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의 기쁨'은 환하게 웃고 있지만 절제된 표정에서 묻어 나는 깊이감 덕분에 경건하고 고귀하게 보여

최재덕 화가의 해부 (98-71 1961년)
최재덕 화가의 해부 (98-71 1961년)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해부는 어부의 북한식 어휘다. 어찌보면 바다사나이라는 해부의 표현이 어부라는 직업적인 성격의 어휘 보다 한결 멋있고 적확하다는 느낌이 든다. 해부의 초록빛 차림새가 푸른 노을빛에 물들어 바다와 대지가 온통 청록빛에 젖어 있고 하늘빛에 그물의 벼리 자루 부분이 눈부시게 하얗게 빛나고 있다.

빛에 반사되는 그물 벼리 자루 부분과 어깨와 팔의 모서리 선 부분을 흰색 물감으로 바르지 않고 하얀 여백으로 처리한 점은 눈여겨 볼 특이한 포인트로서 화가가 유화의 다양한 표현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는 대가임을 드러내고 있다.

하늘빛(Sky Blue)에 투영된 일렁이는 바다물결의 표현은 언듯 보기에 겹침채색(Impasto)으로 일부 보이긴 하나 그린블루(Green Blue)와 그레이블루(Gray Blue)가 선명하면서도 서로 독자의 채색으로 밝고 생동감 있게 병치혼합으로 표현됐음을 알 수 있다. 병치 혼합된 물결의 표현은 이 그림의 백미이기도 하다.

바다의 초록 이끼가 오랜 세월 동안 육지에게 다가가 쉬임 없이 풍화작용를 시도하면서 자기의 색깔과 체취를 묻히며 바다와 땅의 경계를 몽롱하게 섞어놓고 있다. 해부에 등장하는 바다사나이들의 풍취에서도 바다 내음새와 바다 물감이 흠뻑 배어 있는 듯 마치 바다가와 바다, 하늘과 해부는 서로의 색깔을 뒤섞으며 혼연일체의 색채감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푸르른 석양빛 속에 잠들어가는 바다를 뒤로 하고 해부들은 하루의 일상을 고요하게 마감하고 있다. 조각배를 정박시키고 그물을 정리하고 있는 가운데 주인공, 물 속에 반쯤 몸을 잠근 채 무언가를 건지러 가는 멜빵 바지 차림의 사나이, 저 건너 나룻배에는 한 사람을 앉히고 다른 한사람은 노를 저어 함께 육지로 귀환하고 있는 두 사람, 그리고 금새 잡은 고기를 물통에 담아서 바닥에 닿을 듯 둘이서 힘겹게 들고 가는 두 사나이, 이들 모두에게는 바다와 함께 호흡하며 부대낀 하루의 일상이 이들의 삶을 지탱해준 보람의 일기로 기억될 것이다.

해부의 얼굴을 찬찬히 응시해보면 바로 작가 최재덕 화가 자신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 진중하고 음미하는 듯한 표정과 육중한 체격, 도톰한 구릿빛 얼굴, 그리고 화가의 모자를 쓴 해부의 인상은 영락 없이 그를 화폭에다가 옮겨 놓은 것이다. 자기의 몸만 겨우 들어갈 듯한 조각배가 주인님을 바닷가에서 육지로 실어다 놓고는 휴식을 취하고 있다.

조각배의 주인인 해부는 분신과 같이 수고를 한 배와 일용할 양식을 선사한 바다에게 눈을 지긋이 감고 기도하듯이 무한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양 손으로는 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자 동반자인 어망을 어깨에 둘러메고서는 쓰다듬으며 마치 화가 자신에게 절대적인 생명줄이나 다름 없고 세상을 담아내고 표현할 도구인 붓과 물감, 캔버스와 견주고 있다.

