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시장적인 개혁파로 평가, 풀어야 할 난제 수두룩
리창(李强) 총리 마저 5% 달성에 회의적

【뉴스퀘스트=베이징/전순기 통신원 】 중국은 현재 자국 이외의 국가가 글로벌 패권을 노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미국과 치열한 신냉전을 전개하고 있다. 중국을 대표하는 화웨이(華爲)와 틱톡(Tiktok) 등이 미국의 집중 견제를 받는 사실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경제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경제 주체들의 체력이 지난 3년 동안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정국으로 인해 많이 약해진 사실까지 감안하면 상황은 더욱 좋지 않다고 해야 한다. 중국 정부가 올해 경제 성장률 목표를 보수적이라고 해도 좋을 5% 안팎으로 정한 것은 다 까닭이 있다고 해야 한다.

이강 중국 인민은행 행장. 경제 성장률 5% 안팍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제공=징지르바오(經濟日報).
이강 중국 인민은행 행장. 경제 성장률 5% 안팍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제공=징지르바오(經濟日報).

그럼에도 경제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신임 리창(李强) 총리는 이마저도 달성이 쉽지 않다는 솔직한 심경을 최근 토로했다. 그만큼 현재 중국 경제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얘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이 미국의 견제를 극복하고 장기적인 국가 목표인 G1을 향해 매진하려면 어떻게든 이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그래야 국내외에 중국 경제에 대한 신뢰감을 심어줄 수 있다. 더불어 내년 이후부터의 경제 운용에도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 이 쉽지 않은 일은 말할 것도 리 총리를 비롯한 경제팀의 몫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따지면 미국의 연방준비제도(Fed) 같은 역할을 하는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리 책임을 진다고 해도 좋다. 최근 중국 언론에서 이강(易綱. 65) 행장의 행보를 유독 주목하면서 향후 경제 상황을 예견해보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중국 경제가 가장 중요한 순간에 인민은행장으로서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됐다는 말이 될 수 있다.

잘 하면 영웅, 못 하면 역적이 될 수도 있는 묘한 입장이 된 그는 베이징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수재로 유명했다고 한다. 칭화(淸華)대학과 함께 중국 최고 명문 중 하나로 손꼽히는 베이징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77학번 동기들 중에는 그보다 세 살이나 많은 법학과의 리커창(李克强) 전 총리도 있었다. 그가 오랜 기간 리 전 총리의 최측근으로 불린 것은 이 때문이 아닌가 보인다.

이후 그는 외국에 나가지 못한 당시의 대부분 수재들과는 달리 미국 유학에 나서는 행운을 잡았다. 석사학위는 미네소타주 소재의 햄린대학 경영학과에서 2년 만에 받았다. 이어 일리노이대학에서 1986년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따냈다.

미국 학계는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박사가 된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특히 인디애나대학은 종신 교수직까지 제안하면서 그를 영업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그는 1994년까지 8년 동안 인디애나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연구하는 선택을 하게 됐다.

1994년은 그의 인생에 있어 중대한 한해가 됐다고 해도 좋다. 자신의 귀국을 계속 권고한 모교 은사들의 간청을 이기지 못하고 인디애나대학의 종신 교수 자리를 포기한 것이다. 그는 베이징대학으로 돌아와서도 미국에서 연구에 전력하던 때의 초심을 잃지 않았다. 지금은 국가발전연구원으로 확대, 개편된 베이징대학의 중국경제연구센터를 공동으로 설립하면서 교수로도 맹활약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는 1997년 다시 인생의 전환점에 서게 된다. 베이징대학을 떠나 인민은행의 화폐정책위원회 부비서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면 분명 이렇게 단언해도 괜찮다. 불혹 전후의 나이에 다시 직장을 옮긴 그는 인민은행에서도 주변의 신뢰를 한 몸에 받은 채 승승장구했다. 우선 2002년 비서장(국장급) 겸 화폐정책사(司.국) 부사장(부국장)으로 승진했다. 이어 이듬해 화폐정책사 사장으로 승진한 다음 2004년 7월에 행장조리(부행장보)에 올랐다.

3년 후 그는 일반의 예상대로 부행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너무 잘 나갔기 때문일까, 그는 부행장 자리에 무려 10여 년이나 봉직하는 기록을 세웠다. 별로 자랑스럽지 않을 만년 부행장이라는 별명도 이때 얻었다. 미스터 런민비(人民幣)라는 별명의 저우샤오촨(周小川. 75) 전 인민은행장이 무려 16년 동안이나 장기 집권한 탓이었다.

하지만 그는 10여 년을 권토중래한 끝에 2018년 드디어 인민은행장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지난 13일 막을 내린 제14차 전국인민대표대회(국회에 해당하는 전인대) 1차 회의에서는 물러날 것이라는 당초 예상을 뒤엎고 연임에도 성공했다. 이로써 그는 제롬 파월 Fed 의장처럼 향후 5년 더 중국의 경제 성장률과 통화 및 물가 정책을 총괄하게 됐다.

그는 인민은행 내에서는 대표적인 일벌레로 유명하다. 주말에도 사무실에 출근해 혼자 업무를 본다면 더 이상 설명은 필요 없다. 또 박학다식하면서도 타고난 분석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 옳다고 판단하면 선뜻 받아들이는 등 마음이 열려 있는 것도 장점으로 꼽히고 있다. 때문에 그가 안정적이면서도 친시장적인 개혁파 인물로 꼽히는 것은 하나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앞으로 그에게는 많은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달러 대비 위안화의 환율 방어가 간단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세기 말까지만 해도 위안화는 글로벌 거지 화폐로 불리면서 1 달러 당 8.2 위안 전후를 기록한 바 있다.

그러다 이후 계속 강세를 유지하면서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6 위안 전반을 기록하는 등의 기염을 토했다. 5 위안대 진입은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후 7 위안까지 맥없이 추락하다 다시 반등하는 등 등락을 거듭하면서 지금은 6.88 위안 전후에 이르고 있다.

금융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미친 듯 널뛰기하는 환율은 경제 운용에 긍정적이지 못하다. 어떻게든 잘 방어해 안정적으로 안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미국이 금리 인상 등을 통해 교란에 나서면 대응이 쉽지 않다. 그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경기 부양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보인다. 5% 안팍의 경제 성장률 목표를 달성하려면 재정을 쏟아부어야 하나 중국의 현 상태로 볼 때 쉽지 않다. 최악의 경우 인플레이션을 촉발할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나게 불어난 지방 정부들의 부채, 부동산 기업들의 유동성 위기 등 역시 그가 풀어야 할 숙제라고 할 수 있다. 행장으로 재임되면서 5년 더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이 축복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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