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크레딧의 명과 암

노벨평화상 수상자 무함마드 유누스가 지난 2월 13일 서울시청 간담회장에서 '약자와의 동행' 사업의 발전 방향 등을 주제로 열린 대담에서 발언하고 있다.방글라데시 출신인 유누스는 1976년 빈곤층 무담보 소액대출을 위해 그라민 은행을 설립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사진=연합뉴스]
노벨평화상 수상자 무함마드 유누스가 지난 2월 13일 서울시청 간담회장에서 '약자와의 동행' 사업의 발전 방향 등을 주제로 열린 대담에서 발언하고 있다.방글라데시 출신인 유누스는 1976년 빈곤층 무담보 소액대출을 위해 그라민 은행을 설립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사진=연합뉴스]

【뉴스퀘스트=안치용 ESG연구소장 】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기 어렵다’는 말처럼 가난은 대물림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하는 가난일지라도 사회 공동체가 적극적으로 나서면 해결할 수도 있다.

전 세계 최빈국에 속하는 방글라데시의 작은 마을 조브라에 사는 22세 여성 ‘소피아 카툰’은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허름한 집에 살면서 일주일 내내 대나무 가구를 만들어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소피아는 중간상인에게 5타카(60원)를 빌려 재료를 산 뒤 하루 종일 대나무 의자를 만들어 이를 다시 중간상인에게 넘기면서 5타카 50파이사를 받았다.

그러니까 그녀가 대나무 의자를 만들어 팔고 남긴 이익은 단돈 50파이사, 우리 돈으로 10원도 채 안되는 적은 돈이었다.

소피아는 숙련된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한 눈 팔지 않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매일 버는 50 파이사로는 근근히 생계를 이어갈 뿐이지 가난으로부터는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소피아는 중간상인이 없으면 재료비를 살 수도 없을 뿐더러 판로마저 막혀 중간상인의 절대적 영향 아래 놓였지만 고용된 것도 아닌 애매한 관계였다.

그래도 소피아는 고리대금업자에게서 돈을 빌려 대나무 의자를 만드는 아니어서 그나마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소피아와 달리 고리대금업자의 수중에 놓인 사람들의 형편은 더 나빴다.

1970년대 방글라데시에서는 소피아와 같은 수많은 서민이 고리대금업자로부터 착취당하는 등 극한의 빈곤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소피아에게는 기적이 찾아왔다. 수입이 이전보다 60배 이상 늘어나 1달러 25센트가 된 것이다.

물론 그녀가 의자 만드는 작업을 기계화해 대량 생산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아니고 나라님이 나서서 그녀의 가난을 거들어 준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중간상인으로부터 재료비를 빌리지 않고 직접 재료를 사서 물건을 만들어 팔 수 있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뒤에는 치타공대학 경제학과 교수 ‘무하마드 유누스’가 있었다.

유누스 교수는 이 가난한 소녀 소피아에게 아무런 담보없이 소액을 빌려줌으로써 기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라민은행’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소피아가 고리대금업자에게서 돈을 빌렸다는 것은 잘못 알려졌지만 실제 당시 방글라데시 빈곤층의 다수가 고리대금업자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유누스 교수는 미국 유학시절 배운 서구의 경제이론이 방글라데시와 같은 개발도상국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방글라데시는 1971년 독립선언 이래 250억달러가 넘는 해외원조를 받았지만 여전히 무수히 많은 국민이 굶주리고 죽어 나가는 현실에서 고도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서구 국가의 경제이론이 적용될 수는 없었다.

방글라데시의 실제 삶이 반영된 실물경제를 알고 싶었던 유누스는 1974년 캠퍼스를 벗어나 근처에 있는 조브라 마을에 가게 된다.

유누스 교수는 거기서 소피아를 비롯해 가난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고리대금업자가 일주일에 무려 10%의 이자를 요구했다고 증언했다.

이 이자를 1년치로 계산해보면 시장경제 이론을 도저히 적용할 수 없는 연간 3000%가 넘는 천문학적인 숫자였다.

