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한 세계사적 사회적 이슈에 예술 창작 행위 몰입

함창연  화가의 자화상(50호 1987년)
함창연  화가의 자화상(50호 1987년)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위 자화상은 모스크바 등지에서 그의 국제적 명성과 저력을 이어갈 무렵이어서인지 그의 고결한 자태와 품격이 한층 돋보인다. 멋진 신사복을 입고 안락의자에 앉은 안정감 있는 자세와 세련된 남색의 원탁 식탁보가 중후하고 정갈해 보이며, 그 위의 아담한 꽃병 정물도 우아한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함창연은 서구적인 세련된 외모를 지녔고, 내면의 곧은 성정이 투영된 위풍당당한 지사형 풍모가 꺽이지 않는 절개를 지닌 선비 같으면서도 청아한 눈빛이 고요하고 그윽하다. 그는 풍부한 감수성과 예민한 지적 호기심에서 폴란드 유학 시절 서구의 이국적 정취와 풍경을 빼어나게 묘사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토속적인 정서와 민족적인 생활 미학에 뿌리를 둔 완성도 높은 작품들도 창작하였다.

함창연 화가의 신혼부부 나들이(49.5-35 연대미상)
함창연 화가의 신혼부부 나들이(49.5-35 연대미상)

▲신혼부부 나들이(49.5-35 연대미상)

산중마을에서 살고 있는 신혼부부의 순박한 삶의 풍경이 참으로 낭만적으로 묘사되었다. 신랑은 나뭇짐을 지게에 짊어지고 가면서도 연신 각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고 신부는 수줍은 미소를 흘리고 있다. 새색시는 물동이를 이고 다른 한손에는 밭갈이 도구를 들고 간다. 둘은 하루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우물가에서는 처녀들이 부러운 듯이 속삭이며 밀담을 주고받고 있으며 까치 한쌍도 경쟁적으로 사랑의 세레나데를 지저귀는 듯하다. 바둑이는 이들의 길잡이가 되어 행차를 돕고 있다. 가진 것이 많이 부족한 시절에도 지금보다 행복스런 삶을 살었던 선조들의 정다운 삶의 풍경이다. 아니 이 신혼부부의 표정을 보면 이 세상을 다 가진 부러운 것이 없는 삶처럼 느껴진다.

함창연 화가의 히로시마 원자탄(8호 1957년)
함창연 화가의 히로시마 원자탄(8호 1957년)

 ▲ 히로시마 원자탄(8호 1957년)

청년 함창연의 맑고 섬세한 감성과 불타는 예술에 대한 집념은 상대적으로 자유분방한 외국생활 속에서 그 예술혼을 꽃피울 수 있었다. 다작의 작가이며 수많은 장르에 도전했던 피카소에 자극받아 그도 순도 높은 감성과 절정의 직감에서 발현된 작품들 뿐만아니라, 그 당시의 예민한 세계사적인 사회적 이슈에 연결된 예술 창작에도 과감하게 몰입했다.

원자폭탄이 터지는 가운데 화산재와 같은 거대한 버섯구름이 우측에 배치된 민간인들을 공포와 절망의 도가로 몰아넣는 와중이지만, 입술을 굳게 다물은 좌측의 냉정한 인물들을 극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맨 좌측의 원숭이형의 두상을 가진 사람은 사무라이 정신의 일본군인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고, 중앙에 굳은 결기를 내보이며 비장한 표정을 짓는 인사는 자살특공(가미가제)을 감행하려는 사람처럼 최후의 결전을 각오하는 어두운 인상을 풍긴다.

함창연 화가의 령혼(8호 1958년)
함창연 화가의 령혼(8호 1958년)

▲령혼(8호 1958년)

그는 북한의 주체사상이 맹위를 떨치던 시기에도 감수성이 듬뿍 함양된 내면적인 자아의 세계를 화폭에 거침없이 옮기는데 주력했다. 그랬던 그를 북한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열외로 눈감아 주었을만큼 그의 불가침성의 배타적 권위에 대한 인정은 북한의 여타 예술가들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달랐다고 한다.

이 작품은 북한 미술계 인사가 그린 가장 파격적이고 농도 짙은 추상 표현주의 예술작품이 아닌가 싶다. 마치 영화 속의 아수라백작처럼 한 얼굴의 인간을 반반 양분하여 표현한 상상력의 극치이자 정점으로 달려가고 있다. 이 작품은 거기에다 한차원 높여서 인간의 유한한 외면과 영원한 영혼을 이글거리는 태양빛 아래 분노하는 인간상과 사후에 미소지으며 불멸의 영혼을 꽃피우는 해골로 형상하여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북한의 회화사에 다시 태어나기 어려운 철학적이고 신비적인 느낌의 불후의 명작이다.

함창연 화가의 조선전쟁(8호 1959년)
함창연 화가의 조선전쟁(8호 1959년)

▲ 조선전쟁(8호 1959년)  

함창연의 스승은 유럽에서 명성을 떨친 유명한 판화가이자 전 홍익대학교 미대 교수 거장 배운성이다. 함창연은 그의 스승을 능가하는 청출어람을 걸출하게 실현한 장본인으로서 그의 스승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그의 가장 주목받는 위대한 작품들은 최전성기라 평가받는 1950년대 폴란드 유학시절 6년 동안 탄생하였다.

