 월북 전에 그려진 그림으로 그 당시 서명 싸인은 ‘정’과 ‘온’자에 중복된 이응‘ㅇ’이 가운데에서 매개가 되어 연결되며 포개진 채 두 글자를 위아래로 이어주는 필체를 띠고 있다. 이 그림은 정온녀가 월북시 북한으로 가지고 가서 추후 훼손된 부분을 정성껏 덧칠하여 복원한 그림으로 귀중한 장소에 오랜기간 보관되어져 왔었다.

이 작품은 누드화에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전통 유화기법을 따르고 있다. 바탕은 여러번의 겹침을 어두운 색조로 잡아주고 여인의 백옥 같은 흰 피부와 백색 씨스루(See Through) 천을 통해 여체의 미를 극대화시킴은 물론이고 콘트라스트(Contrast) 대비를 통해 드라마틱한 여인의 조형미를 표현하였다.

씨스루 대비는 아래에서 위로 향하고 있으며 아래 왼쪽 대퇴부의 아름다운 곡선은 투영된 라인만 보일 듯 말 듯 하며 그림 가운데 부분에 완전히 드러나 있는 양손과 가녀린 긴 손마디의 표현은 이 그림의 백미라 할 수 있겠다.

또한 백색 씨스루(See Through) 천으로 살짝 가려진 풍만한 가슴의 실루엣과 부러질 듯한 여린 쇄골의 표현, 그리고 전체적인 비율과 완성도는 가히 압권이다. 이 누드화는 우아함과 섹시한 여체의 미를 한 단계 끌어올린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수작임에 틀림없다.

이 그림 속의 여인이 정온녀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일제시대인 43년 미인대회에서 1등이 없는 2등을 차지한 경력의 그녀의 실제 미모에도 손색이 없고 골상과 눈매가 많이 닮아 있다. 화가가 그리는 보통의 인물화는 자화상이 아닐지라도 자신의 모습을 투사하는 경우가 많다.

김흥수 화백은 일본 유학시절 정온녀와 교류하였는데 일본인 건물주가 구실을 붙여 화실에서 생활하던 그녀를 곤경에 처하게 했을 때, 칼을 들고 목숨을 걸다시피 일본인과 의기 있게 대처함으로써 정온녀가 쫒겨나지 않게 도왔다고 회고한데서도 미루어보면 남성을 사로잡는 매력이 충분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대개의 여인 누드화의 얼굴은 의식적으로 화려하게 미인형으로 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드화의 경우 여체의 신비한 아름다움을 돋보이려고 하는데, 여성 인물의 미모를 부각시키면 관심의 초첨이 노류장화(路柳墻花)의 요염한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어 격이 떨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그림의 여인은 미모가 출중하면서도 전체적으로 기품있고 고아한 이미지가 물씬 풍기고 있다. 그것은 그녀의 눈동자가 우수와 한을 머금은 표정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울컥 눈물을 쏟아내기 직전의 표정인 듯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고 눈 흰자위의 반이상이 붉게 충혈되어 있다.

이 그림은 태평양 전쟁이 극한으로 치달을 무렵, 암울한 식민지 조국의 현실이 우리의 삶을 뼈속 깊이 고통의 참화 속으로 몰아넣은 시기에 탄생한 그림이지만, 시대를 앞질러간 한서린 여인의 기념비적 누드화이다. 인물의 배경은 암울한 감옥의 복도를 연상시킨다.

그전에 김관호의 1916년 근대 최초 누드화 <해질녁>은 여체의 뒷모습을 그렸고, 30-40년대 서진달의 누드화 등은 얼굴의 세부 묘사는 생략한 채 여체의 인상적인 부분을 표현주의적 기법으로 두드러지게 표현하는데 주력했을 뿐이다. 당시로서는 이렇게 거의 전라(全裸)의 대담한 자태와 얼굴을 정면에서 세세하고 신비하게 형용한 그림은 없다.

이 그림은 전라 혹은 반라(半裸)를 막론하고 북한의 박물관이 유일무이하게 소장했었던 여인 누드화로서 진귀한 존재가치를 지닌다. 또한 해방 이전에 남겨진 우리(남북한)의 회화사에도 여체의 정면상을 정밀하게 다룬 누드화로는 거의 유일한 그림으로서 독보적인 진가를 지닌 작품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정온녀 화가의 '꽃 정물화'(12호 2005년)
정온녀 화가의 '꽃 정물화'(12호 2005년)

정온녀 꽃정물화(12호, 2005년)

우유 빛깔처럼 뽀얗고 백옥같이 보드라운 광택과 기품어린 윤기가 흐르는 백자 화병에 갖가지 화려한 꽃들이 만발해 있다. 꽃중의 꽃을 가리는 아름다움을 다투어 뽐내듯이 피어 있는 백화(百花)들의 수려함에 비해 백자의 담백함, 고동색 식탁의 진중한 무게감, 그리고 배경색의 겹쳐 바른 모노톤의 고상한 우아함은 안온하여 상호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화면상 잘려진 사각의 나무 받침과 역삼각형 굴곡미의 하얀 도자기는 직선과 곡선의 어울림을 상징하고, 한편으로는 소박한 자연미와 완숙한 인공미가 동시에 겹쳐지면서 구도상 상호 보완적으로 짜여진 절묘한 조화미를 살려주고 있다.

