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조선화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나고 특이한 명필체 화가

최도렬 화가의  '평양 비파교 기슭에서'(161-85.5 1987년)
최도렬 화가의  '평양 비파교 기슭에서'(161-85.5 1987년)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2021년 창원의 북한미술 특별전시회에서 리석호와 정종여의 최고 작품들과 함께 북한미술 50대 주요작가들의 작품들을 망라, 100여점의 소장품으로 전시회를 개최한 적이 있다. 그때 메인 도슨트 한분이 최도렬의 본 작품이 가장 마음에 끌리고 제일 훌륭한 작품이라고 개인적인 소회를 피력한 적이 있다.

개인마다 작품 감상 포인트와 미적 취향 등이 제각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필자도 내심 단일 작품만 가지고 논한다면 이 그림의 수려한 작품성과 한없이 시선을 빨아들이는 그림 보는 재미와 함께 우리의 뿌리깊은 향토 정서에도 깊은 호소력을 던지는 작품이기에 그런 평가에 내심 동조가 된다.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아기자기하고 잘 짜여진 구조미가 압권이며 토속적인 정취가 전반적인 분위기를 휘감으며 노스텔지어의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이 그림에 몰입하면 한편의 전래동화처럼 푸근한 이야기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듯하다.

닭은 영물이라서 귀신을 볼 줄 아는 생물이라는 말이 있다. 닭이 새벽에 우는 이유가 어둠이 걷힐 때 밤새껏 지상에서 노닐던 귀신들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놀라서 운다는 고전적 설화가 있다.

또한 닭은 날개가 있지만 인간 세상을 위하여 그 날개를 하늘을 향해 나는데 쓰지 않고 땅에 정착하여 바지런히 모이와 벌레를 쪼아먹고 민활하게 움직이기 위해 사용하는 천사와 같은 존재이다. 닭은 쉬임 없이 계란을 낳아 인간의 주식으로 공급하고, 가축 중에서 가장 적은 사료를 먹고 초고속으로 자라나서 치킨과 삼계탕 등으로 활용된다.

가히 닭은 인간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만들어진 피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구상 여러 민족들의 종교와 금기 관습 때문에 소나 돼지 등의 가축은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닭은 애시당초 그런 터부의 육식 문화에서 열외되어 모든 민족들이 식재료로 환영하고 가장 가까이서 손쉽게 접하는 가축이다. 우리 속담에서도 백년손님인 사위가 방문하면 처갓집에서 씨암탉을 대접한다는 이야기로 대표된다.

남북한 모든 조선화가를 통틀어 그 화가의 필체와 필력의 근처에도 범접하기 불가능하도록 깊은 해자를 둘러친 유일한 화가가 있다면 그가 최도렬이다. 그는 붓 끝을 세워 예리하게 창처럼 찌르고 칼로 단도리를 치고 뱀의 몸통처럼 꽈리를 틀어서 도저히 그의 서체 자체의 모사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모사작을 시도하려 해도 마무리에서 공염불에 그치게 되고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 모사작이 없는 화가이다.

최도렬 화가의 '봄'(176-90 1987)
최도렬 화가의 '봄'(176-90 1987)

최도렬의 '평양 비파교 기슭에서' 작품은 아래와 같이 조선미술박물관 도록에는 '봄' 이라는 타이틀로 등재되어 있는 작품이다. 동일 년도의 작품으로 작품 사이즈도 비슷하지만, '평양 비파교 기슭에서' 작품은 그림을 그린 장소의 감회를 강조한 그림 제목이고, 박물관 도록의 '봄' 작품은 그림을 그린 시점의 여운을 간명하고도 인상 깊게 남긴 제명(題名)으로 볼 수 있다.

최도렬은 정종여와 리석호 라는 두 선배 조선화가의 거성에 치여 여간해서 최고의 화가라는 찬사와 관련된 닉네임을 부여받기에는 버겁고 힘겨운 샌드위치 판넬 신세였다. 바로 이 그림도 정종여의 조선미술박물관 도록의 표지그림인 '오월의 농촌'에 필적하거나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도전적으로 시도한 그림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떠오르는 영감이 오버랩되고 구도와 등장하는 제재(題材)가 유사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최도렬의 화조도에서 참으로 신선한 점은 제비가 등장하는 점이다. 한반도에서조차 사라져가는 제비들이 밝은 달처럼 한쌍이 두둥실 떠오르는 모습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제비는 사람이 드나들며 제비 가족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언제나 볼 수 있는 앞마당 위, 처마 밑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아 키우는 참으로 친근하고 고귀하고 행운을 가져다 주는, 우리 민족과 한가족처럼 지내온 길조이다.