6.25 전쟁 중 폭탄이 투하된 현장에서 탄피와 잔해들을 가운 입은 의사와 카메라 기자 등이 요모저모 신중히 살피고 있다. 그 사람들 위로는 갖가지 형상의 미세한 세균과 벌레들을 큼지막하게 그려냄으로써 세균전의 양상을 암시하고 있다. 미국은 일본의 악질전범들인 731생체실험 부대의 주요인사들로부터 실험보고서 일체를 접수받는 대가로 미국이 주관한 도쿄전범재판소에서 그들을 무죄 방면했던 전례가 있다. 작가는 아마도 그와 같은 사례를 의식하고 생화학전의 피해를 부각시키고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 같다.

◇ 함창연(1933-작고?)은 누구인가?

러시아 미술백과사전의 한국란에는 ‘한반도에는 겸재, 단원과 함창연이라는 화가가 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남북한 1세대 및 2세대 화가를 통틀어 세계적으로 가장 인정받는 현대 화가가 바로 함창연이라는 사실은 이 대목에서 입증된다.

그는 6.25전쟁 직후 폐허에서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북한 국민들에게 크나큰 감격을 선사하고 자긍심을 고취시킨 화가이다. 북한에서는 그를 1953년에 폴란드로 국비 미술유학을 보냈다. 바르샤바 대학 미술학교 재학중(6년)에 당시 라이프찌히, 비엔나, 모스크바 등 세계 유수의 미술 전시회에서 대상을 받는 쾌거를 일으켰다. 마치 북한이 1966년에 이탈리아를 제치고 월드컵 8강의 신화를 썼던 것에 버금가는 사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국내 미술평론가 오광수의 함창연에 대한 평가가 눈에 띈다. “그의 작품 내용은 북한 미술의 이념적 배경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벗어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노동하는 사람들, 강인한 어머니의 상, 자기 일에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직업인들의 모습은 사회주의 체제란 그 곳 사회의 상황을 실감 있게 반영해주는 소재들이다.

그러면서도 우리 고유한 정서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은 그의 예술이 체제에 순응하는 기계적인 작업이 아님을 웅변해준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유럽 체재 시 제작된 작품 가운데 종교적 감흥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 여러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성당이나 성당에 가는 사람이나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단순한 대상으로서의 호기심을 넘어서는 종교적 감흥을 지니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게 한다.

그가 종교에 어떤 관심을 보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온 그가 잠시이긴 하나 다른 나라에서 종교적 활동과 그 모습을 목격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는 흥미 있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라이프찌히 세계판화콩쿠르에서 피카소와 함께 금메달을 받았고 독일 지미뜨로브 박물관에 작품이 소장되었다. 또한 거제도에서 벌어진 사건을 담은 <증오>는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입상하였고, 1987년 모스크바국제미술전에서 계관상 등을 수여받았다. 그후 그는 평양미술대학 과학부학장을 역임하였고 송화미술원에서 말년에 화우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 함창연 부분을 인용한다. “그의 3부작 <화전민(1959년)>은 비엔나에서 열린 국제미술전람회에서 동메달을 수여받았고, <밭갈이(일명 계절고용농) 1959년>는 당년도 라이뿌치히 세계판화콩쿨에서 금메달을 수여받았으며 찌미뜨로브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판화들은 우리나라 판화의 성과작으로 뿐아니라 세계적 판도에서 볼 때에도 우수한 작품으로 인정되어 널리 선전되었고 1961년에 소련에서 발행된 <동방사회주의나라들의 현대미술>과 대학교과서 <미술사>에서 크게 소개하고 언급하였다. (중략)

함창연의 판화작품들은 회화예술의 현대적 미감을 충분히 살려내고 있는 측면에서도 주목할만하다. 판화 <밭갈이>는 조형형상과 판화기술적 측면에서 조그마한 손색도 없는 걸작의 하나이다. 이 작품을 본 외국의 여러나라 판화 전문가들과 판화경연 심사위원들은 일치하게 1등상을 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 높은 형상력과 독창적인 기술 수법은 세계판화 예술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고 하였다.

당시 경연 심사위원이었던 러시아의 미술가는 “판화 <밭갈이>는 내용과 밀착된 세련되고 현대화된 판화적 수법과 비상한 형상력으로 하여 다른 경연작품들을 완전히 압도하였다. 작품은 판화예술의 높은 형상력을 실천을 통하여 과시함으로써 참다운 본보기로 되고 있다.”라고 하였다. 당시 함창연은 스물여섯살의 청년이었던만큼 그가 일으킨 파문은 더욱 컸다.”

한편 평론가 리재현은 “그는 판화 예술 분야에서 배운성과 함께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관록있는 미술가이다. 배운성의 판화가 민족적이고 통속적이라면 함창연의 판화는 현대화된 판화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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