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옛집'은 푸근한 소재와 색감으로 향수와 감성을 자극

림군홍 화가의 '고향의 어머니'(56-46 1950년대)
림군홍 화가의 '고향의 어머니'(56-46 1950년대)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림군홍의 '고향의 어머니'는 여느 그림과 확연하게 달리 목판 표면에 재질을 바르고 입혀서 적소에 입체감을 살리는 실험적인 부조(?) 방식의 연대미상(월북초기 추정)의 독특한 그림으로 사실주의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한 서명 부분의 림군홍 이름자가 음각으로 쓰여 있어 입체감의 효과를 배가하고 있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부처님같은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어머니는 평화로운 농촌 고향집 흙바닥에서 콩대를 움켜쥐고 콩을 따고 있고 짚으로 엮은 광주리에는 풍요를 상징하듯 콩대가 수북히 쌓여 있다.

림군홍은 일본 유학을 하지 않고 국내에서 독학과 견습으로 그림 수업을 쌓은 1세대 토종 화가이다. 광고 간판을 그리면서 생계를 잇고 중국에서 동료화가인 엄도만과 함께 그림을 전시 판매하기도 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이 그림은 집의 토담벽과 나무기둥들, 그리고 세간살이 집기류 등은 물론 마당의 흙바닥이 온통 황갈색의 단색조로 도배를 하다시피하여 색감의 안정감과 통일을 주고 나아가 자연과 인간의 일체감을 조성하고 있다.

어머니 앞쪽 좌우측으로 낫과 벗은 고무신이 놓여 있어 어머니의 수고로운 작업이 밖에서부터 계속 이어져왔음을 암시하고 있고 손에 잡고 있는 콩대에 두 개의 콩이 매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작업이 상당시간 지속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하얀 털무늬의 바둑이와 어머니의 하얀 저고리 그리고 탐스럽게 빨갛게 익은 고추와 붉은 색조의 닭들은 시각적인 단조로움을 덜어주며 어울림의 색채미가 혼연일체가 되고 있다.

돌아 앉아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강아지의 표정이 할머니를 안쓰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지루함을 못 이겨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한 알쏭달쏭한 표정이다. 닭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사이좋게 모이를 쪼아 먹는 정경은 어느덧 우리를 평화로운 고향의 품과 어머니의 숨결 속으로 빨려들게 하고 있다.

강아지, 닭, 콩대, 붉은고추, 광주리, 절구통 그리고 할머니가 서로 의지하면서 교감하듯 한식구 처럼 살아가는 모습의 전체적인 색감과 색조, 그리고 묘사된 대상과 소재가 된 오브제(Objet)등 에서 잘 나타나듯이 1940~50년대 우리 내 농촌풍경의 한 단면을 소박하고도 구수하게 잘 표현한 정겨운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림군홍 화가의 '그리운 옛집'(44.5-35 1978년 11월)
림군홍 화가의 '그리운 옛집'(44.5-35 1978년 11월)

맑은 물이 휘돌아 흐르는 개울가에서 마을 또래들과 물고기를 잡고 목욕도 하며, 비오는 날이면 그 위로 난 정겨운 다리를 건너야 비로소 다다르는 그리운 옛집, 누구에게나 그 곳을 떠나 있어도 늘 마음 한켠에 아련히 둥지를 틀며 향하고픈 고향집이 있다.

마을 입구를 돌아서면 향기로운 꽃들과 이름모를 풀들이 무성히 자라 있고, 친근한 논밭들이 나를 반기며, 그 옆엔 언제나 든든하게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들의 곧은 자태들이 펼쳐진다. 어렸을 적엔 고향의 옛집 뒤로 이 세상 무엇보다도 크게 보였던 큰 산들이 바람을 막아주듯 후미를 튼실이 받쳐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림군홍의 그리운 옛집은 누구에게나 공감할 수 있는 우리네 옛집의 노스텔지어를 자극하면서 푸근한 소재와 색감으로 그저 오롯이 감상하기에 좋은 감성의 작품이다.

전체적인 구도와 색감은 전통적 회화기법의 양식미를 따르고 있고, 디테일한 세부적 터치에서 벗어나 작품의 주제에 맞는 하나의 큰 덩어리감으로 그려냈으며, 비교적 굵은 리터치(retouch)로 주제표현에 집중한 걸 알 수 있다.

소제의 오브제들도 산, 물, 나무, 다리를 조연으로, 주인공인 그리운 옛집을 은근하게 부각하면서도 서로의 유기적인 관계설정의 연결 고리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표현하였으며 전체적인 감성표현에 주력하였다.

림군홍 화가
림군홍 화가

◇림군홍(1912-1979)은 누구인가?

림군홍은 만담꾼 기질을 다분히 지닌 화가이다. 아담한 화면에 인간사의 다채로운 스토리를 아기자기하고 재미있게 압축해서 표현해내는 재주가 탁월하다. 빼어난 예술가들 중 무명 시절 독학으로 혹은 사숙으로 눈물겹게 자신의 기량을 닦으면서 음지의 시절을 보내며 성공의 밑거름을 삼았던 이들이 적지 않다.

림군홍도 그중의 한 사람으로 젊은시절 중국 북경 등 외지로 가서 동료 화가인 엄도만과 함께 전시회를 열고 자신의 그림 화상도 겸했던 아주 개척가적인 예술가의 삶을 살았다. 독학파 국내 토종 화가이면서 대담하게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던 림군홍은 엄도만과 함께 예림도안사를 차려서 작품활동을 한다.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일제시대에 중국으로 들어가 항구미술광고사 화가로 있으면서 1946년까지 전시회와 판매를 하며 국제 화가로서의 경력을 쌓는다. 해방 이후에는 다시 국내로 들어와 고려광고사를 차려서 창작과 판매를 병행하다가 6.25 당시 국립미술제작소에서 김일성의 초상화를 제작한 이력이 계기가 되어 월북행을 택한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의 그에 관한 언급을 전한다. “경기도 서울시 중구 인현동에서 품팔이군의 셋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1927년에 서울주교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나 생활이 어려워 상급학교는 가지 못하고 신문 배달, 개인병원에서 막일을 하였다.

미술에 취미가 있어 낮에는 힘든 일을 하고 밤에는 서울에 있던 양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웠다. 처음에는 연구소 소장의 붓도 빨아주고 화포지도 메워주며 잡다한 일을 하면서 그림을 배우게 되었으나 그후 점차 재능이 알려져 연구소에서는 괜찮은 조건에서 미술공부를 시켜주게 되었다.(중략)

림군홍은 조선화 분야에서 혁명적 전환이 이룩되고 많은 미술가들이 당의 방침을 받들고 조선화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창작하던 1970년대 초에 근 40여년간 전공하여 오던 유화를 내놓고 민족미술 형식의 기법을 배우고 창작에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6개월간의 조선화화법 강습을 통하여 조선화의 여러 가지 기법들을 체득하였고 신심을 가지고 조선화 창작에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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