한편 상단에 귀부인의 풍모를 갖춘 모란의 화려한 자태가 눈부시다. 그 아래로는 홀씨들을 다 퍼뜨리고 자신의 사명을 다한 듯이 홀가분하게 서 있는 민들레가 아담한 담벼락처럼 즐비하게 서 있어 귀인과 서민이 함께 다정하고 풍족하게 살아가는 대동세상, 여민동락의 화목한 진풍경이 눈분신 이상세계의 상징처럼 펼쳐져 있다.

수탉들이 눈을 부라리며 병아리 새끼들에 대한 주변의 보호막 광선을 쏘며 금을 긋는 듯하고, 암컷은 먹이감을 먹는 요령을 일러주는 듯 시범을 보이고 있는데 비해 병아리들은 한눈을 팔고 딴전을 피우고 있는 한가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희구하는 명작이다.

최도렬은 남북한 조선화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나고 특이한 명필체 화가여서 그의 필체를 한번쯤 세밀하게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3대 화가이자 몰골화의 대부인 오언 장승업의 후계자이자 유난히 추종했던 조선화가들이 김용준, 리석호, 최도렬 등이다. 그중 최도렬은 화필과 문필에 있어 달통한 몰골화가이자 특히 명필가로서 장승업과 함께 추사 김정희의 뜻을 계승하여 충실히 실행한 독보적 화가이다.

최도렬은 그의 서명 필체에서 초서체, 예서체, 행서체를 모두 구사한 특이한 화가로서 그의 서체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경지에 이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특이한 서명 때문일지라도 그의 모사 그림 혹은 가짜 그림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달리 말해서 그의 가짜 그림을 잡아내는 것은 조선화가 중 제일 쉽다. 도대체 흉내내기 어려움을 넘어 거의 불가한 필법을 휘두르기 때문이다.

◇최도렬(1918-1993)은 누구인가?

최도렬은 강원도 고성이 출생지 고향이지만, 어린시절 초중등학교를 서울에서 대부분 다녔고, 그림공부를 위해 일본 가와바다 예술전문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해방 후 활동 무대는 다시 강원도로 돌아와 조선미술가동맹 강원도위원회 위원장으로 맹렬하게 활동한 것을 보면, 그의 향수는 서울과 강원도를 아울러 향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그는 월북화가인 탓에 남한에서 두각을 나타낸 화가로 기억되고 있지 못하다. 그렇지만 그의 실상은 조선미술전람회에 여러번(3회 이상) 입선을 하고, 그의 '촌가'라는 작품은 선전에서 특선 후보로 평가를 받은 바 있으며, 해방 직후에는 조선미술가동맹 강원도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던 저명한 화가였다. 그는 일본대학 예술과를 졸업한 유학파로서 청탁 그림들과 병풍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한 위풍당당한 전업화가였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 최도렬의 대표작품인 '국화와 물고기'에 대한 예찬 평론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국화와 물고기는 전통적인 몰골기법으로 가을국화와 쏘가리 한 마리를 정물화 형식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나무가지에 걸어놓은 큼직한 쏘가리는 금방 물에서 건져낸 것처럼 탐스럽고 먹음직하다. 고기의 특징이 맹어의 기질이 드러나는 큰 입의 묘사에서 생동하게 표현되었다. 단붓질법으로 물기 있게 그려 필치가 살아있다.’

한편 골동품을 다루며 서화 감정을 하고 3.1운동에도 참가하였다가 쏘련에 피신 갔다 온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그림에 취미를 붙인 최도렬은 전통 문인화풍을 익히 보아오며 식견을 쌓았고, 습작을 즐겨 그리면서 부단히 실력을 연마한 결과는 김용준, 정종여, 리석호에 이어 근대 북한의 4대 정통 조선화가로 낙관을 찍게 된다. 그의 장수도 한몫 거들어 그의 조선화에 대한 출중한 재주와 예리한 직관 정신은 1993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왕성하게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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