최재덕의 인물화는 그 자신의 기품을 반영하듯 중후하고 마음씨 좋은 엿장수처럼 온화하며 알곡이 꽉 찬 듯한 후덕한 품성과 해맑은 성격을 지닌다. 만석꾼 집안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촉망받던 그는 친구따라 강남 간다고 절친이었던 이쾌대, 김만형 등의 북행길에 동승하여 월북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그를 요즈음의 강남좌파로 비유하기에는 훨씬 더 격이 높고 낭만적인 위인이다. 그는 순수하고 정이 많으며 우직한 사나이이기 때문이고 그러한 원만한 성품은 그의 화폭 속에서 고결한 인물의 탄생으로 귀결된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도 그를 긍적적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위상에 걸맞는 대우로서는 오십프로 부족한 갈증을 느끼게 한다. 남한에서도 거장의 반열에 올랐던 최재덕은 북한에서 평양미술대학 교원으로서나 조선미술가동맹 간부로서 뚜렷한 족적을 시원하게 보여주지 못하는 진한 아쉬움을 남겨준다. 남한에서처럼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며 나그네 같은 삶을 즐긴 탓일까? 아니면 북한에서 거대 지주 계급의 꼬리표가 계속 따라다니며 그의 행보에 암암리에 족쇄로 작용했던 때문일까?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는 1961년도에 최재덕이 어촌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최재덕 화가의 '수확의 기쁨'(70-49 1961년)
최재덕 화가의 '수확의 기쁨'(70-49 1961년)

경상도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그가 사회주의 미술운동을 하고 월북을 감행한 이유는 뭘까?

북으로 간 화가 중 최재덕과 가장 가깝게 지낸 태평양미술학교 동기생인 박득순은 “그의 집은 다섯 대문 정도 되는 으리으리한 전통 한옥이었다. 그의 그림은 우수하였고 전람회 때마다 그의 명성이 이를 뒷받침 해주었다. 데생력은 좋지 않았으나 깊이가 있었다. 사실적인 그림은 못되고 장식적인 그림이라고나 할까.(중략) 최는 좌익을 할만한 위인은 못되었다.

최재덕의 옆에는 김만형이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김이 마음씨 좋고 돈많은 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북으로 함께 간 것 같다. 같은 또래의 두 사람은 술을 원체 좋아해 종로 쪽에 단골집이 많았다. 돈을 거의 최가 댔다고 한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는 낭만적 사회주의자였던 거 같다. 요즘 말로 하면 강남좌파(?)라고나 할까? 정현웅, 김만형, 이쾌대 등 친한 화우(畵友)들과 남조선미술가동맹 활동을 하는데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그의 인물화를 보면 참 그윽한 깊은 체취가 풍겨온다. 인물 한명 한명에 정성스러운 진면목이 담겨 있는 진중한 표정의 깊이에서 박득순이 말한 ‘깊이가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그의 대표작은 61년에 그려진 그림이 여럿 있다. '사과 따는 처녀', '해부(海夫)', '수확의 기쁨' 등이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은 대표작 '사과 따는 처녀'가 초상 형식을 발전시켜 주제적 내용을 담은 작품이라고 소개하면서 유화적인 맛을 살린 공간적 깊이와 색채의 풍부성 그리고 센 붓질은 화가의 개성적인 창작능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현대적인 느낌을 실현하였다고 평했다.

이 평가는 '수확의 기쁨'에 그대로 적용하여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사과 따는 처녀’의 표정은 어쩐지 자연스러움이 덜 하고 좀 경직되어 보여서 전체적인 그림의 품격은 ‘수확의 기쁨’과 동일선상의 반열이 되기에는 역부족이고 뒤쳐져 보이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 노란 색감의 붉게 물든 조밭 속에 있는 부부의 표정을 보라! 하얀 이를 반쯤 드러낸 채 두 손에 낱알이 빼곡이 들어찬 조를 만지며 행복해하고 감사하는 모습에서 밀레 그림 속에 등장하는 순박한 농부들의 표정과 모습이 연상된다. 하지만 어떤 밀레의 그림에서도 이렇게 멋지고 숭고한 표정의 사람의 인상을 본 기억이 없다. 환하게 웃고 있지만 절제되어 있는 표정에서 묻어 나는 깊이감 때문에 이 인물들이 더욱 경건하고 고귀해 보이는 것이다.