유누스는 마이무나라는 여학생에게 마을 돌아다니면 소액대출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조사하도록 했고 마이무나는 소피아를 포함 42명의 명단을 만들어왔다.

유누스는 그들이 필요한 자금이 약 27달러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는 자신의 지갑에서 바로 꺼낸 27달러로 마을의 42명 여성들에게 무담보로 빌려줬다.

유누스로부터 돈을 빌린 여성들은 이 돈으로 바구니를 만들어 팔아 이익을 냈고 빌린 돈 역시 빠르게 갚았다.

그는 소액대출이 그들이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힘을 주고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심어준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했다.

이때의 경험이 1976년 무담보 소액신용대출인 ‘그라민은행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그라민의 방글라데시어로 마을을 뜻한다.

이 프로젝트는 시행된 이후 1979년까지 3년 동안 500명이 넘는 사람에게 소액 대출을 해주었고 대출을 받은 사람들은 혹독한 가난에서 벗어나 전보다 조금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전통적인 방식의 다른 은행들에 비해 그라민은행에서 돈을 빌린 이들의 상환율이 더 높았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그라민은행의 초기 성공을 기반으로 1979년 드디어 방글라데시 중앙은행이 그라민 프로젝트를 채택하면서 그라민은행은 방글라데시 전국의 여러 지역으로 확대운영됐다.

1983년 유누스는 그라민은행을 정식 법인으로 설립하고 독립은행으로 전환하여 극빈층 특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게 담보없이 소액을 대출해주는 신용대출사업을 본격화했다.

대출한도는 1인당 150달러 내외의 소액으로 비교적 작지만 그들이 기계수리, 인력거 구입, 젖소, 옷감 등 소규모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에 충분했다.

그라민은행의 현재 기본 대출 금리는 20%이며 대출 상환율은 2022년 3월 기준 97.2%에 달하고 있다. 2019년 조사에서도 상환율은 평균 96% 이상이었다.

이같은 그라민은행은 세계에서 상징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도 금융대출을 받고 상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공로를 인정받기도 했다.

그라민은행 모델 아이디어는 전 세계로 널리 퍼졌으면 유누스는 2006년에 자신이 설립한 그라민은행과 함께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창립 초반인 1980년 회원이 1만5000명 미만이었지만 2021년 10월 현재 방글라데시 마을의 93% 이상인 8만1678개 마을에서 944만명이 회원이 됐다.

2020년 보고서에 따르면 창립 이래 누적 316억달러 이상의 금액을 회원들에게 대출했다.

그라민은행의 성공적인 정착은 ‘마이크로크레딧’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됐다.

마이크로크레딧은 금융에서 소외된 사회적 취약계층에게 무담보 신용대출로 소액의 창업자금을 지원해주고 동시에 교육훈련 등 비금융 지원 서비스를 제공, 자립을 돕는은 금융기법이다.

사실 마이크로크레딧은 그라민은행 이전에 이미 시작됐다.

1720년 아일랜드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가 영국 식민 치하 조국의 비참한 삶을 바라보며 가난한 예술가들의 생활고를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조건없이 소액의 자금을 대출해준 것이 시초다.

그라민은행은 무담보 소액신용대출 은행시스템을 정착시켜 세계에 널리 알리고 새로운 금융질서를 만들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마이크로크레딧은 방글라데시와 같은 개발도상국 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도 진출했고 유엔이 2005년을 마이크로크레딧의 해로 지정할 만큼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나아가 그라민은행에서 영감을 받아 다양한 마이크로크레딧 기업이 등장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빈곤퇴치를 위한 효과적인 금융수단이라는 평가를 기반으로 비영리재단과 자선투자자를 중심으로 사업을 전개했으나 영리은행을 포함해 많은 투자자가 이 신흥시장에 자금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안치용 ESG연구소장
안치용 ESG연구소장

대표적으로 인도의 SKS 마이크로파이낸스는 1998년 자선단체로 출범했으나 상업자본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외부 자본을 투자받아 2005년 영리단체로 전환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마이크로크레딧이 투자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하나의 비즈니스 모델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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