정온녀는 꽃병을 다양하게 바꿔가면서 동일한 구도의 꽃정물화를 즐겨 그렸는데, 그 중에서 이 꽃정물화가 가장 완성도가 높고 꽃과 배경에서 우러나올 수 있는 모든 이상적인 이미지들이 오버랩되는 그림으로 보여진다.

또한 다알리아, 국화, 과꽃 등 저마다의 꽃들에서 열정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색감이 난색조의 온화한 파스텔톤으로 휘감겨 있으면서도 이글거리며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어 색깔의 마법사라는 탄복을 자아낸다.

◇정온녀(1920-2011년)는 누구인가?

북한 최고의 여류 미술가로 평가받는 정온녀는 오직 창작에만 몰두했지만 삶은 그늘진 부분이 적지 않았다.
북한 최고의 여류 미술가로 평가받는 정온녀는 오직 창작에만 몰두했지만 삶은 그늘진 부분이 적지 않았다.

그녀는 북한 최고의 여류미술가로 92세가 되던 해인 2011년까지 장수하였지만 그녀의 삶은 그늘진 부분이 적지 않다, 정온녀는 오직 창작에만 몰두하면서 자기의 개인 생활에 관심을 돌리지 못하였다. 물론 자기 일신상 문제에 대하여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자신도 마음의 동요가 있었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은 그녀의 신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녀는 한때 짐을 꾸려 가지고 행여나 하여 한상익을 찾아 원산으로 갔었으나 한상익 자체도 녀성 보다 그림을 더 사랑했던지라 사이좋게 리해하고 헤여지고 말았다. 정온녀는 지금도 독신으로 장자강 기슭의 경치좋은 화실에서 깊은 추억을 안고 조국통일의 그날을 그리며 창작의 붓을 놓지 않고 있다.”

이 당시 한상익과 그녀가 사이좋게 헤어졌다고 이례적으로 두 화가의 연애담을 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정온녀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다른 이와 결혼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결국 그녀는 한상익이 54살 되던 1970년에 결혼을 하자 독신 선언을 했다.

그녀는 일제시대의 미인대회에 나가 1등이 없는 2등에 당선되었으므로 오늘날로 하면 ‘미스코리아 진’을 차지한 미모의 화가였다. 이런 화가가 어째서 독신을 고집했을까? 사연은 6.25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는 6.25 전쟁 중에 4살난 딸과 남편과 헤어져 이산가족 신세로 생사도 모른 채 가슴앓이의 세월을 보낸다. 그러한 상처를 잊을 만큼 세월을 흘려 보내고 난 뒤에, 그녀가 흠모하고 존경하던 선배 한상익 화가와 같이 살고 싶은 마음에 원산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그를 찾아갔던 것이다.

그녀의 개인전과 관련하여 감상록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미술에서 정온녀는 16세기 녀류미술가 신사임당과 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신사임당은 작품에서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였으나, 정온녀는 자기 작품들에서 시대를 열렬하게 긍정하였으며 사상정신적으로 아름다운 인간들의 고상한 성격들을 뚜렷하게 창조하였다. 력사는 응당 그의 재능과 창작적 성과를 시대의 자랑으로 전해갈 것이다.” 이 때부터인지 정온녀를 북한의 신사임당으로 부르는 별칭이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우리나라 전체 여류 양화가 계보의 서열 3위를 차지한다. 최초인 나혜석과 이중섭의 스승인 임용련의 부인 백남순에 이어 세 번째이고 그 뒤를 천경자가 잇는다.

정온녀는 43년 일본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서울경성일보사 기자를 거쳐 서울 여자상업학교와 용산고등미술학교 교사를 역임했으며 수원, 서울, 광주, 목포, 군산 등지에서 개인전람회를, 서울에서는 배정례, 박래현, 이현옥, 천경자와 함께 ‘여류 5인전’을 개최한 바 있는 인기 화가였는데, 그 당시 여류 화가로서는 굵직하고 힘 있는 과감한 붓터치가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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