조밭의 색깔은 짙은 살색의 사람 피부색과 색감이 닿아 있고 뒤쪽의 윤곽만 보이는 세사람의 색상은 아예 조밭의 색상에 동조화를 이루고 흡수되어 있어 상호간 색감이 균질화 과정을 통해 통일적으로 융합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인간의 정열적인 노고와 헌신에 대해 촉촉한 토지의 온기와 잘 익은 곡식이 이글거리듯 화답하고 있다.

사회주의가 주제화 기조의 그림들을 통해서 생산을 독려하고 근무의욕을 고취하고 있는 점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그림은 그런 점을 충족하는 차원을 넘어 다양하고도 훌륭한 메시지를 안겨주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교감과 합일에 이르는 자연친화적인 메시지와 함께 같은 땅에 발딛고 땀흘려 일하고 있는 부부의 모습을 통해 가족간 화목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 그림은 명화가 갖출 수 있는 모든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감동, 환희, 진실, 풍요, 경건 등’

◇최재덕(1916년 ~ 1973)은 누구인가?

최재덕 화가
최재덕 화가

최재덕은 1916년생으로 1973년 작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는 사망년도가 기재되어 있지 않을 정도로 그의 말년 생활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최재덕은 남한에서는 남조선미술가동맹의 조직부장을 비롯하여 지도적 인물로 활동한 경력의 소유자이자 제1회 대한민국 국전 추천작가로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58세의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한 최재덕은 북한에서 대부분의 1세대 월북화가의 약력에 들어 있는 조선미술가동맹 위원이나 평양미술대학 교원의 이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는 그가 북한에서 비교적 야인으로 활동한 것으로도 볼 수 있으며, 핵심적인 화가군에서 상당히 소외되었음을 방증하는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쾌대와 함께 그는 말년에 북한에서 적합하게 걸맞는 대접받지 못한 비운의 예술가가 아니었나 하는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남한의 작고한 원로평론가 이구열의 미수기념 문집(청여산고)에 실린 최재덕에 대한 짤막한 언급을 전한다. “1950년의 6.25전쟁 발발과 남침 공산군의 초기 승세는 그를 전날의 좌익노선 동료화가들과 다시 결합하게 했다가 9.28 서울수복에 당면하여 북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같이 월북한 부인이 열렬한 좌익 여성동맹 간부였던 관계도 작용했던 것 같다. 눈물을 흘리며 어쩔 수 없이 북으로 간다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이 있다.”

한편 107세를 살다 2022년 작고한 김병기 화가의 최재덕에 관한 회고에서 최재덕은 혈기왕성한 낭만적 사회주의자 청년으로 묘사되어 있다. 북한에서 북조선미술동맹 서기장을 하다가 회의를 느껴 6.25 이전에 남으로 내려온 자신을 향해 당신은 변절자라며 “그래 북에서 미술동맹서기장까지 한 사람이 거기 일은 어찌 팽개치고 남으로 내려올 수 있느냐?”고 꾸짖듯이 말하여, 그와는 말을 섞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의 회고담이 이어진다. “최재덕은 진주의 만석꾼 갑부집안의 귀공자였는데, 이쾌대, 김만형 등 친구들과 한때 좌익 활동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그가 참 순진했다는 생각이 여실히 든다. 향후 그와 화우들은 다시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우익으로 전향한 활동도 활발히 하여 좌익활동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듯했으나, 6.25 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한 북한측 인사들에 의해 다시 좌익 활동에 깊숙이 개입하여 결국 불가피하게 월북행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병기 화백은 그전에 일제시대의 최재덕에 관한 일화도 전하였다. “일제 말 최재덕은 형과 함께 고향 진주에서 일경의 검문을 받게 되었다. 그 시절 다리를 건너려면 경찰이 ‘황국신민의 서사(誓詞)’을 외우게 했다. 그런데 두 형제는 외우지 못했다. 그러자 경찰은 사람 노릇 못 한다며 막았다. 할 수 없이 둘은 개처럼 기어 다리를 건너야 했다. 군국주의 일제 말의 광기 어린 횡포가 아닐 수 없다. 화가로 하여금 긴 다리를 기어가게 하다니, 정말 암흑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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